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예술인류학 5주차(12.08) 공지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8-12-03 10:48
조회
122
이제 세미나에서 읽을 책이 1권 남았습니다. 다음 주는 엘리아데의 <상징, 신성, 예술>을 2장 까지 읽겠습니다. 공통과제는 이번에도 ‘예술이란 무엇일까’를 중심으로 정리해주세요!

간식은 순화샘과 현주샘께 부탁드릴게요~




예술을 근원적, 발생적 차원에서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예술인류학세미나>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논의가 가능한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갖고 있던 편협함을 하나씩 깨고 있습니다. 저번 시간에는 바타이유를 통해서 금기를 위반하는 예술의 개념을 이해했다면, 이번 시간에 읽은 <레비스트로스의 말>에서는 집단마다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예술의 기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채운 샘께서는 발생적 차원에서 예술의 의미를 되짚어 봄으로써 우리도 우리 시대의 예술이 의미화 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술을 작품으로만 여기고 개념적으로 접근한다면 예술을 통해 어떤 담론도 형성하지 못하겠지요. 어떤 담론이 예술 작품에 작동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혹은 예술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묻기 위해서는 사회적 맥락을 들여다 봐야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예술이 하나의 작품으로써 고정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파생시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회적 맥락에 주목함으로써 주체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점이 그가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자로서 이 시대에 공헌한 바입니다. 구조주의자는 의식되지 않는 심층적인 원리를 탐색하는 자인데, 레비스트로스는 우리와 다른 사고 체계를 지닌 ‘원시’ 사회의 심층을 연구하면서 같은 사물 혹은 사건이어도 집단마다 다른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우리는 ‘원시’라고 불리는 사회를 미개하고 수준이 떨어지는 사회로 규정해 버립니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은 진화의 끝으로 생각하고 원시는 과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타자의 사회를 우리가 옳다는 기준으로 대상화하여 연구하지 않고, 그 사회를 관통하는 심층적 구조를 연구하면서 사회 구조에 따라서 다른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과거의 유물로서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미학적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어떤 기능을 하던 ‘물건’이 전시적 가치가 있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 놓이면 그것은 미학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물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서 일상적인 물건이 되기도 하고 예술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의미를 발생시키는 선결조건이 구조적 맥락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무엇보다 ‘구조’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구조를 벗어나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 내려는 추상화를 비판적인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체를 파괴했던 레비스트로스에게 추상화는 작가가 어떤 의도를 지니고 만든 ‘내적 질서를 지닌 예술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추상화를 심층의 구조에서 집단적 의미를 구성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추상화를 비판하는 맥락이 강의를 들으면서 더 명료해졌습니다. 추상 화가는 코드를 부정하기 위해서 회화 안에만 작동하는 코드를 만들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코드에 갇혀버렸다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코드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사회적 맥락이 제거된 작품이 되어서 의미화 작용이 불가능해져 버렸습니다. 모순적이게도 코드를 벗어나려던 추상화는 어떤 벽에도 어울리는 장식품이 되어버립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말>이 예술론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원시미술과 현대예술로 대표되는 추상화가 언급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전통성을 보존’하려 했던 원시미술을 통해 현대 예술이 상품화 되면서 사회적 의미와 맥락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사회적 맥락과 전통성을 중시한 레비스트로스는 ‘코드를 따르는 예술’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탈코드’나 ‘저항’, ‘위반’이라는 개념과 함께 이해한 예술과 개념으로만 비교하면 상반되어 보이지요. 원시미술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주목했던 ‘전통성의 보존’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전통성이란 사회의 심층구조를 관통하는 집단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존한다는 것은 고정하고 유지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질적인 대상들을 결합하는 ‘브리꼴라주’를 통해서 서로 다른 배치를 만들어 내고, 수많은 의미를 파생함으로써 이 전통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구조주의자나 탈영토, 탈코드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서 구조주의를 비판한 푸코나 들뢰즈와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 체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 조건 안에 함께 놓여 있습니다. 채운 샘께서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의 개념을 상반된 것으로 보기보다 시대마다 넘어서야 할 벽이 달라서 시대적 맥락마다 다른 개념이 추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서로 다른 개념 때문에 헷갈렸던 것은 개념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념만을 비교하며 답을 찾으려 할 때 ‘탈맥락’의 늪으로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예술인가’라고 할 때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읽을 책들에서는 각 작가들이 예술의 의미를 어떤 맥락에서 추출해낸 것인지에 주의를 기울여서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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