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5주차(8.28)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8-25 19:47
조회
98
에세이 이후로 무척 오랜만에 뵙는 샘들과 함께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3학기 들어서 저는 매번 다른 구성으로 섞여가며 토론을 하고 있는데요. 이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변동이 적겠죠?

<인간적인1>은 읽을수록 보물 같은 책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부정되지 않아서이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서문에서 말했던 회복기 환자의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에 걸맞게, 니체에게는 그 무엇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이거나 좋은 것이지 않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해왔던 그것이 우리의 약이자 변화의 계기이며, 반대로 우릴 키워오고 기쁘게 했던 그것이 병이자 감옥이 될 수 있죠. “그 무엇이 어떻게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에서부터 생길 수 있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니체는 역사적으로 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럴 때는 “어떤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 사실”(1절)이 명백해지기 때문이지요. 대립도 모순도 없는 니체의 양면성은 이런 구절들에서 빛이 납니다.

“오류는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인간을 깊고 섬세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29절)

“도덕적 현상들 및 그 현상들이 최고로 번창하고 인식의 진리와 공정성에 대한 감각을 생산하기 위해서 쾌감, 이기주의, 허영심이 필연적인 것이라면, 오류와 상상력의 과오는 인류가 점차 이 정도의 자기조명과 자기구원에까지 향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그 누가 그러한 수단을 과소평가할 수 있겠는가?”(107절)

“사람은 예술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예술에서 배운 능력까지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 그것은 마치 종교는 포기했으나 종교를 통해 얻는 마음의 상승과 고양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같다.”(222절)

“일종의 퇴화, 불고,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른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224절)

“네가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착각, 정렬, 너의 사랑과 희망이 너의 목표 속에서 남김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네 손에 달려 있다.”(292절)

5장을 토론하면서 저희는 ‘김나지움의 교육’이나 ‘인식에서의 쾌감’, ‘삶을 가볍게 하는 이상화’ 등의 주제가 칭찬도 비하도 아닌 방식으로 적혀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가령 ‘이상화를 통해 너무 정확하게 보지 않는다’는 279절의 내용은은 이게 지금 비판하는 건지, 아니면 좋다고 이야기하는 건지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어떤 예시를 염두에 두고 읽느냐에 따라 다른 뉘앙스로 읽혔는데요. 어쩌면 니체는 바로 그런 다양한 해석을 염두에 두고 썼는지도 모릅니다. 이건 마치 병과 건강, 진보와 퇴화처럼 우리의 좋다 나쁘다로 갈리지 않는 ‘오류 없는 사고’를 글쓰기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루쉰의 <방황>에서는 <축복>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핵심 질문은, 인간은 언제 완전히 무너져버리는가 였습니다. 두 번의 뜻하지 않은 결혼에서 두 명의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도 잃은 샹린댁은 무엇을 붙들었고, 그것은 어떻게 끊어지게 되었을까. 그에 앞서 제기된 질문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살 수 있었는가였습니다. 그녀는 끔찍한 폭력과 상실 속에서도 살아서 일을 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짓고 그것을 들려주며 사람들과 함께 울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라도 삶을 의미화할 수 있을 때 인간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걸까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샹린댁 앞에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소, 중상, 심지어는 비난까지 나타났습니다. 결국 너가 원했던 거 아냐? 너는 불결해, 건들지 마! 이런 말들은 샹린댁에게 옴싹달싹 할 수 없는 감옥처럼 들려왔을 것입니다. 누구 하나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손발을 아무리 움직여도 씻을 수 없는 이상한 죄. 이것은 어떤 의미화도 불가능한 적막일 것입니다.

강의에서 채운샘은 루쉰의 소설을 적극적으로 읽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사실 저도 루쉰의 소설에서는 아무래도 거리감 같은 것을 넘어가지 못했는데요. 백 년도 더 이전의 시대이고 훨씬 더 봉건적인 환경이 지금 저희 시대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아Q정전>이 읽기 어려운 것은 아Q가 나쁜 놈이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소설에서 아프게 자각해야 하는 것은 아Q 아닌 자가 없다는 사실이죠. 거대한 습속의 힘, 여기서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섬뜩한 것이죠. 웨이장 사람들의 냉소와 눈빛은 지금 우리가 동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렇게 다른가요? <축복>이나 <이혼>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끔찍한 불행을 잠깐 슬퍼하다가도 이내 가십거리 삼아버리는 마을 사람들, 가족들과는 크게 다를까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다가 금세 거기서 빠져나오고 마는 화자와 얼마나 다를까요.

요즘 저는 저의 빈약한 감수성에 문제를 느끼고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이런 말씀들이 뭔가 아프게 들렸습니다. 루쉰은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심약함을 문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샹린댁에게 ‘그래도 살아야지, 죽긴 왜 죽어’라고 하는 계몽주의적 진단이나 아이구에게 ‘뭘 더 어쩌라는 거야’라고 하는 실리적인 접근에는 습속에 찌든 방관자의 폭력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채운샘은 개인의 윤리와 사회의 윤리를 혼동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이겨내고 살아갈 길을 마련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윤리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 따름이지요. 그것은 오직 나 자신에게만, 혹은 친구에게만 할 수 있는 요구입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그럴 수는 없지요. 거기서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말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어떤 구조적 조건들에서 일어났는가. 이 자리 이 땅에서 가진 것 없는 한 명의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그려내야 합니다. 루쉰이 한 일이 그것이지요. 샹린댁의 출구 하나 없이 꽉 막힌 처지에 공감하지 않고는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루쉰이 적막했던 것은 그가 지식인으로서 못 먹고 살거나 길이 풀리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아 가지만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철방 속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쉰이 우리를 포함한 수많은 지식인들과 다르다면 바로 이런 감각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아등바등 우리의 안락을 보존하려 애쓸 때 어딘가 누군가의 불행이 가중되고 있음을 살피고 옆을 둘러볼 수 있다면 우린 지금처럼 계속 자기만 보며 태평할 수 있을까요? 옆에는 샹린댁이 있고 아이구가 있고 아Q가 있습니다. 너무 오랬동안 우린 구경꾼으로 머물렀던 건 아닐까요?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강의였습니다.

공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 7장, 8장, 9장(~454쪽)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1~4장(~226쪽)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에세이 수정 틈틈이 이어가시구요!
전체 1

  • 2021-08-26 18:43
    저는 루쉰의 단편을 매우 계몽주의적으로 읽고, ‘샹린댁이 왜 아사를 선택했지?’라는 개인적 윤리의 문제에만 골몰했구나... 완전 잘못 읽었구나... 앞 통수를 빡! 맞은 기분. 지금까지 배운 거 다 내동댕이치고 다른 관점으로 숙고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ㅠ 니체는 인간의 충동, 인식, 윤리 모두 사회, 역사적 시공간의 조건으로 구성된다고 했고, 루쉰은 거대한 역사라는 습속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했죠. 니체와 루쉰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니체는 자신의 관점을 끝없이 회의하고 루쉰은 자신의 시대에 자신을 절대 내어주지 않고, 어떤 이념에도 머물지 않고 회의를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요.
    그렇다면 현 아프가니스탄의 상황, 코로나19 라는 전 세계적 범유행 상황에서 우리가 루쉰의 소설 속 구경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일까? 어떤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연대가 필요한지 앞으로 니체와 루쉰과 함께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