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화팀 2학기 2주차 후기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20-01-20 00:45
조회
76
지난 학기 톨스토이에 이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을 읽었습니다. 이 두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가 전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미 주어진 선과 악의 구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주어진 가치대로 산다는 것에 대한 모순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모순투성이인 지하 생활자의 찌질한 모습을 보면서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들을 보면 인간은 과연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는 대로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알면 그렇게 행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맘대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오히려 반대로 이익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지하 생활자는 ‘인간은 절대적으로 이성과 그의 이익이 지시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기를 좋아하며, 때때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어떤 것을 원할 수 있고 심지어는 긍정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인생의 원칙을 안다면 정말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많은 철학자는 인생의 보편적 법칙을 찾았습니다. 2x2=4라는 공식을 찾아내서 그렇게 산다면 인간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하 생활자에게 이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런 원칙을 따르지 않는 변덕이 어떤 경우에는 가장 유익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원칙에 각자의 개성을 맞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1부에서 지하 생활자가 인생에 대해 통찰을 하는 부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조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원칙이 생기고 따르려는 순간 '실제의 삶'의 소외가 일어난다는 것을 2부에 과거를 회상하면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하 생활자는 지하에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씁니다. 지하에서 쓴다는 행위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한편에서는 화자가 지하에서 실제적 삶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을 해부하고 있는 자발적인 고독을 자처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지하에서 자신만의 원칙을 이상적으로 만들면서 실제적 삶에서 도피하고 있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지하가 하나의 '도주로'로 후자는 '도피처'로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냐는 상반된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부와 2부에서의 지하를 다르게 해석해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자의식에 갇혀서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2부의 지하는 도피처로,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고 해부하는 글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쓰고자 하는 2부의 지하는 도주로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2부에서 화자는 자의식이라는 지하에 갇혀서 모든 실제적 삶을 판단하며 살았던 지난날들을 회고합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 인간은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라서 살기보다 충동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따르는 것의 이로움을 아는 것과 더 센 힘을 소유하고 누군가를 이기고 싶은 충동들 사이에서 인간은 내적 갈등을 일으킵니다. 지하 생활자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부인하며 책으로 도피합니다. 그리고 책에서 말한 원칙을 대화의 주 소재로 사용합니다.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나누는 대화 이외의 것은 모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적 삶에서 그는 복수심과 분노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모욕했다고 여긴 사람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힘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화자는 동창생 모임에서 모욕을 당하고 난 뒤 리자라는 여성을 만납니다. 영웅인 척 그녀에게 행동하고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줍니다. 그 후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와서 자신의 본 모습을 알까 봐 두려워합니다. 불쌍하고 남루하고 혐오스러운 현실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모욕하려고 왔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며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는 자신이 남들에게 모욕한 것처럼 모든 사람도 자신과 같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 리자는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에게 사랑이란 학대와 도덕적 우월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것이 아닌 다른 사랑은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증오감으로 사람들을 대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을 순수하게 사랑하게 된 그녀를 돈으로 모욕합니다. 그는 리자에게 돈을 갖고 꺼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리자는 돈을 그 자리에 두고 떠납니다. 그렇게 떠나고 나서야 그는 리자가 자신을 모욕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자신을 사랑하러 온 것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의 삶>을 사는 데에 서툴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화자의 모습은 이상적 원칙을 추구하고 그에 맞춰서 살기 위한 노력이 실제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공부를 하면서 일상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내가 어떤 고민을 갖고 사는지에 주목하는 것보다 공부하면서 배운 좋은 것을 따라 행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경멸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가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아래의 구절이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내내 부끄럽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일부로 반주인공의 모든 특징들을 모아 두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불쾌한 인상들을 남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며, 우리 모두는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정도에 따라 비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참된 <실제의 삶>에 대하여 사람들이 상기시킬 때, 때때로 참된 <실제의 삶>에 어떤 혐오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래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참된 <실제의 삶>을 거의 노동이나 근무 같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가 되어 있으며 우리는 모두 속으로 책에 쓰여진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때로는 소란을 피우며, 왜 변덕을 부리며, 왜 바라는 것일까? 우리 자신도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 열린책들,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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