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181011 소생 프로젝트 후기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10-12 16:32
조회
88
이번 오전 토론에서는 <천일야화3>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랑이야기가 책의 거진 70프로를 차지하다보니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요, 여기에서 현재 우리의 사랑에 대한 관념과 다른 지점들이 몇몇 보였습니다.


사랑의 맹목과 소유를 허락하지 않는 이야기


이발사의 여섯 형제 이야기에서 저희가 주목했던 것은 ‘사랑의 맹목’이었습니다. 맞은편 집의 부인에게 홀딱 반해버린 이발사의 첫째 형은 내내 부인에게 놀림만 당하다가 부인의 남편에게 조롱을 당하죠. 그래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사랑의 맹목을 조롱할 것으로 생각할까?’ 이들에게 매몰되어 있는 상태, 소유하기를 원하는 정념은 나쁜 것일까요? 그러고보니 서로만을 갈망했던 솀셀니하르와 대공이 서로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은폐된 장소 뿐이며, 그들은 만나려고 할 때마다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려 결국 그들의 만남은 계속 불발됩니다. 이야기는 사랑이 고착되어 증폭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이야기의 소재가 없어지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혹시 무슬림들 또한 무의식적으로 사적 소유로서의 사랑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보았습니다. 솀셀니하르와 대공이 죽은 뒤에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은 것도 그들의 사랑이 더 이상 감춰야만 하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칼리프는 물론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모두의 것’,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칼리프의 웃음


여섯형제들의 이야기에서는 ‘웃음’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이발사가 차례차례 들려주는 그의 여섯 명의 형들은 하나 같이 끝이 좋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아했던 부인의 남편에 의해 채찍을 맞거나, 망상에 빠져 자신의 전재산인 유리 그릇들을 왕창 깨버리거나 하는 식이죠. 단순하게 행과 불행으로 나누어 이들에게 나타난 사건을 보자면 그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상황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칼리프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코미디 프로를 본 것처럼 한바탕 웃어댑니다. 이 웃음의 의미는 뭘까요? 누군가의 불행을 듣고 웃는다는 것은? 토론에서 저희가 추측한 바로는, ‘칼리프’라는 존재는 이슬람 사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그가 다스리는 지역의 상황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조망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여섯 형제들같이 그들만의 관점에 빠져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 ‘웃을만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기 보다는, 여섯 형제들 각각에게는 엄청나고 심각한 불행이었을 사건이 그의 넓은 시각에서는 지역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촌극과 같았던 것이죠.


이제 강의 후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환대의 미덕

<천일야화>를 계속 읽으면서 눈에 띄는 점은 낯선 이방인을 만나는 등장 인물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그를 자신의 집에 들이고, 먹을 것을 제공한다는 사실이죠. 심지어 그들은 그 낯선 이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도 합니다. 서로간의 신뢰가 갑자기 그렇듯 두텁게 쌓일 수 있는 걸까요? 신뢰가 ‘쌓여야 한다’는 우리의 관념이 이상한 걸까요? 낯선 자를 환대하는 미덕은 비단 <천일야화>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채운샘은 일리아스에서도 이런 관념이 있다고 하는데요, 바로 낯선 자를 받아들여 먹이고 재우는 등의 환대 행위는 ‘제우스의 뜻’이라는 것이죠. 또한 환대하는 사람의 조건은 그가 언제든지 적대자로 돌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어야만이 ‘환대’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사람, 친한 사람을 우리 집에 들이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죠. 낯선 사람을 환영하는 이슬람 사회만의 맥락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혹시 상인의 윤리와 관련될 수도 있을까요? 자신들 또한 이동하는 사람들이니, 낯선 곳으로부터 이동해 들어온 사람을 잘 맞이해야 한다는 윤리가 적용될 수 있을까요?


행과 불행


 나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사람을 환대하는 윤리는 대체 어떤 감각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나의 적대자를 만나는 것을 위험이나 불행으로 해석하지 않는 걸까요? <천일야화>를 보다보면 확실히 그런 면들이 많습니다. 바두르 공주와 카마르알자만 왕자의 사랑이야기만 보아도 서로 헤어진 상황을 물론 슬퍼하기는 하지만, 바뀌어 버린 삶의 조건 전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공주는 왕의 노릇을, 왕자는 농부의 노릇을 하는 등 성별이 바뀌고 신분이 바뀌었지만 그것에 대한 번뇌 내지 고뇌가 없습니다. 행여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한탄이라도 할라 치면 옆의 사람은 말합니다. ‘다 신의 뜻이야. 그 분이 다 알아서 하셔.’ 행과 불행이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 인간이 착해서도 나빠서도 아니라는 것, 인간의 의도를 넘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이들은 ‘신’이라는 존재를 끌어와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섯 형제 이야기를 보면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들 모두에게 ‘불행’이 닥칩니다. 하지만 이것이 누가 작정하고 이들을 불행으로 내몬 것은 아니죠. 굳이 인간에게서 원인을 찾자면 그 불행의 상황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간 그들의 어리석음 정도입니다. 하지만 좋아하게 된 여자가 그를 골려주려고 마음 먹은 일, 하필이면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뺏는 노파를 만나게 된 일 등은 아무리 ‘잘 살아야지’ 마음 먹어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들이닥치는 우연일 뿐입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의 예상대로 되지 않으면 보통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불행을 최대한 줄여나가기를 원하죠. 하지만 나의 예상대로 일이 풀린 적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우리는 왜 불행을 줄이는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이렇게 질문하다보면 행과 불행을 바라보는 관점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키아로스타미의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를 보면 지진과 같은 ‘큰 불행’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어느 곳에서도 ‘불행의 흔적’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괴로워하며 비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포커스를 맞추는 대신, 감독이 같이 영화를 찍었던 아이들의 생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현재를 보여줍니다. 지금 그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어떤 것을 하려 하는지, 무엇에 관심 있는지. 그 속에서 그들의 친척이 몇 명 죽었고 집이 다 무너져 내렸다는 등의 우리가 ‘슬프다’고 생각될 만한 사실들이 조금씩 드러나지만, 키아로스타미는 그들과 같이 슬퍼하고 동정해야 한다는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그 상황에서도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안테나를 설치하는 ‘생의 움직임’에 주목합니다.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어떤 것을 욕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지진이라는 사건만 아니면 여느 사람들의 삶과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사랑


마지막으로 ‘사랑’입니다ㅎ 갑자기 주제 전환이 되었는데요, 어쨌든 <천일야화3>에서 본 사랑이야기는 근대인들의 사랑 감각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채운샘은 근대인들은 사랑의 본질이 감정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드라마들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주목을 하죠. 처음에 둘이 어떻게 만나고, 어떤 계기로 호감의 감정을 싹틔워서 사랑까지 골인하게 되는지. 그 과정이 설득력이 있으면 있을수록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되죠. 그런데 <천일야화>에서는 둘이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립니다. 사랑에 빠지기 까지의 감정의 변화가 있을 새도 없이 단숨에 서로를 열렬히 갈구하는데요, 근대의 사랑 이야기가 사랑을 이루기 까지의 시련과 역경을 보여준다면 <천일야화>와 같은 이야기들에서는 사랑 다음에 시련이 옵니다. 역경과 시련 속에서 그들의 사랑을 ‘실험’하게 되는 것이죠. 우연한 계기로 서로 헤어지게 되고, 낯선 곳에 떨어져 위기 상황에 닥칩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살던 패턴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삶의 조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공주는 왕이 되어 나라의 일을 맡게 되고, 장차 왕이 될 사람이었던 왕자는 농부가 되어 농사를 짓게 되죠. 그들에게만 매몰된 사랑이 아니라, 다시 말해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둘이 만나 n개의 관계가 생성되는 이야기. 분명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사랑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관계들이 형성됩니다. 바두르 공주와 카마르알자만 왕자는 둘이 헤어지고 서로 만나기까지 많은 관계들을 맺어가는데요, 특히 바두르 공주가 그의 남편 카마르알자만 왕자로 변장해 아내를 맞는 상황은 너무 신선했습니다. 자신의 남편의 아내를 맞는다니, 이건 무슨 관계인 걸까요? 심지어 남편과 재회했을 때 바두르 공주는 자신이 두번째 아내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둘의 사랑을 ‘이루는’ 것이 해피엔딩이라 생각했건만, 이것은 해피 엔딩인듯 한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해피 엔딩은 아닌 참 당황스러운 엔딩입니다. 그들에게 사랑은 둘만의 것이 아니고, 이상적 상태를 이루는 것도 아닌가 봅니다. 그들에게 사랑은 사랑에 빠진 이후 겪어나가는 역경의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매 순간 변화하는 관계들을 또 겪어나가는 것 그 자체일까요? 하긴, 사랑이라는 것이 둘 사이의 관계만을 전제하고, 그 감정 또한 단독으로 존재하여 이루어질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감각이 더 이상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랑을 너무 특권화 하는 우리는 그래서 사랑을 못하고 있는 걸까요? 허허


이번 <천일야화3>는 1권이나 2권에 비해 재미가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었는데, 막상 이렇게 후기를 적어보니 그렇지만도 않네요! 생각할 거리나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다음주까지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만나게 될지 ㅎㅎㅎ 그럼 다음주에 봐요!
전체 1

  • 2018-10-12 18:53
    어떤 사랑을 해오셨기에, 어떤 사랑을 꿈꾸고 계시길래 사랑을 특권화하셨을까요? ㅋㅋ 사랑 이야기가 단지 둘의 애틋함만 그리는 게 아니라 둘을 둘러싼 수많은 인물이 개입되고, 사랑도 금방 다른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는 네버 엔딩의 구조가 뒤통수를 팍 치더라고요. 사랑 이야기가 이런 전개로 진행된다는 것도 신기했고요.
    그리고 행과 불행에 대해서는 이들의 태도가 또 인상적이네요. 단지 이 세계에 행, 불행이란 없어. 네가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야. 라는 것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불행을 어떤 식으로 해소하는지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