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4주차(8.21)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8-17 11:56
조회
102
 

 

“아마도 저술가는 책을 거의 완전히 잊고 있을 것이며, 그 책에 씌어진 견해를 초월해 있을 것이고, 아마 그 책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 책을 생각하던 그때 그가 달고 날았던 날개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 반면 책은 자신의 독자를 찾아 나서고 삶에 불을 붙이며, 기쁘게 하고, 놀라게 하여, 새 작품을 만들어내고, 계획과 행동을 가진 영혼이 된다.”(인간적인, 208절)

 

세미나 시간에도 잠깐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어떤 책들은 마치 저자와 시대에서 떨어져나와 자신이 읽힐 자리를 찾아다니며 자가증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백몇십 년 전에 스위스의 어느 시골길에서 갈겨 쓰인 독일어 메모나, 중국 어느 회관에서 쓰인 백화문 글자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21세기 서울의 어느 공간에 모인 사람들에게 읽히고 감동시키고 질문을 일으키고 말문을 트이게 할 수 있을까요. 책들은 작가의 펜과 종이 사이에서 태어나지만, 시대와 언어를 건너가며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 사람들이 다른 무언가를 쓰도록 합니다. 이렇게 보면 마치 책이 뿌리식물 같은 생명이고 그걸 읽는 인간들은 토양이나 물 같은 토대 같기도 합니다. 다양하게 이어지고 닿고 흡수하고 자라나고 영향을 주는 과정으로서의 책. 읽고 쓰고 세미나를 하며 나누다 보면, 책은 리좀과 같다는 표현이 조금 와닿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저희가 읽은 니체와 루쉰의 텍스트는 더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영샘의 풍성한 후기에 잘 정리되어 있듯 저희는 이번 시간에도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인간적인>과 관련해서는 종교와 예술은 인간이 고통스런 사건들과 관계 맺는 기술이라는 점, 천채를 예찬하는 태도에서의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 금욕주의적 방식과 매번의 주의기울임의 방식을 이야기 나눴고, <방황>과 관련해서는 세 작품에서 지식인들이 걸어갔던 몇 가지 길들과 루쉰이 간 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 일어났고 그런 생각들이 말을 하고 듣는 동안 오가며 덧붙고 떨어져 나가며 왁자지껄해져갔습니다. 여기선 그 가지들을 몇 가지 끄적여보겠습니다.

우선 163절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이 뭔가 다르게 생각되었는데요. 이전에는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저의 허영심이 결여한 끈기 같은 것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단편소설 백 개 쓰기 및 그렇게 20, 30년 보내기 등 니체가 제시하는 강경책 앞에서 깨갱하며, 난 그 정도로 해보진 않았고 해보고 싶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매일 매일 똑같은 것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한 단계처럼요.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는 왠지 그런 매일매일의 습작, 수집, 발췌, 듣기, 작업 등의 활동이 배움이나 즐거운 느낌과 연관된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미 아는 것과 익숙한 것을 되풀이하는 자기 복제가 아닙니다. 지금의 자기의 습관과는 다른, 익숙한 생각과 손동작과 마음의 습관을 흔들고 자극하는 사건을 자신에게 가하는 일입니다. 초점은 그때마다 일어나는 변화들에 있지요. 그것은 반복이지만 판에 박힌, 즉 내게 전혀 신선함을 주지 못하는 반복이 아니라 매번의 낯섦과 다름을 포함한 반복이었습니다. 인내보다는 향유에 초점이 있는 반복. 그렇게 해서 매일매일 조금씩 자기 자신을 다른 곳에 데려다 놓는 반복. 저는 왠지 이런 반복이라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쩐지 이런 항상성이 푸코가 말한 영성과도 닮았다는 생각도 해봤구요.

저희는 이 절의 마지막 문장과 관련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예술적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성과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는 운명과 필요가 그 자리를 물려받아 미래의 거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그의 손으로 하는 작업의 모든 조건을 거쳐 단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제게는 이 문장이 의미심장하면서도 희망으로 읽혔습니다. 특히 ‘운명과 필요가 인도해간다’는 말이 훅 들어왔습니다. 우선 니체와 루쉰이 생각났습니다. 니체라는 인간에게 그토록 병과 회복을 오가며 사유의 실험을 계속하게 밀어붙인 것은 다름 아닌 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계획을 세우지 않았지요. 루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일매일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급박한 정세가 그를 거장(이 표현을 싫어하겠지만)으로 만든 것이죠. 어쩌면 저희도 어느 정도 그런 유형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에세이에 적혀있듯 저희는 어찌어찌 이곳에 왔습니다. 물론 큰 계획 속에서 오신 분도 없지 않겠지만요. 그러나 오셔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가하는 약속과 의무 그리고 그 안에서의 욕심과 의욕이 겹쳐서 어쨌든 매일 뭔가를 읽고 뭔가를 적고, 매주 혜화까지 발걸음을 하거나 줌을 켜고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거장이 될 순 없더라도 계획 밖의 ‘운명과 필요’가 이런 반복(매번 낯선, 그리고 힘든? 보람찬?)을 계속하게 하는 거죠.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런 압력을 소화할 수 있는 근기가 있는 거라고, 혹은 원하는 거라고 알고 있으면 왠지 기운이 나죠.

<방황>의 소설들은 읽기만 해도 쓸쓸해지고 춥고 갑갑한 기분에 훅 접속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여기의 지식인들은 아Q와 달리 ‘실패자’의 감각이 만연합니다. 적어도 자신들의 정신승리가 정신승리라는 것은 알기에 거기에는 그들은 타협과 순응을 하더라도 자기 혐오와 병에 시달립니다. 저는 대체 무엇이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인지 계속 고민하게 됩니다. 삶을 도모한다는 것은 어느 수준에서까지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어서 ‘공자 가라사대’를 가르치는 것이나 사단장의 고문이 되는 일은 왜 그들을 자기 혐오 속에 빠지게 하는 걸까요? 이전에 반대하며 싸웠던 그 일을 스스로 하게 되는 것은 왜 “살아야 한다”에 포함될 수 없을까요? 여기서 가장 큰 문젯거리는 ‘생계’입니다. <죽음을 슬퍼하며>는 왠지 모르겠지만 제게 말할 수 없는 먹먹함을 줍니다. 물론 제기되는 질문은 너무나 많지만서도요. 대체 살아야 한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그 질문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쯔쥔과 계속 같이 갈 수 없었을까, 왜 둘이서는 계속 전사로 남을 수 없었을까,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될 수는 없었을까, ‘생활’을 보는 둘의 관점은 합쳐질 수 없었을까 등등. 아직 그 시대를 실감하는 것이 잘 되지 않아서인지 질문의 방식이 편협하긴 하지만 루쉰이 들이 마쉬고 있었을 그 막막함이 확실히 전해지고는 있는 것 같습니다. 과제는 오직 그의 질문들을 여기 이 토양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겠죠. 아무렇게나 살아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에게, 루쉰이 고민했던 ‘살아야 한다’는 그 길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끄적여보며 공지하고 마치겠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 5장, 6장(~319쪽) 읽고 함께 나눌 구절 3개와 질문 및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방황>의 ‘축복’, ‘행복한 가정’, ‘이혼’을 읽고 근대 가족과 관련하여(루쉰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 질문 및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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