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교 of 티베트> 시즌 3 네 번째 시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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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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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불교&티베트)

<불교 of 티베트> 시즌 3 네 번째 시간 후기

존자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입보리행론을 암송하시면서 하루를 시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 위대한 책을 접하면서 저도 매일 조끔씩 낭송을 해보자고 소심한 결심을 했었지만,   4주가 지나도록 행으로 이여지지 않고 생각만 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 행까지 이어지지 않을까요. 아마도 매번 반복되는 익숙한 습이 저를 붙잡는 것이지요.  그러니 근기라는 것이 어떤 거창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익숙한 패턴으로 가려는 관성의 힘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생각 명상

 사마타 명상 중에 생각 명상과 감정 명상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생각 명상을 먼저 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명상을 하다보면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이 잠이 오거나,  생각이 너무 많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상에서는 이것을 장애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명상의 대상인 방편으로 쓰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뭘까요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이것이 마음의 본질은 아니라는 겁니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청명한 하늘의 마음에 본성이라면, 거기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구름들이 생각과 감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구름들이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청명한 하늘은 잠시 구름에 가려져 있지, 그 본래보습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특징은 뭘까요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강력하게 지배력을 넓혀갑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면, 알아차릴 틈도 없이 바로 다른 생각으로 옮겨갑니다. 생각을 원숭이에 비유하자면, 하나의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이 일이 빨리 끝나기를 문지방에서 원숭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 만큼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원숭이는 또 다른 일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미친 원숭이는 생각을 끌고 다니며 주인노릇을 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생각이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을 명상의 방편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생각은 늘 분주하게 뭔가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지배하기를 좋아하고 주인노릇하기를 좋아하는 미친 원숭이에게 ‘어떤 할 일을 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날뛰는 원숭이에 오히려 먹이를 줌으로써(할 일을) 주객을 전도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일을 주는 순간 내가 주인이 되고 원숭이 마음은 저를 따라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원숭이 마음은 바쁘게 할 일을 하고 있으니 또 다른 생각을 찾아 날뛰기를 덜 하게 됩니다.  원숭이는 일거리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므로 스스로를 바쁘게 만들기 위해 마음을 계속 굴린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숭이 마음을 조절하려하지 말고, 유능한 조련사가 되어 주의 깊게 방심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수, 상, 행, 식의 흐름을 지켜봅니다.

신체라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 이상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느낌들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작용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조건이 이러하다면, 생각을 억압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며 생각에 끌려갈 것인가? 아니면 생각을 친구로 만들 것인가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좋은 생각은 받아들여 친구로 삼고, 부정적인 생각은 명상에 방해된다고 밀어낼 수 있을까요 만약 이렇게 한다면 부정적인 생각들은 점점 더 증식하게 됩니다. 그 반대로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분별하기보다 ‘어서 오라고’ 알아주는 것, 그래서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림 하지 않을까요.

생각을 계속 바라보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각을 보면 생각이 사라집니다. 또 하나는 생각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대로 있는 생각은 알아차림과 생각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가상임을 알아차리면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내용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가상임을 알고 내용을 따라가고 있음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지요. 한 생각이 떠올라 보았는데 한 순간에 사라졌다고 하여 그게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생각을 알아차림 함으로써 전에 일어난 생각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한 생각이 일어나고 또 다른 생각을 보는 그 사이에 틈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틈이 열린 알아차림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생각의 사이에는 틈이 있게 되는데 순간이나마 그 틈에서 대상이 없는 알아차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생각 명상에서 이 틈이 점점 벌어지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 생각 명상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은 구름(먹구름 뭉게구름 잠시 있다 사라지는 무지개)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이 구름들을 그냥 알아차리거나 바라보기만 하는 명상을 합니다. 어느 순간 알아차림이 없어지면 생각은 다양한 형태의 구름으로 확 쓸려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알아차림으로 부드럽게 돌아오면 됩니다. 생각 명상에서는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 따로 없습니다. 어떤 생각이던지 억압하거나 밀쳐내려고 하지 않고 환영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어서와 차 한잔하자’ 하고 알아주면 오히려 생각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2.‘화를 말하다’ 토론

이 책을 덮으면서 우리들의 느낌은 ‘화’에 대해서 뭐라고 반박할 여지가 없어 오히려 더 화가 난다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치밀하고 완벽하게 화와 증오에 휩쓸려 살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가 빈틈이 없어서입니다. 그럼에도 오감을 통해서 인식을 형성하는 존재인 중생들은 매번 조건만 맞으면 화를 내고 살게 됩니다.  화와 증오는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도 가까이 와 있기에 주제만으로 열띤 토론의 장이 되었습니다.

존자님은 화를 다루는 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심도 깊게 이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기반이 되는 인과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기반으로 자비심과 보살행이 화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p29)

넷째날 강의에서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 무아, 공성 등으로 인욕품을 마무리 하셨는데, 대체적으로 다소 어려운 감이 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인욕품 7게송에서 보면, ‘마음의 불편함’이 바로 화의 ‘연료’ 가 된다는 사실이다.  불편한 마음이란 것이 인과법에 따르면 원인과 조건이 서로 의존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과의 이해를 통해서 보면 불편한 마음이 일어날 때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따라서 아무 조건과 원인 없이 불편한 마음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인해 화가 일어나는 원인과 조건들을 알아차려봐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원인에는 ‘내가 옳다’라는 고정된 자아가 반드시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화, 분노, 증오, 다 이유가 있다고 화의 연료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무아의 관점에서 보면 불편한 마음이라는 것이 몸과 마음 어디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맞아서 일어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인데, 이것을 내가 옳다고 잡고 실체화하는 것이 됩니다. 불편한 마음이란 것이 고정되어 있거나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인과 조건들이 서로 관계하면서 매번 다르게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라는 마음의 작용도 매번 다르게 구성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은 화를 내지 않고 살 수가 있을까요?   “화내는 마음이 고통을 지니면, 마음은 고요한 편안함을 경험할 수 없으며, 기쁨과 안락을 얻지 못하여, 잠이 오지 않고 불안하게 된다”(3게송)

화가 주는 이득은 없고, 고통과 불안은 마음을 산란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기쁨과 안락, 고요함과  평화로운 마음에  머물지 못합니다. 이득이 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화를 내고 분노에 익숙할까요? 어쩌면 그 불편한 마음 작용이 고통을 유발하지만, 이것조차도 습기習氣가 되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먼저 화는 조건과 원인이 상호작용하여 일어나므로 화에는 어떤 자성도 없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자 일상에서 일어나는 불편한 마음을 무아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도 화를 보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매순간 생사를 반복하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한 순간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화가 일어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일어났다 사라짐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화를 공에 비유한다면, 스크린에 비추어진 영상들은 온갖 정념들입니다. 그 빛을 통해 들어오는 영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는 스크린은 그 자체로 공성입니다. 따라서 일어나는 화도 영상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영상은 원인과 조건이 상호작용하면서 나타났다 사라지듯이 화도 마찬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편한 마음의 작용으로 화가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을 인과법과 무아와 공성으로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자비심과 보리심의 기반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저 욕망에 불과 합니다. 그러니까 화와 증오의 마음을 인욕으로 다스릴 수 있으려면, 육바라밀을 닦고 공덕을 쌓아 그 안에서 자비심으로 화를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화를 어떻게 자비심으로 관찰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대상과 일을 하거나 관계를 맺을 때 자기가 설정해 놓은 방식대로 하고 자 합니다. 이런 방식은 필히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이 실현되면 자기의 노력으로 한 것으로 알고, 실현이 되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합니다. 목적이 실현되어 결과가 좋으면 바로 거기에 我 달라붙어 자만해집니다. 그 반대로 실현되지 않을 때 바로 불편한 마음에서 오는 화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목적이 설정되는 순간 고통의 조건도 동반하게 됩니다.

목적이 실현된 것도,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것도 그 목표에 충실해서 나온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시는 물 한잔도 여러 조건들이 상호관계 속에서 한 잔의 물을 마실 수 있듯이, 결과도 다양한 조건들이 작용 속에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대지가 주는 혜택과, 중생들이 주는 도움이 어우러져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림이 관계에서 오는  자비를 아는 것이 아닐까요.

상좌부불교에서는 화의 범위를 ‘불편한 마음과 불안함도’ 화로 분류한다고 한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날 때 어떤 스님은 이 감정을 'Beautiful Monster'라고 표현하신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아름다운 괴물로 받아들이고 알아차려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부정적인 감정은 오래 머물지 않고 사라지게 됩니다. 즉 일어나는 감정을 스스로 인정해주고 받아주므로 오히려 그 감정을 상호작용 속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론 화가 일어나면 몸부터 반응해서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납니다. 이 상태에서 화를 환영할 수가 있을까요?  먼저 감정이 일어나는 현상을 그냥 두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다보면 약간의 공간이 확보됩니다. 이러한 공간이 확보되면 반응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관성의 힘에 의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던 것을 스톱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정도의 차이에 따라 멈춤의 힘도 달라 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상을 할 때 처음에는 작은 감정들을 가져야와 감당한다고 합니다. 만약 큰 감정을 가져와서 바라보면, 그 불길에 타거나, 아니면 포기하게 됩니다.

한 선생님의 개인적으로 화를 대하는 방법을 조금 소개해주셨습니다. 화의 감정이 일어나면 무조건 앉아서 바라본다고 하십니다. 좌선으로도 알아차림이 잘 안되시면 액션으로 절을 한다거나 밖으로 나아가시거나 한답니다.  어쩌면 한 시간 명상하는 것보다 감정이 일어날 때 바로 앉아서 알아차리는 것이 더 명징한 명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가 가장 선명하게 감정의 동요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와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질문했답니다. 그 정도의 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들 했습니다.

존자님은 청중이 “마음을 단련시키는 것으로 이 세상에 만연한 지독한 괴로움에서 오는 막대한 슬픔을 느끼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요”(p332) 라는 질문에 존자님은 자신도 공성에 대해 25살 되었을 때 진지하게 사색하게 되었고, 공성의 기반으로 성실하게 수행해서 열반의 본성을 이해 하셨다. 그러나 보리심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40대가 접어들어서야 공부와 수행의 성과로 마침내 보리심을 조금 이해하게 되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적절한 시간과 장소만 있다면 보리심을 계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이런 확신이 들기까지 40년이 걸리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감정과 생각하나 명징하게 알아차리지 못함을 위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각자 ‘적절한 시간과 장소는’  언제 어떻게 다가올까요? 라는 질문을 던지며 마무리 했습니다.

공지사항

하루 5분 잊지 말고 생각 명상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는 채운샘 강의가 있습니다.

다음다음 주에는 “달라이 라마의 지혜 명상” 127쪽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전체 2

  • 2020-11-13 13:59
    원숭이에게 일거리를 주는 연습으로서의 생각명상, 그리고 이쁜 괴물에게 차 한 잔을 권하는 감정명상. 빼먹지 않고 연습하는 것이 관건인 것 같습니다!

  • 2020-11-13 22:32
    길례샘~ 매일 조금씩 입보리행론을 낭송하는 걸 결심하셨었다니....! 늦지 않았으니 내일이라도 시작해보시고 저희 불티 중생들에게 수행 경험을 나누어주셔요. ^^
    길례샘께서 깨알같이 정리해주신 후기를 보니, 입보리행론의 인욕품을 공부했으므로 저희가 이론상으로는 화를 다스리는 법을 배운셈인데.... ㅎㅎ 저희 각자 인욕품에서 배운 내용을 일상에서 실습해보고 다다음 토론 시간에 무엇이 어려웠는가를 함 이야기 나누어 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