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다섯 번째 시간(6.16)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6-15 11:54
조회
71
후기가 너무 늦어버렸네요ㅠㅠ 죄송합니다!

지난주에는 <주체의 해석학> 2월 3일 강의와 2월 10일 강의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세미나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서 저는 ‘구원’의 개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헬레니즘 · 로마 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자기 수양’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드러나고 발달하게 되는데요, 이 자기 수양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때의 구원이 우리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구원이라는 점이었죠. 우리에게 구원은 생과 사 · 유한성과 불멸성 · 이승과 저승 사이의 이분법 속에 놓입니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것으로서의 구원. 또 구원은 극적인 사건과 연관됩니다. 우리는 매일의 행위 속에서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사건에 의해 자신의 삶이 바뀌기를 내심 바라죠.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을 어느 날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거나, 다짐 한 번으로 갑자기 게으르던 자신이 열심히 힘을 다해 살게 된다거나. 또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면 곧바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는 누군가를 떠올립니다. 그것이 인간의 죄를 위해 죽은 예수의 모습이건, 백마 탄 왕자의 모습이건, 자신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줄 멘토의 모습이건.

헬레니즘적인 구원은 이와는 다릅니다. 훨씬 담백하달까요? 자기 자신을 구하는 자는 도시국가가 방어물 · 요새 · 성채를 설치하면서 그렇게 하듯이 자기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적절히 무장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제합니다. “자기 자신을 구제하는 자는 경계 상태, 저항 상태, 모든 공격과 습격을 물리칠 수 있게 해주는 자제와 자기에 대한 절대적 지배력 행사의 상태에 있는 자”(217쪽)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지키고 구제할 힘이 있는 자,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행위하는 자만이 스스로를 구원합니다. 구원은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항구적 행위”(218쪽)이며, 이 구원은 일상 바깥의 다른 무엇을 향하지 않습니다. 일상 바깥을 향하지 않는 만큼이나 외부의 구원자를 요청하지도 않죠. 항구적인 자기 실천을 통해 외부적 원인에 종속된 상태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긴장된 평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헬레니즘 · 로마적 의미의 구원입니다.

저는 구원에 관한 대목을 읽으며 이반 일리치가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일리치가 계속해서 하고자 했던 말은, 의존적이고 예속적이지 않은 의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일리치는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해하고 감내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상실한 채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줄 병원과 약에 의존하는 상태, 즉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무능력한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전문가들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각종 전문가들에게 우리의 실존을 모두 맡겨버리는 것을 문제 삼고 있죠. 자기 자신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의존적인 자리에 놓이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삶을 부정하는 의지를 작동시키게 됩니다. 구원된 상태와 구원되지 못한 상태가 이분법적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죠. 고통과 불편은 그 자체로 해결을 촉구하는 부정적인 상태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조건이 완비된 쾌적한 상태를 자신의 행복 · 자유 · 구원과 동일시하게 되죠. ‘구원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단련과 자기 실천 속에서 구원을 만들어갈 것인가, 그러한 수고로움을 면하고자 저 너머의 구원을 꿈꿀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주체의 해석학> 2월 17일, 2월 24일 강의를 읽고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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