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4주차 후기-1982. 2.3~2.10>

작성자
동하
작성일
2020-06-13 05:55
조회
80
2. 3~ 2. 10강의 토론후기입니다.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이 무더위와 함께 여러 면에서 어렵게 합니다만 공부시간은 언제나처럼 활기차고 즐거웠습니다. 민호샘 조는 샘들의 사정으로 빈자리가 많이 허전했는데 다음시간엔 모두 뵐 수 있겠지요?
  • 주체와 진실은 어떤 상황에 있는지.

  • 주체와 진실의 관계는 무엇인지.

  • 진실의 주체는 무엇인지.

  •  내가 나 자신에게 가해야 하는 작업은 무엇인가. 나는 나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나는 내 존재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할 것인가.

  • <주체의 해석학>을 읽는 동안에는 푸코의 이 질문을 항상 놓치지 말고 가야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화샘이 토론 중간중간(흠.. 20분에 한번씩?) 일리치와 푸코의 문제의식을 다시금 일깨우는데 그렇지않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리스, 로마, 헬레니즘의 지적탐험에서 헤매다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 가지 얘기가 오갔는데.. 기억술을 익히는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네요. 시간이 지나니 후기쓰기가 좀 막막한 감이 있습니다. 질문을 중심으로 샘들의 논의와 건화샘의 답변과 잊은 것은 텍스트의 부분을 첨가해서 정리해 봅니다.


*구원의 개념-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구원‘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기독교적 선관념때문인지, 데카르트의 순간에 의해서인지 이분적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과 사, 유한과 불멸, 이승과 저승을 이행시키는 개념으로요. 하지만 구원개념의 도입은 그러한 짐작과는 달랐습니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정치적인 것과 정화적인 것이 분리되면서 내면적인 영혼의 돌봄에 대한 문제가 두드러지게 되었고(이후 기독교의 사목권력의 토양이 됨)헬레니즘, 로마시대에 철학이 영성에 흡수되는 조건에서 자기수양이라는 개념이 확장되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이 시기 자기수양은 자신을 구하는 생활의 기술이었으며 구원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등장했다고 보았습니다. 건화샘이 또 환기해준 <안전, 영토, 인구>에서 끊임없는 의존과 복종을 요구하는 사목권력이 제시하는 구원의 개념과는 완전 다릅니다. 바로 자기 행위가 구원이 됩니다.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항구적인 행위, 평생동안 수행된 구원행위로 보상받는 것은 아타락시아(평정심)과 아타르케이아(자족)이다’ (p218)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고 스스로 자유-평정- 평안의 복락을 향유하는 것. 말만 들어도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요. 아니! 어딘가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를 살펴야되는 것이죠?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고’ 와 ‘생활의 기술’이라는 말에 샘들은 많이 걸린다고 하셨어요, 수정샘이 ‘여름나기 좋은 것’을 동의보감 공부친구에게 물어봤다 하니 모두 메모장을 준비하려했지요. 우리는 경험을 통해 참 많은 것에 숙달되고 새겨진 레시피도 많은 데 무엇을 불안해 하는 것일까요. 좋은 것, 먹는 것, 해야 할 것, 등등을 외부의 전문가나 시스템에 맡기는 습관을 돌이켜 봐야한다는 것. 이 맥락에서 일리치가 끊임없이 신자유주의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우리 자신의 구원의 문제’라는 말이 딱 와닿습니다. 의료권력에 몸을 맡기는 문제, 즉 제도, 전문가, 자본에 맡기지 않고 우리만의 진실을 만드는 주체는 어떤 방식으로 될 수 있을까요? 항구적인 자기실천의 방법을 잃어버린 걸까요? 생활의 기술이 있음에도 우리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의문이 듭니다.

*자기배려와 이기(利己)의 헷갈림

자기 몸을 돌보고, 자기를 돌아보는 과정의 구체적인 어떤 상황에서 이기주의와 구분이 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어떤가요? 푸코는 우리 사회에서 고대철학에서의 자기배려가 각각의 시대의 조건에 따라 변모되고, 탈각되어 우리시대는 자기애, 이기주의, 등 개인적 이해관계방식으로 고착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헬레니즘시대 자기배려는 주체의 진실의 차원에서 자기 자신과 세계, 자연, 타자와의 관계성으로부터 자기 수련과 우정의 윤리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자신을 둘러싼 관계 속에서 주체가 항구적으로 자기자신에게 가하는 행위이며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 자체가 바로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이기는 명확한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시대의 자아상인 호모에코노미쿠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원자화된 개인의 실존은 외부적 조건인 시장진실을 통한 이해관계로 구성되므로 수련보다는 자기개발을 통한 성과, 인정, 소비 등으로 즉각적 만족을 얻는 것, 혹은 불만족을 참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행복이므로 끊임없는 발전과 성장 과정이 기대와 의존에 의해 늘 결핍과 불안으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경란샘의 질문- 헬레니즘시기 데메트리우스의 시선의 전향은 무엇을 말하나?

*수정샘의 질문- 나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과 타자로부터 시선을 해방시킨다는 어떤 의미인가?

데메트리우스는 인식할 필요가 없는 사물과 인식할 필요가 있는 사물의 구분하기를 요구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푸코는 이 데메크리우스가 유효화하는 앎을 통해 인간 실존에서 앎과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 관계적 앎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해일의 원인이 아니라 해일이 주는 공포에 대한 이해) 관계적 앎은 세계와 우리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림으로서 자기진실을 생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난희샘은 이 말이 대상과 주체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며 내가 구성하고 있는 세상과 앎이 대상적으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푸코가 주객분리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셨지요. 그럴 때 파이데이아라는 교양적인 앎은 바로 자아만 더 강화시키게 되는 것이겠지요. 배움 따로, 주체의 진실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따라서 타자로부터 시선을 해방하는 것은 자기자신으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에토스(윤리)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시대 우리에게 부자유함을 강요하는 타자의 시선은 무얼까요? 도달해야 할 목표를 향해가는, 자기자신과 분리시키는 신자유주의 최종추구는 돈, 유용성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자기윤리로 살고 싶은데 왜 우리는 ‘돈’ 문제를 분리시키는 데 어려울까요? 그렇다면 타인의 시선에 해방되었을 때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끝까지 밀고나갈 수 있으면 다른 삶의 윤리가 나오지 않을까? 발전, 성취해 가는 것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회복하고 있다면 타인의 시선에 해방되는 것이 아닐까? 라며 계속되는 수정샘의 질문이 나왔고 아마도 이 부분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내 주변에 공(空)을 만들기는 무슨 의미일까요? (p260)

중간에 학인들이 공부를 제대로 했나 확인해 주셨던 영아샘의 돌발 질문으로 모두 즐겁기도 했고요, 또 마지막으로 어려운 의미이지만 즐겁게 나눈 얘기로는 공(空)의 문제가 있습니다.

샘들이 설명해주신 공(空)은 이미 주어지기 전에 있는 자기 존재, 그 자기자신에 되돌아가기, 혹은 자기실천에 의한 자기 변형, 모든 것이 변화하는 규정되어있지 않은 존재 –존재의 무한성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파도와 바다의 관계, 해인(海印); 바다에 도장을 찍듯이 삼라만상이 드러나므로 특권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데요. 좀 많이 오랫동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푸코는 계속해서 '진실의 주체'가 되는 것, 그러니까 진실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구축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양식을 통해 진실을 보이는 것. 에토스- 관계성 속에서 존재방식을 변형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헬레니즘 시대 자기수련의 명령이었다고, 그 연결선 상에서 나는 어떻게 나 자신과 관계를 맺을 것인지 계속 질문을 받는 것 같습니다.
전체 3

  • 2020-06-14 14:03
    현재성을 놓치지 않는 생생한 토론이 전달되는 것 같네요! 기억술이나 생활의 기술들과 같은 개념을 지금의 우리에게 돌이켜보면, 일리치의 말대로 많은 것을 제도, 서비스, 기술, 전문가에게 내맡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와 동시에 더욱더 우리는 휩쓸리기 쉽고 통치당하기 쉬운 왜소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도 같구요.

  • 2020-06-15 12:05
    샘이 재밌게 공부하고 계시다는 것이 훅 느껴지는 후기네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활의 기술'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질문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생활의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어찌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이란 굉장히 소극적인 것에 그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서 요리를 할 수 있지만, 그 식재료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자라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오는지, 또 계절과 절기 혹은 체질에 따라 그 음식과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는지 등등의 '관계적 앎'은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기술'은 어떤 점에서는 '소비'와 구분하기가 굉장히 힘들게 되는 것 같아요.

  • 2020-06-15 15:00
    예전에 곰샘이 커피 자판기가 사라지는 것을 한탄 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갑자기 '커피 자판기라니" 라며 당황했는데
    곰샘이 예전에는 자판기 커피 200원 짜리 2잔을 뽑아서 몇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데이트를 했다면서
    이제는 돈이 없으면 연애도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돈 없이 관계를 맺어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위에 건화샘이 소비와 기술을 구분하기는 많이 어려워 졌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새로운 소비를 삶의 기술를 연마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동의보감에서 본 생맥산을 시켜먹으며, 아침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참 많은 것에 숙달되고 새겨진 레시피도 많다고 한 동화 샘 말씀 처럼, 이미 더운 여름 찬 것 먹으면 배탈 나는 것은 어렸을 때 부터 숙달되고, 새겨진 레시피인데, 쉬우면서도 일상에서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비와 기술을 구분하기는 매우 많이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사유한
    그 지점에서 한 발더 나아갈 수 있기에, 이제는 생맥산 대신 미지근한 커피를 마셔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