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3학기 1주차 후기

작성자
이정수
작성일
2021-08-01 15:28
조회
96
3학기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첫 시간에는 진리, 권력, 주체화를 중심으로 한 푸코 사상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푸코의 텍스트를 읽는 동안 우리가 견지했으면 좋을만한 것들에 대한 채운 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행위를 할 때, 자기 나름의 진리, 진실 또는 앎에 관한 기준을 전제로 해서 그 행위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 앎을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또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앎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진리라는 생각하는 것의 기준, 즉 참과 거짓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고 그것은 또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처음부터 영원불변의 진리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일까?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 방법론에 따라 이러한 물음들을 탐구함으로써 진리와 인식의 기원에 본질이나 순수함이 아니라 폭력, 투쟁, 힘/권력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지식의 고고학』, 『담론의 질서』)

푸코의 사유에서 모든 것은 관계적으로 결정된다. ‘주체’도 출발점이 아니라 그 주체가 놓인 계열과 위치에 따라 정해지는 결과이다. 푸코는 자율적 주체라는 근대적 생각을 전복시킨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자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주체의 ‘자율성’은 주체 바깥의 물질적, 상징적 조건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근대적 주체는 근대적 규율권력이 만들어 낸 예속적 주체이며, 그 주체화는 예속화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권력 메커니즘의 산물에 불과한 주체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가? 다른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가?

푸코에게 권력은 권력관계다. 권력이란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있어 탈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도처에서 작동하는 것이며 또한 권력이 있는 곳에는 늘 저항이 있다.(『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1』) 하지만 권력과 저항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억압’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푸코는 권력과 저항 개념 대신 ‘통치성’의 개념을 제시하며 우리의 행위, 품행이 어떻게 타인에 의해 인도 되는가를 탐구한다. 통치성이란 ‘인간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어떤 종류의 합리성’을 의미한다.

‘나는 욕망한다. 나는 원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욕망이 내 안에, 주체 안에 내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욕망하고 있는 우리의 욕망을 가로막는 외부의 억압적 권력을 도처에서 발견한다. 그래서 억압받는 그 행위를 하는 것이 마치 자유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사회가, 권력이 우리를 억압하는 것일까? 우리는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에 욕망이 억눌리고 있는가? 혹 우리 스스로 기꺼이 억압을 욕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사람들은 왜 마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처럼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라고 묻는다.

푸코는 ‘욕망하는 개인과 억압하는 사회’라는 대립적 구도와 문제설정을 깨뜨린다. 그는 ‘사목 권력’에 대한 비유를 통해, 양떼가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목자의 강제와 억압 때문이 아니라 양떼가 스스로 자기에게 좋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 역시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품행이 일정한 방식으로 인도되기를 원하며, 서로 인도하고 인도되기를 원하는 제한 속에서 자신의 행위 양식을 구성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행위가 일정한 방식으로 인도되는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지금처럼 인도되지 않을 수 있는 기예, 다른 통치의 기예를 발명할 수 있을까?

푸코에게 철학이란 ‘비판’이다. 비판으로서의 철학은 우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왔는지에 대한 조건을 분석하는 것이며, 그 다음 이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구성될 것인가 하는 주체화의 문제를 발명하는 것이다.(『비판이란 무엇인가』)

한국 사회는 1997년 이후 외환위기를 경험하면서 소위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급속하고 강고하게 뿌리내렸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기업가가 되어 자신의 삶을 마음껏 경영하라고 인도하며 기업가적 주체, 1인 CEO를 제안한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가운데 사람들은 자기계발이 경제적 성공과 더 많은 소유를 가져다주리라 기대하며 노력한다. 하지만 각자도생의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항시적 불안정 상태로 내몰리며 사회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었다. 경제적 성공을 위한 개인의 자발적, 능동적 노력은 정치적 무력화, 예속화로 귀결되고 있다.

우리는 특정한 통치성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는 각자에게 주어지는 몫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푸코는 우리의 삶을 미학의 대상으로 삼아보라고 말한다. 미학적 대상을 사물로 제한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 양식과 행위 양식을 어떤 기능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무엇으로 만들어 나가자는 제안이다. 푸코가 말하는 ‘실존의 미학’이란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으로 조형해 나가려는 노력, 보편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지적, 소수적 차원의 윤리를 발명하려는 노력이다.

푸코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체화와 다른 지평이 있는지 근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탐구한 결과 그 분기점에 기독교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근대인의 욕망의 계보학은 기독교를 기원으로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이전에는 인간을 욕망하는 주체로서 사유하지 않았으며 보편적 도덕이 문제되지 않았다. 그리스, 로마 철학에서는 보편적 도덕에 대한 사유가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윤리적 개념 중 하나는 ‘적절함’이었다고 한다. 현자, 자유인,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삶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향유할 줄 안다. 반면 보통 사람들은 뭔가를 적절한 방식으로 향유하기보다 그것에 얽매이고 집착한다.

『주체의 해석학』은 그리스, 로마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지만 푸코의 사유는 늘 현재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우리도 그 시대 사람들이 윤리적 실천을 둘러싸고 어떻게 문제를 구성하는 지, 그로부터 우리 자신의 문제화의 장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지 하는 관점에서 텍스트를 읽어 나가면 좋을 것 같다. 내가 경유하고 있는 다양한 배치들에 나의 행위를 제한 당하는 가운데, 내가 무엇인가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때 그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어떤 항목들과 계열화하면서 나로 되어갈 것인가? 자유로운 삶을 구체화하는 윤리적 실천에 왜 존재론, 인식론, 인간의 정서에 대한 이해가 요청되는가?
전체 1

  • 2021-08-03 10:09
    키야~ 정말 꼼꼼한 정리네요. 아무리 채운쌤께서 푸코의 문제의식 변천사와 텍스트를 연결해서 강의해주셨다고는 하지만, 그거를 이렇게 후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역시 월지 유금인가요? ㅋㅋㅋ 강의를 듣고 <주체의 해석학>을 읽어 보니 확실히 푸코의 문제의식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물론 느낌만 있고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따라가기가 쉽진 않지만요;; 전반적으로 윤리적 주체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스피노자가 계속해서 떠오릅니다. '윤리'라는 키워드로 둘을 엮어봐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어떻게 엮이는지 아직 잘 모르겠고... 흠흠... 어쨌든 푸코 역시 스피노자주의자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 찬양! 스피노자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