페르시아

0927 소생프로젝트 영화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10-05 17:17
조회
58
(아마도) 최초로 1주일 이상 지난 후기입니다. 지난 목요일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보았고, 저는 며칠 전에야 후기를 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후기가 너무 늦어버려 죄송합니다. 메모해놓은 것을 토대로 기억을 더듬어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영화는 중간에서 시작합니다. 톨게이트에서 일하는 사람의 손과 그 앞에 잠시 멈춰섰다가 지나가는 차들이 보이고, 지진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라디오 방송이 들립니다. 저는 뭐랄까, 영화가 시종일관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익히 보아온 재난영화들은 ‘재난’이라는 엄청난 스펙터클과 그것을 둘러싼 정서를 자극할 만한 이야기들을 중심에 위치시키고, 나머지 부분들을 그 주변에 배치합니다. 그러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카메라는, 마치 영화의 중심인물인 감독과 그 아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지진이 일어난 코케에서 보게 될 것이 무엇인지 전제하지 않은 채 그저 감독과 아들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재난에 대한 익숙한 전제로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카메라는 여정 중에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냅니다. 영화는 코케의 친구들과의 감동적인 해후를 그리지도, 재난을 스펙터클화하지도 않음으로써 정서적인 동일시를 허용하지 않고, 마주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혜원누나도 비슷한 언급을 한 것 같은데, 저는 차를 몰고 코케로 향하는 감독의 태도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진 소식을 듣고 그곳의 친구들의 상황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감독은 그저 코케로 향할 뿐입니다. 그에게는 네비게이션도 없고, 지도도 없습니다. 그는 그저 지진 소식을 들었고, 들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구호물자를 실은 차량을 제외한 다른 차량들에 대한 고속도로 출입이 통제되자, 감독은 코케가 어느 방향인지도 모른 채 물어물어 코케를 찾아갑니다. 저는 영화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방향을 알아야만 출발할 수 있는 걸까요? 도달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첫 발을 내딛을 수 있는 걸까요? 혹여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을지라도, 코케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선 순간 감독과 그의 아들은 이미 ‘코케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영화가, 혹은 그곳의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의 의식 속에서 죽음은 삶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좀처럼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재난과 계속되는 매일매일의 삶을 나란히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는 순간 밥을 먹고, 숙제를 하고, 축구를 보고, 사랑을 하는 매일매일의 일상은 전면적으로 중지되어버릴 것이라고, 혹은 중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영화는 죽음과 삶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한편에서는 시체를 매장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는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월드컵을 보기 위해 안테나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지진이 일어난 다음 날에 결혼을 하고, 엄마는 숙제를 하지 않은 아들에게 잔소리를 퍼붓습니다. 그렇게 삶은 계속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이 영화가 끊임없이 '영화'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영화인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뮌헨에서 테헤란으로 돌아온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코케로 향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아들의 대역을 할 배우 2명과 스텝들을 데리고 가면서 찍은 영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코케로 향하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여정 자체가 영화가 된 것이죠. 그러니까 영화는 어떤 여정을 재현하거나 연출하는 대신 여정과 더불어 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이 영화는 분명 배우들을 쓰고 있고 극 영화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동시에 이전에 찍은 영화들을 언급하는 등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계속해서 모호해집니다. 막연하지만, 키아로스타미가 '현실'을 재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 영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늦은 데다가 부실한 후기를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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