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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너스시즌4_여덟 번째 시간(06.30)_채운샘 두번째 강의

작성자
소현
작성일
2020-07-03 23:39
조회
154

이번 세미나는 채운샘의 두 번째 강의 시간이었는데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주체의 해석학』을 함께 버무려 정리해주시면서 푸코가 문제삼은 지점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전생의 공부가 될뻔한 전 학기 공부까지 살려주신 참으로 신박한 강의였네요. ㅎㅎ 그럼 후기 정리 들어가보겠습니다.


18세기 자유주의는 초기 자본주의로서 시장질서가 핵심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담스미스의 자유주의입니다. 시장 질서란, 시장에는 시장만의 자율적 논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자율적 논리는 국가가 시장에 쓸데없이 개입하면 시장의 자율성을 해치게 되므로 시장은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된다는 논리죠. 그러므로 국가는 시장에 최소한의 간섭만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시장 질서에 기반한 18세기 자유주의 통치성입니다. 그럼 신자유주의는 18세기 자유주의와 어떻게 다를까요? 독일과 미국에서 형성된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는 시장질서가 핵심이긴 하나 국가의 역할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국가는 시장질서를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개입이 아닌 국가가 할 수 있는 모든 개입을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통치성입니다.   


푸코의 이러한 일련에 분석을 통해 발견하게 된 통치성의 변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통치성과 주체의 관계입니다. 즉, 통치성의 변화에 따르는 주체의 변화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인간인 호모에코노미쿠스라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호모에코노미쿠스는 다른 활동보다도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주 당연한 존재죠. 그래도 18세기 자유주의에서 호모에코노미쿠스는 아직까진 경제 활동은 다른 활동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통치성의 변화와 함께 호모에코노미쿠스의 개념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호모에코노미쿠스는 단순히 경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간(경제가 제일 중요하다. 다른 활동 영역중 가장 중심이 경제다)이 아닙니다. 경제와 무관해보이는 일련의 영역들 안에서도 경제적 논리로만 품행을 인도하는 인간입니다. 이러한 주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1인 CEO입니다. 자기 자본을 가지고 자신을 경영하는 인간이죠. 자기 자본이란 뭘까요? 과거에는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았습니다. 노동과 임금을 교환하는 것이죠. 이젠 임금을 소득이란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소득은 임금처럼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득이란 개념은 임금을 자본이라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받은 자본, 즉 소득을 가지고 경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럼 경영이란 뭘까요? 미래를 설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어떻게 해서든 이익을 내야만 합니다. 이익만이 선이죠. 정리하자면 경영이란 소득이 된 자본을 가지고 1인 CEO가 자신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미래 설계를 하여 이익을 내는 것입니다. 이렇듯 푸코가 문제 삼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호모에코노미쿠스는 경제활동을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경제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인간도 아닙니다. 모든 영역을 경제적 영역으로 사고하는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활동의 결과물이 미래에 +α가 없다면 하지 않는 인간, 자신의 삶에서 행하는 어떤 행동들이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식으로만 계획되어 있는 인간입니다. 또한 자기자신을 CEO로 만든다는 것은 결국 삶부터 죽음까지 개인이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삶과 죽음을 함께 하는 공동체에서 개인이 완전히 차단됨을 뜻합니다. 요약하자면, 신자유주의 주체성은 오로지 자기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자신에서 끝난다는 거이죠. 푸코는 바로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해 문제 삼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체의 해석학』에 나오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들은 우주를 봅니다. 지금 난 어디에 있지? 자연을 어떠한 건가? 이 자연속에 있는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건가? 그들은 자기 자신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습니다. 내가 어떤 세상에 어떤 사회적 국면속에서 살면서 나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준거를 나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푸코가 80년대에 주체성의 생산(주체화 양식)을 문제 삼았을 때, '내가 어떻게 생산될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타자와의 관계성에 있다고 말합니다. 타자는 나외에 다른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환경, 물질, 비물질, 세계의 사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내 자신으로부터, 내가 가진 것, 내 소유라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극단의 신자유주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푸코의 고민이 있습니다. 1960~70년대를 겪으면서 유럽 서구 사회에서 담론화 되고 제도적으로 실천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지평속에서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자기라고 떠올리는 것과 갖는 관계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라는 문제를 고민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고민하는 아주 자폐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얘기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부터 내 삶의 문제를 고민한다면 더 많이 가지는 것말곤 이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부든, 지식이든, 성격이든, 뭐든지 더 많이 가지는 것말곤 해결책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체의 문제를 생각할 때, '내가 나의 소유자 일까?', '삶이 내 소유가 될 수 있나?', '삶을 내가 경영할 수 있는 건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할 수 있는가?'가 아닌 '나의 활동을 통해 어떤 방식의 삶을 만들어가야 할까?'를 남은 학기동안 함께 고민해보아요~



                                                                                                 다음주 간식은 누구일까요? 기억이 나질 않네요. 흑... 다음 시간은 새롭게『담론과 진실』로 시작합니다.

전체 2

  • 2020-07-06 13:28
    정말로 전생의 공부가 되살아나는 듯한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푸코가 왜 그토록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지도 좀더 이해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구요. 푸코의 문제의식을 재점검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어떻게 다른 비전을 그려볼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봅시다!

  • 2020-07-06 15:44
    내가 내 몸, 내 생각, 내 소득, 내 감정을 소유하려는 이 관념과 내가 나를 알려면 다른 누가 아니라 내 내면과 관계해야 한다는 관념이 근대에 만들어진 산물이었다는 게 새삼 놀라웠습니다.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혹은 그 배려 자체가 공동체나 스승이라는 타자와 연관되지 않고서는 시도될 수 없는 고대의 자기 관계는 매번 새롭네요. 후기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