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예술인류학 4주차(12월 1일) 공지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11-28 14:43
조회
127
공지부터 드리겠습니다!
다음시간까지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읽으신 후 A4 1장 분량으로 공통과제를 써주시면 됩니다. 역시 글의 중심 화두는, 예술이란 뭘까?라는 질문입니다.

간식은 지현샘과 영민샘께 부탁드릴게요~!


이번 시간에는 조르주 바타유의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을 읽었습니다. 라스코 동굴은 신이치도 이야기한 것처럼 일상생활의 공간에서 저만치 떨어진 어두컴컴한 장소였습니다. 굳이 그 곳까지 가서, 깜깜한 내부에서 동물을 그리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타유는 그것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이치가 예술의 발생을 인간의 마음과의 대면을 통해서 설명했다면 바타유는 금기라는 키워드로 밀고 나갑니다.

 

금기의 위반으로서의 예술

금기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금기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금기는 우리 사회를 작동시키는 코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코드들은 우리가 ‘노동자’, ‘소비자’, ‘학생’ 등의 어떤 부여된 역할들이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규칙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예술은 이런 세계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합니다.

 바타유는 니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니체는 ‘어떻게 인간적 가치를 벗어날 것인지’를 사유한 대표적 철학자입니다. 그는 우리가 그 자체로 선하다, 좋다고 이야기하는 가치들을 의심합니다. 부지런히 노동하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과 같은 우리가 별 의심 없이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사실은 그 자체로 자명하거나 필연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죠.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든 가치들을 화폐로 환원하곤 합니다. 지금 이것을 하면 미래에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거야라던가, 아니면 꼭 돈을 많이 번다는 목표가 아니라도 현재를 미래에 종속시키는 모든 행위들이 목적에 환원되는 가치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미래를 상정하지도, 어떤 목적을 설정하지도 않습니다. 니체는 태양의 덕을 말합니다. 어떤 외삽된 가치들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생명체들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뿜는 태양.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어떤 목적도 없이 그냥 주는 태양.

 바타유는 니체가 말한 태양의 덕과 비슷하게, <저주의 몫>이라는 책에서 자본주의의 가치에 환원되지 않는 행위들을 설파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는 생산과 소비를 벗어나, 소비를 전제하지 않는 증여, 생산을 전제하지 않는 소모. 그냥 줘버리고, 그냥 써버리는 것. 얼핏보면 터무니 없이 황당해 보이는 이 행위들은 자본의 목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의 경제에 저항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더 가지고 있는 소유의 상태를 수치라고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줘버리거나, 줄 곳이 없다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바타유는 이러한 행위가 바로 자연의 본질과 맞닿아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연, 우주의 에너지는 근본적으로 ‘과잉’입니다. 양이 많다는 의미에서의 과잉이 아닌, 코드에 갇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과잉. 우주는 무언가가 형성되면 형성된 것을 흐르게 하면서 해체시킵니다. 우리의 휴식은 다시 일로 복귀하기 위한 것임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우주의 논리에 따르면 소비는 다시금 생산에 종속되기 위한 활동이 아니고, 생산 또한 소비에 환원되기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선물, 증여, 파괴를 통해 그냥 줘버리고 해체시켜 버리는 것이죠.

 그와 더불어 바타유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금기, 그리고 금기의 위반입니다. 금기가 금기인 줄 모른채 무심코 저지르는 위반은 무지일 뿐이라고 바타유는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위반이란, 금기를 깬다는 자각과 함께 합니다. 불안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저지르는(!) 행위. 그것이 바로 위반인 것이죠. 그것은 사회적 금기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저항입니다. 푸코는 바타유의 이러한 개념을 빌려와 사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늘 생각하던 방식으로 자신의 사유를 재생산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사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생각해오지 않았던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사유이자 금기를 깨는 위반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방식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의 지평, 그리고 그 지평 속에서 작동되는 코드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돈을 벌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가 내 손으로 돈을 벌어 내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당연한 것으로 짙게 깔려 있습니다. 사회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습적 생각 방식으로부터 한발짝 물러나서,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은 단순히 금기를 어기는 행위가 아니라 금기를 만드는 코드를 흘러넘치게 하는 힘의지, 즉 창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코드를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가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죽음과 섹스

<에로티즘>에서 바타유는 삶에 포함되지 않는 낯선 체험 두 가지를 말합니다. 죽음과 섹스. 이 둘은 ‘인간 안에서 인간성이 빠져나가는 체험’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체험될 수 없다는 점에서 삶의 바깥에 있지만 삶이 다하는 경계에 항상 죽음이 있으므로 죽음은 삶의 한계이며 삶과 접해있는 경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섹스는 ‘작은 죽음’이라고 불리는데요,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조건임과 동시에 나의 에너지를 소모시킨다는 점에서 나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죽음과 섹스는 분명 비일상적으로 느껴집니다. 노동하고 휴식하는 일상적 코드에 맞게 살아가면서 구성하는 ‘적당한 감각적 쾌락 내지 즐거움’과는 비교되지 않는, ‘삶의 한계’를 넘나드는 체험. 이것은 분명 단순 즐거움이나 쾌락으로 환원되지 않는 힘의 느낌인 것 같습니다. ‘이만큼 해야 뭘 얻을 수 있고, 어떻게 살 수 있다’는 목적론적 사고로 환원되지 않는, 이 모든 코드들을 허물어뜨리는 세계. 그런 점에서 죽음과 섹스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탄생 보다 죽음의 의례가 훨씬 많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닐까요? 공동체에서 특정 역할을 담당하던 이가 죽었다는 것은 공동체의 위협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로부터 무너질 일상의 세계를 다시금 지탱하기 위한 일련의 의식을 치름으로써 공동체는 일상을 교란하는 사건들로부터 자신을 지킵니다. 이렇게 보면 죽음과 섹스는 일상을 교란하는, 인간의 가치가 빠져나가는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놀이와 웃음


티치아노(Titian),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 캔버스에 유채, 119 x 165cm,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마네(Manet), [올랭피아(Olympia)], 1863년. 캔버스에 유채, 130.5 x 190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인간의 가치를 넘어가는 것이 예술의 예들 중 하나는 마네의 <올랭피아>입니다. 기존의 이상적 미를 대표하는 비너스의 그림이 아닌,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전혀 아름답거나 이상적이지 않은 그림. 여신이 아닌 여자. 마네는 우리가 그리는 방식, 그림을 보는 기존의 코드들을 다 뒤집어놓음으로써 기존의 가치를 넘어가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바타유는 본 것이죠. 삶은 코드로 이해될 수 있지 않습니다. 불쑥 그런 코드를 넘어가는 다른 힘들이 침입하고, 이질적 관계들이 들어오며, 다른 생각을 만나도록 하는 우연을 내포한 삶. 그는 ‘우연에의 의지’를 강조합니다. 우연이 끼어드는 삶을 긍정하는 것이 바로 놀이와 웃음입니다.

 웃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강요하는 코드들을 주어진 것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 보며 그 가치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볼 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놀이는 주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외부의 가치들, 그리고 그 가치들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으로부터 나옵니다. 목적이 아닌 세계를 사유하는 것.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코드화된 신체와 마음을 넘쳐흐르는 낯선 힘의지로의 고양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를 관습화된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고, 그 감각과 함께 생성되는 다른 관념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무용성’은 유용한 것을 만들지 않기와 같이 수동적인 느낌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입니다. 무용성을 생산하기!
전체 2

  • 2018-11-29 07:47
    지은샘의 무용성 생산에 감사합니다~~^^

  • 2018-11-30 17:13
    사회적 금기를 위반할 때의 불안감 때문에 금기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유용함을 따르기 쉽지요.. 그런데 바타유가 말하는 주권적 삶을 살기 위한 위반이란 행위는 '불안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저지르는 행위'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불안을 과연 넘어 설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지만, 단순히 금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창조를 수반한 위반이라면 그 불안함은 또 다른 정서로 바뀌겠지요?! 다른 정서로의 이동이 곧 '새로운 창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