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차탁마 NY 3학기 5주차 후기 & 6주차(9.4) 공지

작성자
인영
작성일
2021-08-30 01:12
조회
177
“끊임없이 너 자신이 되어라—너 자신의 선생이자 너 자신의 조각가가 되어라! 너는 작가가 아니다”(니체,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11](책세상), 563~567쪽 297절)

예전에는 이런 니체의 구절을 읽으면 곰곰이 생각은 안 하고 ‘어려운 말도 없는데 참 멋지네’ 하며 감상에 그쳤죠. 지금은 니체의 모든 구절이 전혀 다른 무게로 읽힙니다. 실천적인 면에서 이런 구절이 더 어렵게 느껴져요.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끊임없이 되어 가는 나란 어떻게 만들어 나갈까? 자신의 선생이 되는 배움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가르칠까? 조각가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하는 예술 아닌가? 하지만 작가는 음…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니체는 왜 콕 집어 너는 작가가 아니라고 했을까… 위 구절을 함께 음미하면서 이번 주 세미나와 강의를 복기해 봅니다.

1.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는 끊임없이 진행 중

모든 조원이 각자 자신의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를 수정하고 있는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의식이라는 돌덩이를 두고 매주 조금씩 쳐내고 다듬어 나가면서 자신과 마주하는 작업으로 씨름 중이죠. 이 작업이 니체의 개념을 조금 알게 된, 그 한 줌도 안 되는 앎으로 감동하고 충만감을 느끼고 있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척(?) 하고 있는 나를 만나는 것이라면 저 자신한테 매우 슬플 거예요.  니체를 정답처럼 가져와 그럴 듯해 보이고 싶은 허영심, 자신이 권위 있다고 여기는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유아적 인정 욕구, 결국엔 잘난 체하고 싶고 우쭐한 기분에 도취한 저 자신을 글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저의 찌찔함에 부끄러워집니다. 그럴 때 쓰고 있는 에세이를 몽땅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쓰고 싶은 망상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 에세이는 이런 자신과 매번 마주하고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 외에는 다른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 자신을 문제를 넘어가는 것을 함께 기쁨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이 공부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배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채운 샘이 지난주에 루쉰의 ‘어떻게 쓸 것인가’ 라는 자료를 나눠 주셨는데, 세 번 곱씹어 보겠다는 의미의 ‘삼한집’에서 발췌한 이 글을 여러 번 숙독하라고 하셨죠. 루쉰은 ‘무엇을 쓸 것인가는 하나의 문제이며, 어떻게 쓸 것인가도 또 하나의 문제이다’라고 이 글을 시작합니다. ‘어떻게’ 라는 방식이 ‘무엇’을 새롭게 문제 삼게 만들기 때문에 이 ‘어떻게’ 라는 것이 흔한 글쓰기 방법론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글을 쓰든 ‘어떻게 쓰느냐’ 그 태도가 자신에게도 또 누군가에 전달될 때도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음 내용을 글 읽고 쓰기 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모든 타자와 관계에서도 마음에 새기며 살고 싶습니다.

- 첫째, 진의(眞意)가 있을 것!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를 쓰라. '한낱 모기에 물린 것에 지나지 않아도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은 절실한 것이고, 써야만 한다면 이런 작은 일을 쓸 수 있을 뿐이다'

- 둘째, 분식(粉飾)을 없앨 것! 꾸밈이나 인용을 덜어내자. 글은 남에게 있어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인 해석도 없이 쓸데없고 별 상관없는 인용문은 쓰지 말고 자신이 소화한 것을 쓰자. 글을 쓰면서 자신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다른 질문에 이르러야 한다.

- 셋째, 진실하게 쓸 것! 글에서 환멸감이 느껴지는 경우는 ‘거짓에서 진실은 발견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에서 거짓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장난 덜 치고, 잘난 체하지 말 것!

2. 근대인 구샤미의 허기와 현대인의 가짜 배고픔

이번 주부터 니체와 만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니체, 루쉰, 소세키가 근대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그들 모두 근대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그 시대를 회의하고 거리를 두었죠. 이번 소세키 작품에서는 우화라는 형식을 빌려 근대적인 것을 바라보는 그의 비판적인 시선, 근대적 왜소함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카페에서 깔깔 소리 내 웃으며 읽었다는 샘,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는 샘, 예전에 읽었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니 정말 재미있었다는 샘 등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은 전반적으로 재밌게 읽히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 재미 뒤에 서글픔이라는 정서에 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고양이 주인 구샤미의 과식과 소화제와 연관해서 말이죠. 과식은 다 먹지도 쓰지도 못할 것들을 꾸역꾸역 쌓아 두기만 하는 자본 축적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소화할 수 있고 필요한 것만 취한다면 소화제와 같은 것은 필요 없죠. 소화제 같은 것이 필요 없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당장 당기는 것 마구 먹고 남들이 좋다는 것은 다 갖고자 하는 심리가 무엇일까? 이 심리에는 허영심과 인정 욕구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근대인의 근원적 불안은 아닐까? 지식인의 내면화에 대한 문제, 근대인을 왜소화시키는 근대적 가치의 허위와 결핍을 문제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구샤미의 허기의 정체에 관해 얘기를 이어가 보면, 근대 교양인인 구샤미의 우월감과 동시에 열등감이라는 이중적 허위와 속물근성을 소세키가 비꼬고 있죠. 어떤 면에서 루쉰의 [죽음을 슬퍼하며]에서 두 주인공이 겪은 자기기만과 환상이 깨지고 느끼는 공허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속으로는 은근히 여자도 좋고 돈도 좋지만 다 가질 수 없는 패배감, 이미 가진 이들에 대한 원한 감정, 또 지식인의 표상으로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겉으로 티는 내지 못하는 구샤미의 자의식과 허영이 왜곡된 심리로 허기를 만든 것이지 않을까. 이 작품의 인물 군상들을 통해 당시 돈을 모든 척도로 모든 것을 가치화하는 배금주의, 일본에 유입된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의 문제도 함께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인의 자화상 같습니다. 현대인은 가짜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죠. 다른 말로는 탄수화물 중독이라고. 인체내 인슐린 저항성과 민감성에 대한 얘기도 하고요. 먹으면 먹을수록 더 허기가 지는 현상이죠.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소유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언제나 부족하게 느끼는 것과 같죠. 저는 이 허기를 외로움이라는 말로 쓰기도 해요. 저에게 왜 니체 공부를 하느냐 물으면 ‘외로워서’라는 답변이 가장 솔직한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뭘 하고 있든 외로워서 그것을 잊으려고 뭐라도 하는 것 아닐까 라고 퉁 치고 넘어갑니다. 마음에 문 같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의 문은 아무에게도 열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할 수 있지만, 이는 자기 방어적 배타성일 뿐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망상에 빠질 때가 있죠. 제가 니체를 읽으면서 느꼈던 저 자신의 모습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니체를 읽고 강의를 들으면 뭔가 안 것 같아 충만감을 느끼고 돌아서서는 니체를 공부하고 있다는 속물 교양인의 자의식, 지적 허영심으로 계속 허기와 공허감을 키워왔던 것은 아닐까. 우월감과 열등감에서 허우적대지 않는  항상심을 가지고 배움의 기쁨을 가질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해 봅니다.

3. 차이를 배우는 니체 세미나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

이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 강의에서 마음에 새기고 싶은 주제는 바로 ‘배움’ 입니다. 니체는 인식과 도덕의 문제를 감각과 역사성 안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봅니다. 자, 이렇게 ‘니체는 인식과 도덕을 이러이러하다고 했어’라고 정리하고 과제로 씁니다. 몇 주 전 과제로 이렇게 정리해 놓고 시간이 지난 뒤, 채운 샘이 말로 해보라고 하니까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겁니다. 아… 과제를 문자로 정리했을 뿐 제 생각과 말로 소화가 안 된 겁니다. 니체를 왜 공부하는가? 내가 뭘 배우고 있는 거지? 글을 읽고 이해하고 소화한다는 것에는 기억에 새기는 것도 중요하고 니체가 말하는 인식의 개념을 나의 관점 변화로 흡수하는 것도 중요한데요. 그래서 이를 어떻게 하면 다르게 실험해 볼 수 있을까 성급해졌습니다. 그 생각에 과몰입한 나머지 현 아프가니스탄 상황과 코로나19 범유행 상황을 두고 과제를 채웠죠. 루쉰, 니체도 좀 욱여넣었고요. 우리 조원들이 너그럽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죠! 왜 주제에 안 맞게 써왔냐, 오늘 토론에 이게 뭔 도움이냐는 말을 하셔도 무방한 글이었는데, 아무도 하시지 않았어요. 중간에 줌 수업 접속 문제로 컴퓨터를 만지느라 제 과제 얘기는 서두에서 끊겼고 맘속으로 ‘다행이다’ 숨을 돌릴 수 있었어요. 쓰면서도 과욕이다, 허영이다, 썼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써보고 싶다, 에라 모르겠다… 여러 망상에 시달렸었죠. 과제는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토론에 맞게 함께 쓰는 것이라는 점을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강의 중에 채운 샘이 해 주신 공자의 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을 만난다’는 말이 새삼 크게 다가왔습니다.  위대한 스승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발견하고 모든 이로부터 선과 배움을 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위대함이라는 말씀! 그렇다면 저 자신도 누군가에게 배움의 몫이 된다는 말인데... 사실 저는 지난 2년간 니체 세미나에서 꿀 먹은 벙어리였는데, 얼마 전 한 샘이 저에게 ‘똑똑해졌다’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말문이 좀 트였다는 말인데, 이제는 헛소리를 너무 많이 해서 문제에요. 토론하면서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미나의 흐름도 읽고 저 자신의 문제도 많이 발견하는 중이죠. 아직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해 딱 맞는 표현이 안 떠오르는데, 상대의 의견을 받아서 먹어버리는 유형이 저라는 것! 주제가 공이라면 받아서 또 다른 샘에게 질문으로 던져야 하는데 제 견해를 정답으로 만든다고 할까요. 차이를 궁금해야 한다는 것. 질문을 공놀이처럼 주고받는 기술이 필요한 것 같아요. 토론은 답을 내리는 것도 찾는 것도 아니라 이 주제를 어떻게 다르게 보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게 중요하죠. 서로의 차이를 통해 자신의 견해에서 떠나 자유로워지고,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강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견해만 옳다고 느끼고 있구나, 그래서 세미나가 끝나고 나면 ‘또 오만했구나’ 하는 느낌, 아쉬움에 쭈뼛거립니다. 아는데 실천이 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그게 오만함이고, 아직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함이기도 합니다. 또 아쉽다는 것은 니체를 가지고 이렇게 샘들과 뭐라도 말할 수 있는 공부의 기회, 그로 저 자신을 발견할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죠. 자신의 허영심과 자의식, 인정 욕구의 허위를 내려놓고 타자와의 차이를 자신의 배움으로 이어 나가기 위해 부단히 읽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저 자신에게 가르쳐야 할 세미나에서 덕목이지 않을까.

최근 제가 어떤 관계 문제로 머릿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를 썼는데요. 불편한 누군가와 일전을 벌이는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팔짱을 끼고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깝죽대지 마라’ 음…‘죽’은 좀 입 모양이 귀여워 안돼! ‘깝치지 마라!’ 음… ‘치’ 발음은 좀 세 보이니까 이게 좋겠어! 라고요. 좀 우습지만 우선 작가는 못되는 것으로 얼른 수습하겠습니다. 니체는 모든 관계 맺기는 해석이고 선한 행위는 승화된 나쁜 행위다, 본질적인 악함과 선함은 없다, 이런 관계에서 힘의 비율, 마주침이라는 만남의 방식을 문제 삼아야 하며, 결국 하나의 관념은 그 대상의 본질과 관련이 없다고, 지성의 힘은 선과 악으로 나타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도덕을 인식하는 감각 자체를 회의하게 합니다. 힘 배치의 문제, 삶의 조건에서 그것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채운 샘은 관계를 맺는 방식 방식 구도가 하나의 관념을 재생산시키는 방식으로 세팅되어 있음을 문제 삼고 변화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하나의 관념, 척도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고, 동시에 제가 선하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자신이 형성한 관념을 대상과 동일시하지 않게 되는 것이 실천이 갖는 함축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니 니체의 한 구절이라도 이 배움을 통해 삶을 글과 관념으로 채우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집니다.

그래서 채운 샘이 아침마다 마음에 새기고 하루를 시작해보라는 티베트 기도문 중 이 한 구절이 유난히 더 마음에 와닿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이 나를 시기하여 부당하게 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해도 좌절은 내 몫으로 받아들이고 승리는 그들에게 바치소서’

우리는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쉽게 심판자가 되죠. 자신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를 뒤에서 욕하든 그것을 마음 속에서 끙끙 앓든 자책으로 돌리든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죠. 상대가 분노를 통해 복덕을 잃음을 자신의 업으로 받고 상대가 번뇌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자비심인 복덕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마음. 이 보살심을 마음에 새겨 기도하고 암송하는 것으로 오늘의 배움을 이어가고 싶네요! 니체는 우리는 각자 타고난 능력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연마하느냐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연마는 배움, 예술가, 종교성과 맞물립니다. 여기서 자신의 선생, 조각가가 된다는 의미가 풀립니다. 니체는 아름다운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만을 위해 쓰는 것, 자신을 전달하려는 방편으로의 글쓰기에 대한 부끄러움을 얘기합니다. 저는 작가가 아닙니다. 제 유치한 머릿속 드라마는 이제 막을 내립니다.  '모두에게 모든 것을, 나에게는 아무것도!' 우리 모두 승리를 자신이 아닌 그들에게 바치며 하루를 시작해 봅시다!

<과제 공지>

1. 나쓰메 소세키 작품 읽는 순서 : 고양이-> 마음-> 명암

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서문~124쪽까지 읽고 토론할 주제와 간단한 해석 붙이기

3.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5, 6, 7, 8장까지 읽고 토론할 주제와 간단한 간단한 해석 붙이기

4. 올해 읽은 문학 작품 중 4학기 에세이로 쓸 작품과 선정 이유 준비해 오기

5.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 수정하기

6. 간식은 현주샘, 지안샘
전체 3

  • 2021-08-31 13:51
    후기를 읽은 감상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니체는 인간적인 2권 서문을 시작하며 "침묵해서는 안 될 경우에만 말해야 한다"고 해요. "침묵해서는 안 될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 인영샘의 글을 읽고 저와 마주쳤습니다. 인영샘이 니체를 만나며 마주쳤던 지점들과 제가 인영샘의 글을 읽고 마주치는 지점들, 그 지점들이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알려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감상을 씁니다. 겪음에 거리를 두는 한 걸음이 왜 이렇게 안 떼질까요? 마구 써내놓고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제 핏덩이 글은 고사 직전인데 말이죠.

  • 2021-08-31 18:49
    난희샘, 온종일 이른 가을비가 내려서일까요... 답글을 안 달 수가 없네요^^ 공감, 동감과 공명은 다른 것 같아요. 공명한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타자가 내재해 있음과 타자 안에 자신이 내재해 있음을 깨달았을 때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서로가 분리될 수 없고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요. 이토록 다른 서로가 글로 공명할 수 있다면 매우 기쁜 일이에요. 자신의 눈이 오진 자신 안으로만 향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발걸음을 뗄 수 있는 것도 자신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지 않을까요? “관찰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비밀에 찬 적대 관계, 즉 서로 마주 보는 적대 관계이다”(인간적인 2 서문, 11쪽)
    샘의 에세이 초고를 기억하고 있어요. 여기에 쓸 수 있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좌절은 저에게 주시고 샘에게 보내는 승리를 받아주세요! 우리 각자의 문제를 넘어가는 만큼 서로 기쁨이 되길!!

  • 2021-09-04 09:43
    진짜 점점 똑똑해지시는 인영샘... 같이 똑똑해져요 ㅎㅎ 은혜로운 공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