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3학기 3주차 공지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8-09 01:22
조회
109
공지부터 빠르게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에티카》 4부 정리22(162쪽)까지 읽어 오시고,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은 2강 전·후반부 읽어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도 줌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줌 링크는 제가 당일날 카톡방에 공지할게요!

이번 주에는 참 많은 내용을 토론했네요. 아니, 많이 헤맨 걸까요? ㅋㅋ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소득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에티카》 4부는 새롭게 읽혔고,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은 앞으로 어떻게 읽어야 할지 대략 감을 잡은 것 같습니다. 각각의 텍스트를 어떻게 읽었는지 간단하게 정리해볼게요.

《에티카》 4부는 인간의 관점에서 쓰였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이 좀 이상한데요.^^;; 1부 부록처럼 4부 서문에서도 자연은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 악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스피노자는 1부 부록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선과 악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인간 삶에서 선과 악 개념은 유용합니다. 인간 본성의 모형도 무엇이 구체적으로 좋음이고 나쁨인지 판단하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된다는 점에서 유용합니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자유인 혹은 현자로 말하고, 고대 중국에서는 성인이 인간 본성의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 인간과 똑같은 조건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필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정의와 정리에서도 인간의 조건과 그러한 조건에서 이성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선과 악의 개념뿐만 아니라 우연적인 것과 가능한 것의 구분, 일정한 범위를 넘어가면 막연해지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 코나투스 외에는 본성에 대한 어떤 정의도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 등등. 그리고 정리에서는 인간이 정념을 겪을 수밖에 없고, 부적합한 관념이 형성될 수밖에 없음 등등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정리1과 주석에 따르면, 상상적 인식은 부적합한 관념을 발생시키는 출발점인 동시에 부적합한 관념을 밀어낼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조건에서 어떻게 덕(virtu)을 발휘할 것인지를 묻는 듯합니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에서는 ‘어떻게 앎과 관계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았습니다. 푸코는 하나의 앎이 진리로 승인된 계보를 분석합니다. 푸코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앎도 그 자체로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동성애는 비정상이다’라는 명제뿐만 아니라 과학적 담론도 포함됩니다. 오랫동안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는 천동설이 진리로 인정됐지만, 지금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 별 등이 도는 지동설이 진리로 인정됐습니다. 아마 또 시간이 흐르면 이 지동설도 다른 담론의 등장과 함께 폐기되겠지요. 푸코의 작업은 어떤 앎이 더 옳은지를 따지기보다 모든 앎이 진리로 승인되는 조건을 분석합니다. 객관적 앎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에게 유용한 방식으로 앎과 관계 맺을 수 있을까요?

이와 연관해서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푸코는 ‘어떻게 자신의 진실을 말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 자체로 진리라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진실은 외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의해 진실로 승인됩니다. 이는 정치, 과학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주체가 무엇을 어떻게 진실로 승인하느냐를 문제 삼고, 그로부터 자신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영성(자기 변형 같은 활동)이 요청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알키비아데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것은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인식으로부터만 시작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타고난 미모와 배경, 뛰어난 후원자에 의지하기보다 아테네를 통치하고자 합니다. 그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고 자기 배려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아테네를 통치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분명하게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자기 배려의 독특한 점은 우리의 욕망을 재산이나 명예에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 뜬금없지만, 저는 소크라테스가 자기 배려의 교사로서 활동한다는 대목이 인간의 욕망이 각각의 독특한 신체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처럼 읽혔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통치를 욕망했고, 지금의 저는 또 다르겠죠.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고 실제로 어떤 것을 욕망하는가에 대한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의 맥락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여담이지만,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을 읽으면서 ‘내가 만난 스피노자’를 쓰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분명 자유로워진 지점이 있고, 그것들이 나름대로 자기 배려를 시도한 지점들입니다. 그 과정을 잘 풀어내는 것이 관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과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그래도 다르겠죠. 감동 받은 만큼 알아서 풀렸으면 좋겠지만... ㅠㅠ 어쨌든 다시 모두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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