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교 of 티베트> 시즌 3 다섯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작성일
2020-11-20 15:00
조회
192
린포체님의 온라인 명상회로 반장님과 선생님들이 안계셨지만, 불목한 민호샘의 안내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유명상을 20분간 했습니다. 명상을 끝내고 산띠데바의 <입보리행론>을 낭송한 후 채운샘께서 “불교에서의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어요.

살아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죽음을 동시적으로 겪어가며 살 수 있는 것일까요? 흔히 ‘죽음이 있어서 삶도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이면이다’ 라고 하지만 이것은 삶과 죽음을 같이 논하는 것이지 동시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나’, ‘자기’라는 주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이제껏 살아오던 방식으로는 삶과 죽음을 동시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일정한 형태를 이루는 신체를 가지고 ‘나’라는 의식과 함께 세계와 삶의 조건을 해석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동시성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 이르도록 수련해야 합니다. 생명은 생도 죽음도 아닌 생과 멸(사)의 동시적 활동입니다.

먼저 신체적인 생멸에 대해서 ‘세포자살’을 말씀하셨는데, 우리 몸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서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재밌는 것은 세포에도 타살과 자살이 있다고 합니다. 타살(necrosis)은 세포가 외적인 병균이나 충격으로 세포가 부풀어 터져 죽는 것이고, 자살(apoptosis)은 전체 생명 유지를 위해서 세포가 선택해서 죽어가는 것이죠. 세포자살은 반대로 쪼그라들면서 분해되어 다른 세포로 흡수된다고 해요. 자살세포의 작품이 손가락입니다. 태아의 주먹은 처음에는 주걱처럼 뭉툭한 모양이었다가 세포가 자살하면서 손가락의 형태가 갖춰진다고 합니다. 탄생에서부터 세포차원에는 자살(죽음)시스템이 내장되어 있었던 것이죠. 살아있다는 것은 줄곧 생의 차원을 영위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내가 살아있다고 느낀 것은 살아있음으로 반복해서 해석하고 있었던 뿐입니다. 몸 안에서는 수없이 많은 죽음과 탄생이 계속해서 거듭되고 있었던 것이죠. 지금도!   이 자살시스템이 망가진 세포가 암세포입니다. 죽음을 망각하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암세포처럼 죽음과 변화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생명에 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내 것으로 만드는 축척을 추구하고, 소유하지 못하면 못견뎌하는 것, 동일화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배척하는 일상의 파시즘은 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욕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의 본질적 차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까요? 채운샘께서는 거친 의식을 넘어선 미세한 차원의 의식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인간의 신체는 찰라의 명멸을 자각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움직임을 거친 의식으로 해석합니다. 공간의 이동을 시간의 흐름과 연결해서 생명을 연속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동시적인 출현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것에도 결과에 대한 원인을 추적해서 찾으면서 단선적 인과론으로 사건 전체를 소화하기에 급급합니다. 하지만 물질의 차원에서 원인과 결과는 시간의 선후를 따르지도 연속되어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물질의 차원에서는 다만 ‘동시적으로 명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경험적 차원의 개념일 뿐입니다. 불교의 전생은 이런 동시적 명멸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이 연속적일 뿐이지, 세계는 동시적으로 모든 곳에서 명멸의 형식으로 현존합니다. ‘나’라는 개체적 삶은 우주, 생명의 동시적 정보를 ‘나’라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 방식은 몸의 에너지가 완전히 해체될 때까지 찰라의 명멸로 거듭 깜박이고 있을 것입니다. 우주에 내재된 정보는 이미 모두 ‘나’에게 내재되어 있겠죠. 왜냐하면 그래야 우주적 정보를 해석하고 교류할 수 있으니까요. 공기를 호흡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생명의 흐름, 우주의 에너지와 정보를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해석하고 신호(정보)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각자의 생은 우주적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가의 모습 같습니다. 채운샘께서 ‘우주적 리듬’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대목에서 우주적 정보를 단순히 시간으로 뚝뚝 끊어서 이해하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화를 시간적으로 경험하고 해석하기에 바빴던 것이죠. 말하자면 우주적 리듬에 신체를 맞추는 것은 시간을 소화하는 방식과도 유사합니다. 이런 면에서 명상은 거친 의식으로 들떠있던 몸을 우주적 리듬에 맞추는 의식적인 수련일 것입니다. 미세의식은 ‘나’로 환원되지 않는 힘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바르도의 과정은 거친 의식의 해체의 과정이자 미세의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세의식의 차원은 주체도 대상도 없는 공의 상태, 열반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꾸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두려움과 애착입니다. 두려움과 애착으로 회귀하는 습관적 인식을 논리와 수련으로 돌파해야 합니다.

(매순간 물질적 차원에서 수없이 많은 찰라의 명멸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인데,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왜 연속적인 ‘나’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스러워졌다. 의식도 말하자면 뇌도 깜빡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인데, 여전히 명멸을 통합하는 지켜보고 있는 ‘의식’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미쳤다. 그러다가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에 관한 유튜브에서 이런 설명을 들었다. 상자 안 고양이는 수없이 많은 형태로 잠재적 변형 혹은 죽음이 있는데, 우리는 살아있는 혹은 죽은 고양이를 인식한 ‘나’로만 인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수많은 잠재적 변형 중에서 ‘나’만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수히 많은 잠재성 중에서 오직 여기서 살아있는 ‘나’만 살아있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에 살아있으니까. 양자물리학적으로는 다른 차원에 다른 방식으로 출현하는 ‘나’가 동시에 있을 수 있다. 부족하지만 뭔가를 움직이는 설명이었다.)

다음주 간식은 홍수경샘이 맡아 주셨습니다.  <입보리행론> 낭독과 <달라이 라마의 지혜 명상> 세미나를 준비해 오시면 됩니다.
전체 2

  • 2020-11-21 09:23
    와, 이리 심오한 내용의 강의를 들으신거였군요....!!! 설샘 덕분에 후기를 한 줄 한 줄 읽으며 공부합니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암세포처럼 죽음과 변화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생명에 반하는 것' 이라는 구절이 와닿습니다. 그러니까 축적과 소유, 변화를 거부하는 동일화의 욕망이란 마음에 자라는 암세포와도 같은 거겠군요. '나'로 똘똘뭉치고 굳어진 이 마음을 입보리행론을 읽으며 조금이라도 부수어가야 할텐데 말입니다.

  • 2020-11-21 19:53
    이번주 니체 시간에 읽은 클로소프스키의 말이 떠오르네요.
    "최초에는 명멸하는 기억뿐이다. 그 기억은 일상적 기호의 지시작용들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그 지시작용들은 변화하는 자극들에 따라서 개입하며, 우리의 상태의 불연속성 전체를 은폐하는 고유한 연쇄들을 가져온다."(<니체와 악순환>, 65쪽)
    불연속으로 명멸하는 물질적 차원의 변화에 연속성을 가장하는 것으로서의 의식. 그런 의식은 넓게는 유기체적인 오류이자 좁게는 자아의 동일성을 보유하려는 강한 습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자체로는 환영이지만. 그런데 질문하신대로, 왜 그런 패턴이 굳어졌는지,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