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예술인류학 3주차(11월 24일) 공지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8-11-19 13:11
조회
135
<담주 공지입니다!>

예술인류학을 시작한지 2주가 지났습니다! 예술이 뭔지 감이 오시나요?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대칭적인 사유’를 알려준 ‘예술 인류학’을 마무리 하고 다음 주에는 조르주 바타이유,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을 173쪽까지 읽겠습니다. ‘예술이 뭘까?’에 대한 물음을 갖고 책을 읽으시고 공통과제를 한 장 분량으로 작성해 오시면 됩니다.

다음 주 간식은 선미 샘과 정주 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동적 지성과 예술

강의의 시작은 신이치가 말하는 유동적 지성(대칭성의 사고)이 예술을 이해하는데 어떤 비젼을 주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비젼을 ‘라스코 동굴 벽화’를 통해 보여줍니다. 그에 따르면 이 동굴 속 벽화는 인류 최초의 예술이었고 다른 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증표였습니다. 컴컴한 동굴에서 보이지 않는 대상을 그려냈다는 것은 대상과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을 ‘망상’할 수 있는 마음의 ‘잉여’가 생겼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이전 인류와는 다른 뇌구조의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동굴 속 벽화를 그렸던 인류에게 마음의 잉여, 즉 유동하는 지성이 생겼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예술과 종교의 활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유동적 지성과 예술의 탄생은 동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이치는 현생인류가 이러한 뇌구조의 혁명적인 변화를 겪은 이후 현재까지 동일한 뇌구조를 갖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신이치가 중요하게 생각한 인간의 주요 특징은 ‘유동하는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질서나 규율과 같은 코드가 경화된 사회에서 코드로 환원 불가능한 유동하는 지성은 억압해야 할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감각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신이치는 동굴의 시대와는 다른 이 시대에 예술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유동적 지성에 의해 생성된 예술과 같은 ‘비철학’으로 ‘철학’에 접근함으로써 코드화된 세계를 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강의에 따르면 이렇게 탄생한 예술은 사유의 재료로 감각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이런 예술은 우리의 관성적인 관념을 ‘치고 들어와 뒤흔드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얼굴을 뚫어 놓은 조각’을 볼 때 얼굴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낯선 이미지와 마주할 때 비로소 사유가 시작됩니다. 이 사유에는 관성이 작동하기 때문에 예술과 같은 사유의 재료로 자극을 줄 때에만 코드에 의해 억압당한 유동적 지성을 깨울 수 있겠지요. 코드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고 소통할 수 있는 우리는 이러한 코드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코드를 교란시킬 수는 있습니다. 이것을 채운 샘께서 ‘저항’이란 개념과 연결시켜 주셨는데 저항은 코드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코드로 포획되지 않는 다른 힘을 갖고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기존의 코드로는 해석할 수 없는 형상이나 문장과 같이 코드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코드화된 사회로 갖고 오는 것입니다. 예술은 이러한 코드화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읽을 조르주 바타이유가 예술이 잉여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술은 코드에 속하지 않는 대칭적 영역에서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데아와 코라

일상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생각을 할 때 주로 관념적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관념’이라는 단어는 현실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관념이란 단어는 플라톤의 ‘이데아’의 번역어이고, 이 이데아는 곧 ‘에이도스’(형상)라는 뜻이었습니다. 현재 언급되는 이데아는 순수한 정신세계를 뜻하는 단어로만 알고 있지만 플라톤이 저서 <티마이오스>에서 이데아는 ‘본다’는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강의에 따르면 시각적으로 ‘본다’라는 의미는 동서양에서 특별한 의미로 쓰였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도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깨닫다’는 의미인 ‘견성’이라는 단어도 부처를 ‘본다’라는 의미입니다. 서양에서는 앎이라는 것은 곧 ‘본다’라는 뜻인데 이에 대해서 채운 샘께서 오이디푸스와 호메로스의 의미를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신화 속 주인공인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보편을 아는데 나를 모르는 자’입니다. 이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자기 눈을 찌르는데, 이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앎이 외부가 아닌 내면을 보는 것을 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고대 서사 시인인 호메로스는 ‘눈먼 자’라는 뜻인데 이는 눈에 보이는 감각의 차원을 넘어서 ‘다른 차원의 것을 보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종합하면 안다는 것은 곧 본다는 것이고,  본다는 것은 외부의 감각이 작동하지 않은 어두움 속에서 내면의 형상을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동굴 비유를 통해서 이데아를 설명했던 것은 어두움 속에서 사물과 현상의 여러 파편들이 생겨나게 된 근원적인 원인, 인간의 원형 무의식의 차원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여러 가지 파편들을 연결시키면서 추상해 내는 것, 즉 관념이라는 것은 추상의 능력이기도 한 겁니다. 이 원형을 보기 위해서는 시각적 감각을 넘어서는 차원이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플라톤에게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의 행위는 내면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했을 겁니다. 그런데 현재에 ‘초월’이라는 단어는 본래의 뜻과 달리 왜곡이 되어서 ‘초월’이라고 하면 일상을 넘어서는 지상 밖의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채운 샘께서는 초월을 이해할 때는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개념을 구분해서 기독교 신과 같이 우주의 지평 밖으로 넘어가는 비약의 차원을 말하는 것인지, 우주의 내재적 초월을 의미하는 것인지.

<티마이오스>에는 이데아와 함께 ‘코라’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신이치는 ‘이데아’가 후대의 관념론에 ‘코라’는 유물론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신세계를 가르치는 이데아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써 코라라는 개념을 물질세계라고 이해했었습니다. 그런데 강의에 따르면 코라는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물질세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코라는 자궁과 같이 뭔가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진입하는 것을 위해 자기 자리 양보하는 것을 뜻합니다. 코라는 모든 것이 생성되는 우주의 몸이며 물질을 생성할 수 있게 하는 장입니다. 이데아가 형상의 최초의 원인이라면 이 원인이 발생하는 장소를 코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코라는 구체적인 사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장소(토포스)와 사사무애

이번 강의 내용 중에서 장소(토포스)에 대한 개념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장소’라는 개념을 설명해주시기 위해서 채운 샘께서 이우환 작가의 ‘쇠판과 돌을 잔디에 설치한 작품’을 예로 들어 주셨습니다. 물성의 가진 재료가 없었다면 잔디라는 장소를 의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산업재료인 철판과 자연재료인 돌이 ‘놓임’으로 해서 잔디라는 장소가 가진 의미가 발생하고, 이 소재들이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서 그 의미의 해석이 달라집니다. 즉 장소성은 그곳에 놓인 구체적 물질성과 관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장소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곳으로써 이런 점에서 장소는 ‘코라’의 개념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렇게 장소와 대상이 분리되어 인식되지 않는 것처럼 장소적 사고로는 전체와 개체와의 관계, 개체와 개체와의 관계를 따로 떨어뜨려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장소’는 ‘리사무애’와 ‘사사무애’란 개념으로 연결이 됩니다. 모든 것이 개체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비대칭적 사회에서는 개체들이 '나=너'로 존재할 수 없는 대립된 코드로서 존재합니다. 이것이 개체의 세계, ‘사’의 세계입니다. 사의 세계는 드러난 현상 세계이고 이 현상은 어떤 인연 조건으로 인해 생겨납니다. 이러한 연기의 세계, 전체의 세계가 ‘리’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사와 리가 구별되지 않는 ‘리사무애’의 세계에서는 어떤 전체적 연기 속에서 개체가 나옵니다. 채운 샘께서는 구별되게 드러난 현상을 긍정하면서도 개별화시키지 않는 것이  ‘연기적 사유’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신이치가 말하는 대칭적 사고이며,  장소적 사고이겠지요. 이 사고가 작동하는 대칭성의 영역에서는 ‘리사무애’ 뿐만 아니라 개체와 개체간의 경계가 없는 ‘사사무애’도 일어납니다.  코드 사이에 경계가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여러 의미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규정성도 갖고 있지 않은 절대무인 장소에서는 맞고 틀리냐의 가치 판단의 차원을 넘어서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해석이 차원이 중요해 집니다. 다양한 색채의 의미를 생성하는 해석의 장을 예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예술을 통해 어떤 해석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을지 더더욱 흥미진진해 집니다.
전체 3

  • 2018-11-21 20:11
    와! 혜림샘~ 강의내용을 이리 잘 정리해주시다니요...감사합니다. 빈약한 지식으로 신이치를 읽다보니 많은 오해와 오독이 생겼습니다. 채운샘의 풍성한 강의와 이렇게 잘 정리된 글을 함께 읽으니...확실히 뭔가 다른 것들이 몰려오는 것 같은... 감동이...그러나아직은 어려워용~~ 아무튼가네....네~~ 간식들고 갈께용^^

  • 2018-11-23 11:14
    저도 장소에 대한 개념이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놓이는 것들의 바탕이지만 개체를 아우르는 것은 아닌, 개체와 분리되지도 않은 차원으로서의 장소. 어렵습니다 ㅋㅋ

  • 2018-11-23 23:43
    아~ 예술을 하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어려운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