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여섯 번째 시간(6.23) 후기

작성자
류수
작성일
2020-06-24 11:28
조회
83
여섯 번째 시간에는 자기 배려의 실천 훈련 중, 명상, 읽기와 쓰기, 아첨과 수사학과 관련된 다양한 방법이 나왔습니다. 많은 실천적인 방법이 나온 것과 관련해서, 다양한 주제가 오갔습니다. 그 중에 기억 남는 것을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명상에 관해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근대에 들어서 사람들은 몸의 이완, 정신의 이완을 위해 명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우주의 하나의 점이 되어보는 경험, 혹은 나를 멀리서 바라보는 경험, 내 생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관조적인 명상을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우리는 명상을 어떤 사물의 의미를 심화시키지 않고 특수한 강도를 가지고 사유하려는 시도나 우리가 사유하는 이 사물에 입각해 다소 규칙화된 질서 속에서 사유가 전개되도록 내버려두는 시도로 이해합니다.

[푸코, 주체의 해석학]
그런데 그리스인에서는 사유의 효과를 통해 현재의 자기와 관련된 주체를 이동시키는 것이 명상이었습니다. 에를 들어 죽음을 명상하기란 사유를 통해 죽어가고 있거나 죽게 되거나 생의 마지막 날들을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의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앎으로서 끝나는 앎이 아닌, 앎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실천적인 앎을 구성함에 있어서, 그리스인의 명상은 주체의 이동으로서의 명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살아 숨쉬고, 온전히 내 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24시간 뒤에 죽는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내일 지구가 멸망 한다면 이라는, 새우깡 같은 소재가 아닌, 몸으로 느껴지는 죽음을 상상하면 어떨까요? 그리스인들의 명상 방법을 읽으면서, 몸으로써의 명상의 빈약함을 느꼈습니다.

읽기 것에 관하여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일리치는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텍스트를 읽는 것은 포도밭을 거니는 것과 같다. 이랑과 고랑이 있고, 끊임없이 소리 내어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포도를 따먹는 것과 같이 텍스트를 먹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읽기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을까요? 유튜브와 같이 영상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읽는 것은 더 이상 책과 신문만이 아닌, 보는 것, 듣는 것, 읽는 것이 하나의 조화가 되어 읽는 것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유튜브과 같은 곳에서는 웃음소리를 백그라운드에 삽입함으로써, 이곳이 웃는 곳이라는 것을 묵시적으로 암시적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노출되다 보면 감정도 획일화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 웃어야 하는지 친절히 알려주는 영상을 보며, 우리의 감정을 검열하거나 또는 보살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시대에는 악덕의 대명사가 아첨이었습니다. 아첨은 다른 사람을 예속하게 만드는 게 문제였습니다. 아첨 받는 사람이 아첨하는 사람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아첨 받는 사람이 자기배려를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법정 최고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살인인 것과 같이, 그리스 시대에는 자기배려의 실천이 최고의 미덕이었기에, 아첨이 악덕의 대명사가 된 것 같습니다.

군주의 파르헤지아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에서 통치의 합리성이 통치하는 자에게 있었는데,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 통치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합리성의 문제로 넘어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공정한 것이 통치의 합리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치인들은 얼마나 모두에게 평등하고 공정한 정책을 내는 것이 중요한 능력이 되었습니다. 정치인의 개인의 윤리와 정치는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으로 본다면 어불성설입니다. 그리스인들은 파르헤지아를 잘 하는 군주가 정치 또한 잘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개인의 윤리를 구성하는 과정이, 정치를 구성하는 과정이 사실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이라는 것이 제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에게 있다는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기독교적인 앎이 그리스인의 앎과 너무 다르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학에서 진실이 환자에게 있지, 의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자가 진실을 말하면, 과학적 또는 제도적 앎의 기준에 의해 확증이 됩니다. 의사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진실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담론을 필터를 통해 그 사람의 진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신체형과 감금형 사이의 과도기에서 유죄냐 무죄냐를 판단함에 있어서 자백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문제를 파헤치는 경찰, 형사와 용의자간의 대결을 펼친다고 이야기 했는데, 신문 또는 고문을 통해 범죄자가 자기 죄의 고백을 해야 유죄가 되는 것입니다. 진실을 진실이게 만들어주는 배경이 그 당시의 사회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채운샘 특강이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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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4 16:56
    신속한 후기네요~~토론 때 나눴던 얘기가 고스란히 복기가 됩니다. 고대인들의 파르헤지아는 단순히 솔직히 말하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저는 파르헤지아의 발뒤꿈치도 못쫒아간다 싶네요. 말은 말이고 행동은 쥐꼬리만하니까요~~~날난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