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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너스 시즌 4 다섯 번째 시간(6.16) 후기

작성자
현숙
작성일
2020-06-23 14:00
조회
78

비기너스 시즌 4 다섯 번째 시간(6.15) 후기


다섯 번째 시간에는 자기배려의 실천 훈련의 사례로 세네카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를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얘기가 풍성하게 오고 갔는데요. 그 중 ‘자기’와 관련한 부분이 기억에 남아서 정리해볼까 합니다.


 2월 17일 전반부 첫 제목이 ‘자기 배려의 완결된 형식인 자기로의 전향’인데 저는 ‘자기’나 ‘전향’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자연과 통치성, 권력 등 실존의 전반에 관한 문제를 고민해보는 것이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자기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의 자기로의 전향은 실존의 문제에 자기가 빠진 자기 포기적인 성찰의 문제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며, 바로 이 자기포기가 자기를 외부적 대상에 의존·예속하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푸코가 예로 들고 있는 세네카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자기로의 전향의 실천적 활동을 살펴보면, 차이는 있겠으나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기, 즉 자기로부터 출발한 참된 담론인 자기 진실 속에서 사유하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세네카가 위에서 굽어보는 시선으로 자연의 모든 이치를 깨달았을 때 내가 세계와 만나는 지점을 보는 것이라면, 아우렐리우스는 자기생활의 모든 미세한 지점에서 자기 일상을 반추하고 반성하는 가운데 세계와 만나는 지점을 알게 된다는 것이라는 면에서, 즉 두 사람 다 세계와 자기의 관계에서 진실은 찾는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난희샘이 불교의 비유를 많이 해주셔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요, 예를 들면 아우렐리우스의 훈련법이 불교의 백골수행과 비슷하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백골수행이란 이미지화된 대상의 모든 표상을 해골만 남을 때까지 분해하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해골이 될 때까지(혹은 똥자루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모든 이미지와 감정을 탈각시키는 겁니다. 또 아우렐리우스의 훈련법이 마치 내가 쓰고 있는 시간과 돈과 같은 유한자원을 살펴보는 것과 비슷하고, 내 욕망의 방향을 점검해 보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의견도 나왔는데, 이때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돈이나 시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방식의 고민으로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미영샘이 환기시켜 주셨습니다.


스토아주의자들이 이미지를 탈각하는 수행을 하는데 반해, 지금은 모든 것이 이미지화 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감각을 자극하는 이미지에 의해 움직이고 인식된다는 거죠.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에 끝없이 이어진 차량이나, 커피를 몇 잔 마시면 받을 수 있는 사은품을 받으려고 300잔의 커피값을 지불하는 사람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에서 사람들은 이제 실제로 느끼는 맛이나 감각이 아닌 이미지와 기호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에 따르면 소비는 고대나 중세인들의 만족이나 향락과는 다른 결여된 무엇을 쫒는 행위라고 건화샘이 말했는데요. 소비는 하나의 기호를 찾아내 거기서 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호를 쫓아가는 이상한 현상이라는 겁니다. 불교의 ‘갈해’와 같은 행위라는 거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는 행위, 그러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소비는 끊임없이 자신으로 소진하게 만드는 소비라는 겁니다.


수정샘은 실제로 커피의 맛과 차이를 알고 싶다면, 돈을 들여 비싼 커피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부단하고 계속적인 훈련과 실험을 통해, 미세한 차이를 스스로 발생시키고, 그 차이를 친구들과 나누는 것을 능동적으로 고민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요즘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미니멀리즘, 특히 정기적인 미니멀리즘, 즉 반복적으로 버리고 사는 것의 문제점에 대한 얘기도 나왔는데요. 의식적으로 버리고 줄이는 행위가 아닌 자기를 둘러싼 전체 구도속에서 소비 차원의 다양한 관계방식을 고민하고 참여하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그 관계 속에서 미니멀리즘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 예로 어떤 사람이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면서 환경공부를 같이 했는데 청바지 한 장을 만들 때 500리터의 물이 소비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예뻐서, 값이 싸서 등의 이유로는 절대 옷을 사지 않는 실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부가 실천과 연결되는 순간 옷과 맺는 관계가 이전과는 전혀 달라지는 거죠. 공부를 통한 실천으로 타자 배려와 동시에 자기 배려가 이루어지는 보여주는 매우 적절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자기배려는 항구적인 자기 실천입니다. 목표를 정해놓고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는 것입니다. 또한  드러나는 좋지 않은 것을 제거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능동적으로 반응할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세네카가 말하는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얘기도 나왔습니다. 삶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미 삶의 모든 조건―자신의 삶속에 있는 모든 행·불행―을 긍정한다는 것, 다시 말해 삶을 총체적이고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한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삶의 어느 한 부분을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고, 살거나 죽거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거죠. 세네카는 노년의 삶을 긍정하는 상태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이밖에도 와닿는 얘기들이 많이 오갔지만, 가뜩이나 늦은 후기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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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4 12:53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의 수련은, 전자는 높이 올라가고 후자는 깊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결국 시선을 자기에로 돌려 자신을 굽어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 같습니다. 핵심은 어떤 표상에 집착해서 자기 자신을 실체화하지 않을 수 있는 훈련이라는 점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