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2학기 8주차 후기

작성자
이진아
작성일
2021-06-28 17:50
조회
89

이번 8주차 강의시간에는 채운 선생님의 안내를 따라 알튀세르가 <정치철학강의>에서 다룬 마키아벨리를, "운과 비르투"에 초점을 맞춰 만나 보았다. 또한 채운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스피노자의 <정치론>의 군주국가, 귀족국가, 그리고 완결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구상한 민주국가와 더불어, 더 나아가 동양정치 철학과도 함께 연결해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아래는 채운 선생님의 강의 요약 및 발췌)


 * 운의 세가지 모습:

1. 운의 첫번째 모습: 마키아벨리가 강의 범람에 비유한 운의 예견 불가능성이다. 즉, 때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미리 계산할 수 없기에, 운은 비합리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질료다. 정치적 삶 역시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내포한다.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존재 조건 하에서, 인간이 미리 계획하고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은?

‘운에 직면한 비르투’. 범람(=운의 공격) 자체는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 따라서 범람에 맞서서 바람이 잠시 잠잠해졌을 때를 틈타 둑을 높이는 것, 즉 나름의 질서를 창설하고 질서를 유지, 안정을 구성하는 것이 비르투이며 인간적-정치적 필연성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역량으로 발휘될 수 있는가? 철저하게 조건적이고 역사적인 사유, 관점으로 비르투를 논할 수 밖에 없었기에 마키아벨리는 역사적 사례들을 인용했다. 역사적으로 어느 순간에 그런 비르투를 발휘한 인간이 나타난 것은 필연이 아닌 우연이다. 그들의 성공은 우연의 산물이다. 역설적으로, 비르투의 의지주의 자체가 운의 비합리적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다.

비르투 자체가 운에 맞서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다 상황종속적인 것이다. 알튀세르가 강조한 것은 사건 우발성의 개념이다. 역사적 사건이 인간이 의도, 기획한 대로 맞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혁명과 역사적 중요 사건의 시발점에서는 우발성이 드러난다. 우발적 마주침을 계기로 관계가 어떻게 전환되느냐가 우리를 혁명으로 이끌기도 하고 반대로 이끌기도 한다. 알튀세르의 역사관은 우발적 마주침이 의한 유물론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2. 운의 두번째 모습: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운 자신이다. 알튀세르에게 흥미로운 지점으로, 운 자체가 인간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 속에서 운 자체가 하나의 경향성을 갖게 된다.

운은 자신이 필요하면 비르투를 촉발시킨다. 역사가 운이라고 하는 흐름 안에 이미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역사를 자연의 흐름과 대별적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의도대로 조직되어 흘러가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동양철학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하늘과 땅이 전혀 통하지 않고 막혀있을 때, 하늘은 역사의 인물을 보내기도 한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우주의 섭리가 인간의 역사를 바닥에만 놔두지 않는다. 바닥을 치면 다시 거기에서 딛고 일어설 실마리가 등장하는 것이 이치다. 자연법칙과 역사 법칙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하나는 인간의 의도에 따라 굴러가고 하나는 인간의 의도와 무관한 자연현상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가?

동양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우주의 섭리를 깨달은 자, 군자만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 우주의 섭리와 무관하게 인간이 도덕적으로 올바름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우리가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정치의 신념이며 거기에 자연의 법칙 따위는 없다. 그런데 동양의 정치학에서 성인의 정치가 다른 정치와 다른 것은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것과 치국 치도가 하나로 간다고 보는 데에 있다. 역사와 자연은 다른 걸까. 스피노자 식으로 보면 인간이 신 안에 있는데, 그렇다면 이 우주의 법칙이 신의 섭리가 작동하지 않는 인간사라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 입각한 역사유물론이라면 자연 바깥에 있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자연 법칙의 안에 있는 것으로서의 역사, 그것이 진짜 역사유물론이 아닐까.

동양의 정치학은 때의 문제가 너무나 중요하다. 맹자도 주역도, 때를 읽느냐 못 읽느냐의 문제이다. 성인은 어떤 때는 기다리고, 어떤 때는 몸을 낮춰 은신해 심신을 닦으며, 어떤 때는 시도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 때가 다 다르다. 절대선은 그에게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늘 시도해야 한다는 건 근대적 영웅 관념이다. 동양 정치에서 말하는 대인, 군자는 처한 경우는 다를지라도 유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동양 철학과 다른 지점은 군자가 때를 읽을 수는 없지만 오직 유덕하게 존재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 놓치고 있는 문제다. 무엇이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의 관점이 아닌, 스피노자가 에티카 4부에서 논하는 관점에서, 어떻게 인간이 정말 유덕해질 것인가. 우리 자신이 더 강한 자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렇게 공동체가 맞이하는 운명도 마찬가지로 다 때가 있는데, 정치공동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때와 공동체 운명이 어떤 방식으로 맞아 떨어지든, 우리가 이 공동체 안에서 개체의 유덕함을 더 확장하는 방식으로 개체의 역량을 더 확장하는 방식으로 공통적인 것을 형성해나가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공동체의 중심이 흔들려도 기저가 흔들리지 않아야 계속 갈 수 있다. 중앙에 대해 민중들이 역량을 갖지 못한 공동체는 위기가 오면 위기가 올 때 금방 흔들친다.

때에 맞는다는 것이 시중이다. 신의 역량을 계속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확대하려 하는 삶을 살아가려 하는 자는 어떤 때가 와도 시중할 것이다. 군자는 늘 시중에 있다는 것으로 시중의 개념을 바꿨다. 어떤 때가 와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부침을 심하게 겪지 않는 것이다. 세상 외부의 조건에 따라 내 역량이 줄었다 늘었다 하면 그 역량은 내 것이 아니다. 운발이다.

3. 운의 세번째 모습: 어떤 시대에 대해, 전환할 수 있으면 긍정적 운,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으면 좋은 운, 변화하지 못하면 불운이다. 그러므로 외부에 무엇이 작동하는가가 아닌, 내가 그 외부에 대해 이 때에 맞출 수 있느냐 없느냐가 시중이다. 때에 맞춘다는 것이 시류에 휩쓸리는 것이 아닌,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여전히 역량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느냐이다.

운에 저항하고 거스르는 의미가 아닌, 상황을 이해하고 필연성에 적응하는 의미의 비르투이다. 이것은 군자의 때를 읽는 능력, 주역에도 나오는 수시변혁하는 능력과 잘 맞아 떨어진다.

공동체에서 하나의 인물에의 의존도가 커지면 역량이 작아진다. 공화국, 민주주의란 민중들의 힘이다(상이한 재능을 지닌 인간들의 저장고).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아래에 포진해있는 자들이 있는 민주주의가 위험이 가장 덜 하다. 마키아벨리의 공화국이라는 유토피아가 운과 비르투라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되었던 것 아닐까. 즉, 훨씬 더 많은 인간들이 더 많은 역량을 가지면 하나의 역량을 가진 한 인간에 의존하지 않고 상이한 역량을 가진 인간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이것이 민주주의다. 운과 비르투의 끊임없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유토피아로서 마키아벨리가 공화국을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독해이다.

* <정치철학강의>결론:

마키아벨리는 홉스와 루소가 이야기하는 인간본성론을 전개하지 않았지만 그 단초들이 이미 나오고 있다. (인간학은 17-18세기 정치학에서 인간본성에 대해 논의하며 전개됨).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고찰한 인간의 본성과 정서는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발생론적 고찰은 마키아벨리에게는 없다. 마키아벨리가 영원히 철학자가 아닌 사상가, 정치가로남겨지는 이유이다. 본격적 인간학정치학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마키아벨리의 인간학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즉 인간을 설명하려 하는 것에 대해 사회정치적, 구체적 역사적 실례로 그것들을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접근하는 한에서 멈췄다.

-마키아벨리의 독특함: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류의 고전정치학처럼 인간을 규정하고 그 보편적 규정으로부터 정치를 보려 하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 고전 이론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새롭게 무언가를 정초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은 것이 못한 점도 있으나 의도한 점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제가 국민국가의 구성과 절대군주정의 돌발이라는 문제였고 현실적으로 국가가 만들어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현실적 문제로부터 마키아벨리는 떠난 적이 없으며 고전적 보편론으로는 성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근대정치학, 즉, 사이언스라 말할 수는 없는 텍스트이다. 그러나 근대 정치학에서 논하는 모든 것들을 이미 제기했다. 기원이 없다 여겼던 정치조직의 실제 기원들을 환기시켰다. 즉, 민중과 귀족의 힘관계 등. 정치의 토대를 논했으나 너무 잊혀진 바가 있다.

알튀세르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봉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논했을 때, 마키아벨리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 그것들을 떠올린 것이 아닐까라고 독해했다. 이탈리아를 중심에 놓고 분석한 마키아벨리. 왜 스피노자가 무정부적 상태를 위험하다 했을까. 민주주의 옹호자 입장에서 무정부상태에 끌릴 수도 있는데 경계했다. 그 강박은 알튀세르 추측에 따르면 다양한 사례분석을 통해 마키아벨리가 보여준 국가 해체 가능성을 스피노자가 환기 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움직여가는 과정에서 권력 자체가 역동적이라 하는 지점, 그 역동성을 추동해가는 힘이 인간의 욕망, 정서로 본 이 지점에서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가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정치를 이념의 문제로 환원하는 단순성에 대비됨). 민중의 역량을 어떻게 볼까 민중의 역량은 정치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에서 두 사람이 공명하는 지점을 보게 된다.

@ 수업 후기 맺음말 한줄: 오는 수요일 수업 전까지 2학기 에세이 초고 완성을 해야하는 운- 뽀르투나의 강력한 범람 앞에서, 나는 어떤 유덕함을 실천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후기를 마치고 나니 이제 하루 반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스트레스, 분노, 좌절, 조급함 등의 정념에 휩싸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초고를 완성하기..?가 아닐까. 절차탁마 샘들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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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9 17:08
    문단을 따라가면서 수업 내용을 복기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수업 후기 맺음말을 보면서 갑자기 에세이에 대한 어마어마한 부담감이 느껴졌네요. ㅋㅋㅋ 아, 웃고 있지만 울고 있습니다.
    비르투가 자연의 필연성에 종속되어있다는 얘기는 두고두고 곱씹게 되네요. 개인에게 자연의 필연성은 생사의 문제일 테고, 정치적으로 가면 '다중'의 운동으로 볼 수 있을까요?
    마키아벨리는 '인간 본성'이나 '자유' 같은 키워드를 사유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스피노자와 공명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대부분 책을 끝까지 덮고 나서야 그것의 위대함이 조금 보인단 말이죠. 하하. '비르투', '포르투나' 같은 개념들은 이후 푸코와 니체를 만날 때도 접속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계속 상기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