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지은팀]예술인류학 3주차 후기

작성자
조관희
작성일
2018-12-01 04:35
조회
111
18.12.01 / 예술인류학 3째주 /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_조르주 바타유 후기 / 조관희

 

저번 강의에서 채운쌤이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가져야한다고 하셔서 여기에 초점을 두며 바타유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바타유가 말한 예술이란 위반이라고 했습니다. 위반은 질서로부터 나왔고, 질서는 네안데르탈인의 특징인 노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그렇다면 바타유가 말하는 위반이란 무엇인가? 위반을 통해 무엇을 얻는가? 두번째 질문은 형용모순인거 같습니다. 유용한 것을 얻으려면 위반이 아닌 질서에 익숙해져야 하니까요. 그럼 왜 위반을 하는가? 바타유는 그걸 라스코 벽화에서 위반, 예술의 탄생의 단서를 찾습니다.

바타유는 코드의 흘러넘침, 그러니까 신화와 유동적 마음이 넘침에 따라 주체가 해체된다고 했습니다. 주체의 해체란 지식, 언어의 해체이고 덕분에 세상을 코드화, 동질화하는 성질이 누그러집니다. 고대인들은 주기적으로 질서를 위반하는 축제를 주기적으로 실행함으로써 인간의 동물성이 폭력적으로 분출되지 않게 예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누그러짐이 있기에 어떤 사회에서도 폭력적 영화나 예술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이런 폭력적인 예술을 금기하는 것이 폭력적이라는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이 폭력성에 대해서는 피와 전쟁을 재현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폭력이란 사고와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지식의 해체)이고 여기서 설명할 언어가 없을 때 질문을 던지며 삶을 살 때 감각의 변형이, 욕망의 변형이 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보니 뒤샹의 샘이나 홍상수의 영화가 (세련되면서) 엄청난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위반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주체성도 붕괴됩니다. 이 붕괴가 니체와 바타유의 주권이란 개념인데, 이는 환희이자 힘의지이자 내적체험이라고 합니다. 주체성을 붕괴한다면 나의 인간성도 함께 부정되고, 이는 라스코벽화의 그림에서도 기껏해야 노동이 특징인 자신이 부끄럽다는 듯이 인간은 조촐하게 그리거나 동물 형상 뒤에 숨어있습니다.

내적체험은 질서의 코드인 돈, 신과는 반대되는, 신체의 한계를 느끼는 큰 죽음과(죽음) 작은 죽음(섹스)를 통해서도 느껴지기에 이는 노동의 세계에서는 금시기 되었기에 신성화 되고 이를 종교가 관장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굳이 그림을 그리기 힘들지만 질서와 동떨어져있는 라스코 동굴에서 그림을 그리며 주술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 논리를 경제로 들고 오면 소비는 생산을 전제로 하는 유용한 것이며 그냥 소모하거나 증여는 생산으로 돌아가지 않는데, 이런 경제서도 바타유가 집필했다고 들었습니다.

바타유 책과 수업을 통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확한 답은 없었지만 확실한 건 예술이란 무용하고 아름답진 않다는 것은 이해가 됐습니다. 예술이 유용하면 노동이 되기 때문이며, 아름답다는 것 역시 질서가 부여한 것을 재현해내는 것이지 감각, 지식을 마비시키는 불쾌감을 주지 않으니까요.
전체 2

  • 2018-12-01 07:23
    아름다움과 유용함과는 거리가 먼 예술! 기존의 감각과 사고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마주침 ㅎㅎ 그걸 토대로 어떤 질문을 던지기 보다 "이거 뭐야 당췌 모르겠네" 하며 그냥 지나갔던 수많은 날들이 떠오르네요ㅠ ㅎㅎㅎㅎ

  • 2018-12-01 21:29
    아름다움이 아닌 폭력성을 느끼게 하는 예술과 마주할 때 우리의 감각이 변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우면서도 납득이 되는 부분이었어요~~ 예술의 기원을 통해 예술의 다양한 의미들이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