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NY 3학기 3주차 후기

작성자
박주영
작성일
2021-08-16 14:10
조회
126
  코로나 거리두기 4단계 지속으로 이번 주에도 대면과 비대면 나눠서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확진자 수가 줄어들지 않고 있어 걱정이 많이 되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모두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대해봅니다. 계속 줌으로 접속하여 세미나 참석하시는 쌤들 고생이 많으시고 다들 보고 싶네요.^^ 이런 상황조차 운명이며 필연적인 것이니, 이럴 때 저희가 어떻게 현명하게 길을 만들어갈지 같이 고민해봐요. 이번 주에는 조를 나누지 않고 다 같이 모여 니체와 루쉰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후기를 작성하게 될 줄 알았다면 메모를 더 많이 하여 논의된 내용을 자세히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망각의 힘이 크게 작용하여 주옥같은 얘기들이 머릿 속에서 많이 사라져버렸네요.ㅠㅠ 기억을 더듬어 퍼즐을 맞추듯 세미나중에 나왔던 내용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1.「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3장 및 4장

  이번주에 읽어야 할 부분은 ‘제3장 종교적 삶’과 ‘제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인데 4장에 대해 주로 얘기를 나눴네요.

  먼저 3장에 대해 언급하자면, 가장 앞부분에 나온 재앙에 대한 이중의 투쟁에 관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니체는 어떤 재앙이 닥쳐올 경우, ①원인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②우리의 감각에 미치는 영향을 바꿈으로써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은 저희는 고통이나 재앙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응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병, 가난,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등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다 사라졌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실제 재앙의 원인이 사라졌다고 해서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회사의 상사 A가 인사이동을 통해 나와 인연이 끝났다고 해서 회사생활에 변고가 없지 않습니다. 새로온 상사 B, 또는 상사 A에 가려져 있던 후배 C 등이 고통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죠. 코로나 19의 원인을 찾고 이를 방어할 수 있다고 해도 또 다른 바이러스가 등장하게 될 수 있기에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재앙의 원인이 다 없어졌다고 생각해보면, 그 곳은 파라다이스가 아닌 삶도 죽음도 없는 황무지와 같은 곳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니체는 재앙의 이익이 나중에야 명백해지는 그런 좋은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붙임으로써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종교와 예술은 체험에 관한 우리의 판단(ex: ‘신은 그가 사랑하는 자를 응징한다.’)을 바꾸고 고통과 정서에 대한 일종의 쾌감을 일깨우면서(ex: 그리스 비극) 우리의 감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중요하죠. 즉 종교와 예술은 재앙이 우리의 감각에 미치는 영향을 바꿔주는 기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앙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거나 올바르게 해석하려고 할수록, 그만큼 그는 재앙의 원인을 직시하게 되고 그것을 제거하기 힘들다고 니체는 얘기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맥락과 인연조건을 보게 되면 그 일이 하나의 원인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원인들은 시공간을 걸쳐 복잡하게 연계되어 있어 이들을 제거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통이나 재앙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감각이라고 니체는 봤는데, 무엇을 욕망하고 어떤 것을 행하는 데 있어서 쾌감/불쾌감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진리로 여겨졌던 종교, 이성 등도 이면을 보면 쾌/불쾌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제3장 종교적 삶의 120절 쾌감의 증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에 드는 의견은 참이라고 인정된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오히려 자랑으로 삼고 있는 쾌감의 증명(또는 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위력의 증명)이다.” 우리가 숭고하게 생각하는 믿음, 진리도 결국 쾌감의 증명일 수 있다고 보네요. 그렇기 때문에 감각이, 감각에 미치는 영향들이 중요하고 니체는 이런 차원에서 예술을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예술에서 가장 많이 얘기했던 부분은 ‘천재’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저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모차르트 등 예술가에 대해 어떤 상을 갖고 있습니다. 신이 재능을 내린 천재. 그들을 천재로 바라보는 밑바탕에는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있죠. 니체가 말한 것처럼 뛰어날 예술가, 철학자, 작가들에 대해 우리와는 아주 먼 존재, 신의 은총으로 생각할 때만 그들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듯이 나와 비슷하고 가까운 존재가 무엇을 이루었을 때 우리는 불쾌감을 느끼곤 합니다. 니체가 우리의 천재예찬에 대해 비판한 것은 우리가 타인이 잘되는 꼴을 못보는 질투심이 강한 존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차라리 그 질투 때문에 더 노력을 한다면, 그 마음이 나쁘다고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결과를 낸 것인지 보지 않고 그의 완성품에 대해서만 경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생성중인 모든 것은 경시됩니다.

  그래서 니체는 허영심으로 천재를 예찬하는 우리들에게 제4장 163절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을 통해 과정을 알려줍니다.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고 노력이라도 해보라고. 예를 들어 소설가가 되고 싶으면,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해보고 매일 일화를 써보고, 인간의 유형과 성격을 수집하거나 윤색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고 등등. 이 밖에도 훈련이 더 많은데, 이 모든 것을 20~30년을 해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어떤 사람의 글도 밖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봅니다. 니체가 얘기한 과정을 들으면, 굳이 천재가 되고 싶지 않네요. 우리는 모든 걸 쉽게 얻고 싶어하는, 즉 적은 노력으로 큰 걸 이루기를 원하는 마음이 가득한데 이런 허영심이 천재예찬을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천재예찬은 허영심이 가득한 우리에게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천재들에게도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초인적인 존재라고 믿기 시작하면 이것은 위험한 징후라고 합니다. 위대한 그들도 자신의 능력과 그 근원에 대해 통찰하고 어떤 순수한 인간적인 여러 특질이 섞여 있는지, 어떤 행운의 상황들이 동반해온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희도 좋은 결과는 나만의 것, 내 노력의 결과로 쉽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통찰을 거의 하지 않는데요. 고통 뿐만 아니라 훌륭한 성과, 좋은 일에 대해서도 다각적으로 직시하는 것이 필요할 듯 합니다.

  제3장 139절 성자의 무조건적인 복종에 관해서도 많은 얘기를 했는데요. 이 복종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무조건적인 복종이 조건 있는 복종보다 훨씬 더 편할 수 있다고 말하며, 성자가 개인적인 것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을 보고 그 현상을 도덕성의 최고의 영웅이라고 감탄한다면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조건적인 복종이 무조건적인 복종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복종을 통해 드물게 자신의 주인이 될 수도 있으나 이것은 군인처럼 개인적인 것을 완전히 포기해버리는 방식으로 갈 수 있는 위험을 말합니다. 실제 욕망을 완전히 단념해버리는 것보다 욕망을 절제하고 절도있게 지키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이 밖에도 예술과 관련된 아름다움에 대한 상, 작동하는 기계로서의 책(제4장 208절 책은 거의 인간이 되었다,)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습니다.

2.「방황」 : 지식인 문제

  2015년도에 루쉰을 읽었고 무려 글쓰기도 같이 했는데 루쉰에 대한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Q의 정신승리법, 내 자신은 들여다보지 않고 타인의 일을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삼는 구경꾼들, 불쌍한 샹린댁 정도만 아스라이 떠올랐고, 명쾌한 해결책 없이 답답하고 힘든 상황만 보여주는 루쉰에게 호감이 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세월이 흘렀고 저도 변했고 니체와 함께 「외침」과 「방황」을 다시 읽어보니 자기와 시공간적인 조건 등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신중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루쉰이 제게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이번에는 「방황」에서 지식인의 문제를 다룬 3가지 소설 <술집에서>, <고독자>, <죽음을 슬퍼하며>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일단 이 지식인들은 아Q의 정신승리법에서는 한 발 나아간 것은 아닌가라는 얘기가 있었죠. 혁명 이후 권력자가 바뀐 것 말고는 그대로인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굉장히 허무감을 느꼈을 것 같아요. 웨이푸, 롄수, 쥐안성은 아Q처럼 자기가 처한 시공간에 대해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자들은 아닙니다. 일단 내가 살고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면을 감안할 때 소설속 주인공들은 아Q에서 좀 더 나아갔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그 암담한 상황(마치 쇠철방같은)에서 보이는 행태는 아Q에 비해 얼마나 나갔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네요.

  먼저 <술집에서>의 웨이푸는 ‘그게 그거’, ‘적당히 얼버무리면 되는 거야’ 등 이 시기의 허무주의자, 반동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서양의 지식을 배웠으나 그 지식을 삶에 적용할 생각도 없습니다. ABCD든 공자든 아무거나 가르쳐도 상관없고, 뭘 가르쳐도 학생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교육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등 무력감에 찌든 지식인의 모습입니다. 웨이푸는 생계 때문에 선생질을 하고 있다는 변명과 함께 이 상황에서 자기가 어떤 길을 나갈 것인지 고민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말인가?- 그건 나도 몰라, 그 때 우리가 예상했던 일이 하나라도 된 것이 있었나? 난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어,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아니 당장 1분 뒤의 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있네” 미래를 알 수 없고 현실이 암담하다고 하여 막살아야 할까요? 루쉰도 생계형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주변에 웨이푸와 같은 자들을 많이 목격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도 가끔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가르칠 때 웨이푸와 같지 않았습니다. 루쉰은 동생 대신에 베이징대학에서 중국소설사 강의를 맡게 되었을 때, 적당히 아무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고증하고 정리하면서 습속에 물든 정신을 개조할 수 있도록 윤색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강의를 했고 그 결과물로 「중국소설사략」을 내놓았죠. 답이 안 보이고 암담한 상황에서 무력감에 빠져 대충, 적당히 살아갈 수 있을텐데 루쉰은 자신의 삶으로서 새 길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독자>에서 롄수도 쇠철방 같은 상황에 놓입니다. 그는 할머니 장례식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고독하지만 아이들을 보며 희망도 갖고 있었는데요. 그가 중상모략에 시달리고 해고로 가난에 시달리자 아이들, 어른들 모두 그를 함부로 대하고 멀리했습니다. 그는 고립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가겠다고 말하고, 내가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기어코 살아가야겠다고 얘기합니다. 이후 그는 사단장의 고문이 되어 흥청망청 쓰고 아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등 그가 증오했고 반대했던 모든 것을 실행합니다. 그는 죽어서도 어색한 군복을 입고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시체를 마치 냉소하는 듯한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이런 위악적인 복수를 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루쉰이 쉬광핑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 ‘갈림길’이 떠오르는데요. 그는 갈림길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나무 위에 올라가 호랑이가 굶주려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내려오거나, 호랑이가 끝내 떠나지 않으면 나무 위에서 굶어죽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만약 나무가 없으면 호랑이에게 먹히겠지만 그때도 괜찮다면 호랑이를 물어뜯겠다고 했는데, 롄수의 경우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상황에서 호랑이를 물어뜯는 느낌이 들었네요.

  마지막으로 <죽음을 슬퍼하며>의 쥐안성인데요. 그는 자유연애라는 이상을 열었지만 결국 생활에서는 소홀한 지식인의 이중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강물이 흐르듯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밥먹는 일을 경시했는데 쯔쥔과 결혼생활을 반년정도 지속한 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오직 사랑-맹목적인 사랑-만을 위해 인생의 다른 의의를 모두 소홀히 해왔으며, 그 중 첫 번째가 생활이라는 것을. 이후 쥐안성의 행동, 쯔쥔에게 진실(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을 고백하며 이별을 고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의견이 많았네요. 자신의 책임감 등 짐을 쯔쥔에게 넘기면서 자기는 가벼워지는 모습 등. 사랑이 전부인 쯔쥔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말을 던지는데 쥐안성은 새로운 길은 그녀와 함께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 이 부분이 지식인의 이중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루쉰이 고민했던 ‘아Q와 함께 어떻게 갈 것인가?’가 떠오르는데, 그의 새로운 길은 왜 그녀와의 이별을 통해서만 가능했을까요? 쯔쥔이 자기가 생각했던 쯔쥔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와 함께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리고 이와 함께 이 시기에 낭만적으로 등장한 ‘자유연애’에 대해서도 얘기헀는데, 루쉰이 강의할 때 입센의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 노라를 언급하며 지갑을 챙기지 않고 나간 노라의 미래를 말한 바와 같이, 이 자유연애도 생활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쯔쥔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유연애에 삶을 걸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이별통보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쯔쥔이 자유연애를 동경했지만, 삶은 과거 습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과 쥐안성과 쯔쥔이 서로 힘을 고양시키는 관계로 가져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제도가 들어와도 역시 중요한 것은 생활과 습속임을 이 소설에서 다시 깨달았네요. 더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지만 후기는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전체 3

  • 2021-08-16 14:37
    오랜만에 쌤들의 생체에너지를 흡입하면서 얘기나눌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고독자의 렌수에 대한 쌤의 해석이 눈에 띄네요.위악적인 복수를 어떻게 봐야하나? 하다하다 그도 마땅찮을 때 호랑이를 물어버리겠다 ᆢ저도 렌수에게서는 뤼웨이푸의 무기력함이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어떤 결기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충실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21-08-17 09:36
    인간적인의 글들도 그렇고 루쉰의 소설도 그렇고,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도 없이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붙이고 공감하고 질문하며 읽어갈 수 있는 텍스트인 것 같아요.
    그리고 지난 주는 그렇게 연결하고 접속하는 알찬 세마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책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 딱 이것이 아닐까요?
    그 정경을 이렇게 짱짱하게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영샘 최고에요!

  • 2021-08-17 17:18
    주영샘 후기덕에 루쉰의 소설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됐어요~~ 주영샘 최고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