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여섯 번째 시간(6.23)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6-18 19:50
조회
77
“우유 속에 빠진 파리를 보면 나는 쉽게 안다 / 사람됨은 그 옷으로 안다 / 맑은 날씨와 흐린 날씨가 다른 것도 안다 / 사과는 그 나무로 안다 / 나무는 그 수액으로 안다 / 모든 것이 비슷할 때도 나는 안다 / 부지런한 자인지 게으른 자인지를 나는 안다 / 나는 전부 다 안다,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깃을 보면 저고리를 안다 / 수도사는 그 긴 옷으로 안다 / 종을 보면 그 주인을 안다 / 수녀는 너울 쓴 것을 보면 안다 / 도둑은 은어를 써도 안다 / 어릿광대는 우유 먹는 것을 보면 안다 / 포도주는 그 통을 보면 안다 / 나는 전부 다 안다,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말과 당나귀가 다르다는 걸 나는 안다 / 말과 당나귀의 짐이 다른 것도 나는 안다 / 베아트리스건 이자벨이건 잘 알 수 있다 / 더하여 합을 내는 계산패도 안다 / 꿈과 잠이 다른 것도 나는 안다 / 보헤미아의 이단도 안다 / 로마의 권력도 안다 / 나는 전부 다 안다,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왕이여, 요컨대 나는 전부 잘 안다 / 안색이 좋은 사람과 창백한 사람도 안다 / 일체를 파괴하는 죽음도 나는 안다 / 나는 전부 다 안다,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프랑수아 비용, 〈촌언(寸言)의 발라드〉)

‘나’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종종 의식 혹은 자아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자아의식은 어떻게 될까? 만약 기술이 발전해서 뇌를 이식하거나 몸을 옷처럼 갈아입을 수 있다면, 그때 나의 의식은 어떻게 될까? 자아의식은 단지 신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걸까? ‘나’라고 할 때 저는 은연중에 육체라는 껍데기 안에 갇혀서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는 어떤 내면의 목소리 같은 걸 떠올리게 됩니다. 외부의 원인들로부터 분리되어 인식하고 갈등하고 의지하는 ‘나’. 죽음이 두려운 것은 바로 이러한 내면과 자아가 사라진다는 것, 스스로를 ‘나’라고 의식하는 그 의식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 것 같습니다. ‘나’라는 의식이 없다는 건 뭘까요? 그것을 의식적으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공포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무엇으로 여길 때, 우리는 어떤 모순에 부딪치게 됩니다. 인식하는 주체인 ‘나’에게 정작 자기 자신은 인식 불가능한 무엇이 되어버린다는 점입니다. 프랑수아 비용의 시처럼, 우리는 종종 모든 것을 다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의 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인 논평을 늘어놓다가도 자기 문제가 되면 한 치 앞을 못 본다거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어느 순간 자신의 충동에 지배당해버린다거나, 더 일상적으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다짐하면서도 바로 다음 순간 스스로의 다짐을 배반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자아(내면, 의식)’와 동일시할 때,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아를 자유롭고 독립적인 기체라고 여길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한없이 취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 경험들로 인해 자기 자신이 누군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외부의 권위에 기댑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달라고 사제나 상담사나 의사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세네카나 아우렐리우스 같은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뜬구름 잡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영화(靈化)’와 ‘진리의 실천과 훈련’에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으로의 전향(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그것이 ‘나’의 내면의 비밀을 해독하는 일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나’라는 실체를 포착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둘러싼 조건에 대한 이해 속에서 스스로의 진실을 구성해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네카는 전체 자연을 주파하는 인식의 작용 속에서 자연 안의 한 점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굽어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아우렐리우스는 끊임없이 유출되는 표상들을 해부하고 검사하는 훈련을 중요시했죠.

왜 자기 자신에 접근하기 위해서 이들은 한편으로는 전체 우주를 사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이 만들어내는 표상들에 현미경을 들이댈 필요가 있었던 걸까요? 제 생각에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들의 실존이 펼쳐지고 또 규정되는 조건을 이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를 고정불변하며 유일무이한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 대한 이해 속에서, 그리고 사물들을 세밀하게 바라보는 훈련 속에서, 이들은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사건이나 그와 더불어 발생하는 정념 같은 것들을 적합하게 이해하고 또 이해하는 만큼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나’라는 대상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것은 ‘나’를 전체적인 조건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산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주에는 <주체의 해석학> 3월 3일, 3월 10일 강의를 읽고 메모 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장청샘과 수정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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