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2학기 에세이 발표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7-05 13:21
조회
91
2학기 마지막 공지가 늦었네요. ㅠㅜ 마음은 급하고, 써지지는 않고... 죄송합니다. (_ _)

2학기 에세이 ‘내가 만난 스피노자’ 발표는 수요일 오전 11시에 시작합니다.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긴장되면서도 어떤 이야기를 가져오실지 기대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선생님들의 코멘트에 힘입어 끝까지 달려보겠습니다. 두근두근하네요!

이번 주에는 따로 후기 없이 간단하게 공지로 수업 내용을 갈음할게요.

 

다시 읽는 마키아벨리

오랫동안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정치론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정치‘론(論)’은 구체적 경험들을 추상화해야 하는데, 《군주론》에서도 느꼈다시피, 마키아벨리는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짤막한 교훈을 도출해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때 하나의 ‘-론’으로 성립하지 못한다고 보는 시선 자체가 이미 근대과학의 시선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맹자》, 《한비자》 같은 고대 중국의 텍스트들도 정치론으로 보기 어렵다고 평가됩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재명 후보의 비대면 대선 출마 선언을 보면서 여전히 정치의 패러다임은 사람의 힘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물론 사회의 질서는 자연의 질서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이 끊임없이 요청됩니다. 하지만 노력하는 만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회에는 자연과 달리 선악이 있지만, 그렇다고 자연의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움직이는 바탕은 선악이 없는 자연의 질서입니다.

새삼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정치론을 뒤집는 또 다른 정치론으로 근대 이전의 텍스트들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튀세르를 위시하여 마키아벨리 텍스트의 행간을 읽어내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채운쌤은 크게 마키아벨리의 정치를 읽어내는 세 가지 흐름으로 ‘자유주의’, ‘공화주의’, ‘신공화주의’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마키아벨리에게 사실은 저러한 정치적 고민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죠. 사실 처음에는 삐딱하게 ‘그 기원을 왜 마키아벨리에게서 찾아?’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요. 다시 생각해보니, 이러한 독해의 흐름은 그만큼 마키아벨리의 텍스트가 접속력이 높다는 것과 그렇게 읽어낼 수 있는 문제의식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키아벨리는 다시 읽기에 매우 충분하다는 사실이죠. 이렇게 다시 한 번 반성했습니다.

 

간섭 없는 지배지배 없는 간섭

운명과의 관계에서도 군주의 덕(virtu)을 증대할 것을 주장했던 《군주론》과 달리,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는 시민의 덕(virtu)에 좀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고대 로마정의 정치는 원로원과 민회, 정무관으로 작동합니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고대 로마정은 평민이 정치에 진출한 시대였고, 덕분에 정치가 발전될 수 있었습니다. 세 가지 기구는 하나의 권력이 강해지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견제했는데, 그는 정치가 건강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덕이 증대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통찰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스피노자에게도 이어집니다. 그는 전체 공동체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데 있어서 다중의 역량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죠. 스피노자의 탁월한 문제의식이 순전히 그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도 이전에 살았던 선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었군요.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을 따라가면, 근대 정치의 딜레마를 넘어갈 실마리가 보입니다. 근대 정치에서는 자유와 지배가 항상 대립됩니다. 자유를 강조하자니 각자도생의 자연상태로 향하게 되고, 지배를 강조하자니 각 개인이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줄어듭니다. 생각해보면,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고등학교 공동체 생활도 항상 이게 문제였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근거로 함께 무엇을 해보자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의 근거로 대체로 ‘나의 자유’가 거론됐습니다. 근대 정치의 딜레마를 꽤 일찍부터 경험했었군요. ㅋ

채운쌤께서는 ‘간섭 없는 지배’와 ‘지배 없는 간섭’으로 두 가지 통치 방식을 얘기하셨는데요. ‘간섭 없는 지배’는 노예를 지배하는 착한 주인으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아무리 노예를 잘 대해주더라도, 노예 입장에서는 언제든 간섭할 수 있는 주인의 변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 사이의 위계적 관계는 극복되기 어렵죠. 반면에 ‘지배 없는 간섭’은 제도나 법 등으로 인한 공공의 규제 같은 것을 말합니다. 제도나 법은 착한 주인의 선의 같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구성원들이 거기에 동의해야 하고, 이후에도 구성원들의 의견에 따라 언제든 수정될 수 있습니다. 사실 구성원들의 자유도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채운쌤께서 자유는 간섭 없음이 아니라 지배 없는 간섭이라고 얘기하셨죠. 스피노자가 아무리 ‘필연 속의 자유’를 얘기해도 제 식대로 소화가 잘 안 되는군요...!

잘 정리되지는 않지만, 자유에 대한 빈약한 상상력이 정치철학적 핵심 문제 중 하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서문에서도 썼듯이, 사람들은 자유를 바라듯 노예가 되고자 합니다.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한국이 그 어디보다 자유로운 국가이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느 국가보다 지배력이 강한 국가가 되기를 원합니다. 언젠가 있었던 북한 도발에 대한 재입대붐이 생각났는데요. 그때 많은 사람들이 군복 사진과 얼마든지 재입대하겠다는 글을 올리더군요. 남자로서의 허세가 다분히 섞이기도 했지만,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우호적인 댓글도 많더라고요. 다행히 이들의 용기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대단히 폭력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적대적인 감정이 형성된 걸까요? 아니면 어떤 나라든 함께 살아가는 국가에서 순식간에 박멸해야 할 국가로 전환될 수도 있는 걸까요? 공동체적으로 다른 공동체와 연합하여 더 큰 권리를 구성하는 역량이 떨어질 때, 이런 반응들이 나타나는 건가 싶었습니다.

 

새로운 역사유물론

그동안 역사유물론은 계급과 이념을 중심으로 기술됐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앞으로의 시대에서 계급과 이념만으로는 정치를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가령, 코로나는 우리가 의지해왔던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하나의 계기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이후 난민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난민은 단순히 치안과 일자리를 위협하는 불안 요소로서만이 아니라 질병을 가진 잠재적 보균자로서 취급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난민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질병을 퍼뜨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박멸해야 할까요? 그러기에는 코로나를 거치면서 타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습니다. 사회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타자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죠. 그런데 난민은 어디서 보호받을 수 있을까요? ‘자국민’, ‘시민’이라는 그동안의 정치 구도 속에서는 난민을 사유할 수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정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정서’를 강조합니다. 스피노자를 따라 정치를 묻는다면, 정치에서 놓지 말아야 할 질문은 ‘인간 집단의 정서를 추동하는 기반은 무엇인가?’가 돼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맹자의 여민동락(與民同樂)이나 인도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차크라바르틴) 같은 개념을 환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전륜성왕은 ‘수레바퀴(깨달음)를 돌리는 왕’을 뜻합니다. 즉, 무력이 아니라 깨달음(法)으로 통치하는 군주죠. 그리고 맹자의 여민동락은 자국민만이 아니라 천하의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는 통치 원리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기쁘게 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은 오도록 하는 것(近者悅 遠者來)이죠. 채운쌤은 이들의 정치에서 개체의 기쁨(樂)과 전체의 다스림(治)이 대립되지 않는다고 하셨죠.

강의를 듣고 공부할수록 그동안 공부했던 것들을 다시 점검하고 싶어집니다. 그동안 읽었던 텍스트들만으로도 지금 겪는 많은 문제들을 재조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지금 읽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맞겠지만요. ㅎㅎ;; 어쨌든 과거의 텍스트들을 현재적으로 읽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숙제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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