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2회차 후기

작성자
임길례
작성일
2021-03-08 15:42
조회
163
 

<불티모아> 341학기 두 번째 세미나 후기/ 임길례

먼저 반장님의 차분한 목소리로 30분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는 ‘알아차림’ 또는 '마음 챙김' 이라는 명상을 했습니다.

알아차림은 우리가 흔히 손을 들면 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길을 건널 때 신호등을 인식하고 건너가는 것. 이것이 일상적 알아차림입니다. 매번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또 다른 알아차림은 ‘열린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지금 여기에 안주하면서 오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림 합니다. 모든 감각을 열고 생각과 감정들이 자유롭게 오가도록 그냥 둡니다. 대상에 머물면 머무는 대로 알아차리고 모든 감각을 열고 그냥 편히 쉬는 것입니다.

린포체께서는 명상의 본질은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참된 본성의 일부인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지혜, 무한한 순수성을 체험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떠나 다른 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성품들은 지금 이 순간을 말고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냥 잠시 멈춰서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늘 있었음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명상의 핵심은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거나, 파괴적인 습관을 없애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명상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자신의 타고난 좋은 성품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배우고, 알아차림이 존재의 중심으로 스며들 때까지 배양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알아차림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은 거친 알아차림이며, 미세한 흐름의 감각과 생각, 감정들은 놓치거나 거기에 휩쓸려 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명상의 핵심이 알아차림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종교와 철학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불교의 진리가 어느 날 갑자기 계시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도라는 거대한 문명이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된 사유 안에서 새롭게 사유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 철학의 배경을 아는 것이 불교의 사유를 아는 배경이 된다.

인도에서의 철학(다르샤나)이란 인간과 우주에 대한 논리적이고 지적인 이해만이 아니라, 의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현상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구원(해탈)을 실현하려는 종교적 열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샘은 종교와 철학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질문하시면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시면서 인도 철학과 서양 철학의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인도에서는 종교와 철학이 같은 연원에서 시작되어 상호 협동적 관계를 지속해 왔다. 그러므로 인도에서는 철학과 종교가 개념적으로 구분은 되어도 실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었다.

서양의 중세철학에서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학>에서 보면 철학의 기독교의 시녀 노릇을 하였다. 신학이 자기 스스로 종교를 철학 화해버린 것이다. 이 시기 철학이라는 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종교상의 문제들과 관련된 논쟁들을 해결하는 쪽으로 사용되었다.

스피노자는 신앙으로부터 철학을 분리하려고 했고, <신학정치론>의 주제는 결코 신앙은 철학이 될 수 없다! 라고 선언했다. 신앙적 삶이 목표로 하는 것은 경건한 삶, 올바른 삶이며, 교회를 다니는 이유도 신의 말씀을 따르고 그것을 올바로 실천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철학은 전혀 다르다. 신이 만들어 놓은 삶에 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나는 신앙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신앙이 철학 인체 하는 것에 반대한다. 스피노자 시대 자체가 중세철학으로부터 변환이 시작되었던 시기이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시대가 아니니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근대철학을 기점으로 해서 (‘데카르트적 순간’이라고 유머러스하게 명명함) 철학이 갖는 특성은 철학에서 영성의 주제가 사라졌다. 우리의 영성은 종교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푸코의 연구에 따르면 철학은 합리적이고 이성적 사유의 영역이고 vs 종교는 신비한 영역, 계시와 연관된 것으로 보았다. 푸코는 영성이란 ‘자기와의 관계를 비롯해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의 변환을’ 위한 자기 훈련이라고 말한다. 영성이란 신비한 것이 아닌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세상은 원자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원자론자이다. 원자가 결합하여 물질이 만들어지듯이 산다는 것은 원자의 결합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삶을 기뻐할 것도, 죽음을 슬퍼할 것도 없다. 세계는 원자의 결합과 해체를 부단히 반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의 본성을 이해하는 자는 탐욕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원자가 결합하는 동안만 우연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집착할 필요가 없게 된다. 사물의 본성에 대한 궁극적 이해가 우리의 잘못된 표상을 넘어가는 것이며, 우리의 두려움과 탐욕적 표상에서 벗어나는 훈련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너무나 많은 망상을 해체하는 훈련이 바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서양철학과 비교해 볼 때 인도 철학의 또 다른 특성은 인물보다 학파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진리라는 것이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문화와 문명의 접속과 변형으로부터 형성된 것이고, 그 속에서 발생한 진리도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니까 본래 있던 진리이고, 이미 선각자들에 의해 발견된 것을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다시 설명하는 것이 철학자의 일이다.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철학서는 선대나 스승들의 저작에 대한 주석의 형태가 많다. 이러한 주석들의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학파들간에 대론과 논쟁을 통해서 발전되어 왔다.  불교와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앎을 부단히 반추하고 반성하면서 관계 속에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유학은 우주의 변화에 대한, 내가 알 수 없는 우주의 오묘한 현상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합니다. 제사를 강조하는 것도 그 연장선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작용들(귀신이라고 통칭)에 대한 경외감도 잊지 않고 살아간다.  이렇게 할 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들과의 관계가 하나로 응축되어 죽은 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살아있는 자들에게 예를 갖추며 살게 된다.

영성의 문제도 어떤 존재가 만물과의 연관성 속에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이러한 인식의 기저에 깔려 있다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모든 것과의 연관성 속에서 내가 있다고 하면, 관계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가 분명해진다.

샘은 종교와 철학은 구분이 될까요? 종교적인 것이 따로 있을까요? 그럼 불교의 종교성이란 뭘까요 부처님을 믿는 것인가요? 아니면 불교의 예식을 믿는 것일까요? 라고 질문을 던지셨다. 그러시면서 달라이라마께서 종교적인 삶이 의식을 행하는 걸로 이해하실까요? 종교의 특징에 의식이 있기는 하지만, 종교가 의식 제례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식과 제례만이 아니라면 종교의 영성을 찾는 것인데, 영성이라는 것은 뭘까요? 힌두교에서는 종교적인 핵심 안에 철학이 있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로 철학 하지 않고, 믿는 것이 가능한가요? 철학 하지 않고 창조주 하느님이 우리를 만들었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이런 믿음은 자기 스스로 지혜를 연마해가는 과정이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양은 종교와 철학의 분리가 없다. 서양은 종교의 시대였기 때문에 근대에 와서야 철학이 종교에서 분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쇼펜하우어도 철학을 종교적인 것과 연관시켰다. 동양은 애초부터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지 않았다. 종교가 지배한 적이 없었고, 애초에 종교성을 띠지도 않았다. 인도 철학은 독특하게 종교와 철학이 분리된 학파도 있고, 이것을 분리하지 않은 학파도 동시에 공존한다. 그러나 불교는 종교성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철학이다.

육파 철학중에 무파인 불교와 자이나교의 차이점

인도 철학은 크게 힌두 철학, 불교 철학, 자이나교 철학으로 3분 된다. 힌두 철학은 베다를 인정하는 有派 학파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無派 학파가 있다. 베다를 인정하는 6파 철학은, 바이셰시까파(승론), 니야야파(정리론), 상캬파(수론), 요가파, 미망사파, 베단따파, 이들은 한 짝을 이루며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이러한 사상적 체계가 이어져 오면서 그것에 반기를 드는 無派 학파가 생긴다. 이것이 불교, 자이나교, 짜르와까교 이다. 불교의 사상적 기반이 이러한 힌두교 베다 경전의 다양한 학파 중에서 무파라는 새로운 사유의 시작점에 있었다는 것이다.

힌두 철학의 핵심적 교리는 4가지가 있습니다. 1)행위(業), 업과 윤리, 2)아트만과 브라흐만의 동일성, 일원론, 3) 범아일여를 통한 해탈의 문제, 4) 해탈에 이르는 수행으로써의 요가, 공통적인 4가지를 두고 이것을 해석하고 강조하는 점이 유파와 무파가 달랐다. 불교의 발전은 브라만교와 자이나교의 논쟁 속에서 발전하게 된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유사한 점도 있지만, 사유하는 해석이 다르다. 그래서 초기 경전에 보면 자이나교와 불교가 많은 부분 논쟁하는 것이 기술된다.

가르침의 내용은 삶은 생사의 끝없는 순환이며, 윤회의 원인은 업이고, 고행하는 이유는 삶의 순환인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건 업의 소멸에 있고, 세세한 내용은 불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자이나교도들은 업을 일종의 미세한 물질로 보고, 이 물질이 내 몸에 달라붙어 있어서 그 결과 영혼에 업이 저장된다고 보았다. 윤회를 계속하다 보면, 업의 찌꺼기가 계속 축적된다고 해석했다. 불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이나교는 영혼과 실체를 나누어 놓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신, 구, 의 중에 몸의 업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미세한 업들이 몸에 달라붙어 있다고 봄으로 몸을 혹사하는 고행을 해야 했다. 이 물질적인 것을 끊어내지 못하면 계속 윤회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까르마(업)는 물질 중에서도 가장 미묘한 물질이라 보고, 욕망과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끈적끈적하게 되어서 까르마가 영혼을 덮거나 영혼 안으로 침투한다. 그러면 죽어서 영혼이 날아가지 못하고 그 끈끈한 업을 받아서 다시 태어난다. 업이 많은 영혼일수록 아래에 가라앉아서 지옥에 태어나고, 반대인 경우 천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이 업을 떨어내기 위해서 극도의 고행을 해야 한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다른 점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될 수 있는가? 과연 업이 물질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영혼이 그 자체로 영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쟁했다. 영혼의 실재한다는 자이나교와 영혼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불교의 견해가 대립하였다. 이들은 스스로가 업을 떨쳐내는 훈련이 중요하다고 보고, 살아있는 동안 극도의 고행을 통해 몸에 새겨진 업을 떨쳐내려고 수행했다.

육파 철학의 실재에 대한 이해

승론, 정리학파, 샹캬(수론), 요가학파는 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학파다. 승론이 자연학, 형이상학 즉 존재론을 주제로 삼는 대신 정리학파는 인식론, 논리학을 주제로 삼는다. 승론, 정리학파는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사고에 가장 가까운 철학이다. 인간이 공통으로 경험된 인식이, 세계와 실재를 이해하는 기본자료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경험(인식)의 내용, 혹은 대상을 분석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세계란 인식하건 안 하건 인식에 앞서 그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인식은 그러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때 바른 인식이며, 곧 진리가 된다. 인식과 존재는 이처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인식이란 곧 대상을 조명하고, 존재는 곧 인식의 내용이며 대상이다. 승론학파는 복합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공통된 특성에 따라 분석하고 구분하여, 더 이상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범주까지 분석하는 철학이다.

인식이란 무엇인가? 올바르게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오류는 무엇이지? 실재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도달하고자 하는 갈망. 우리의 인식은 언어다. 그래서 언어를 분석해서 그 언어가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가를 추적해 우리가 실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는것.  그 인식에 모순이 있으면 올바른 인식이 아니다. 이렇게 논리로 파고들어 남김없이 분석해 보겠다는 것이  철학이다.

정리학파와 승론학파는 결과(dharma)의 바탕에서 원인(dharmin)의 존재를 인정하나 그 양자를 본질에서는 서로 다른 것이라고 본다. 이 학파에서는 결과는 원인 가운데 없는 새로운 것이 발생이라는 인중무과설(因中無果設), 즉 창조설을 주장한다. 반면 상캬학파에서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결과는 원인 속에 이미 잠재되어있는 것이 현현이며 변형에 불과하다는 인중유과설(因中有果設), 혹은 전변설을 주장한다. 힌두 철학은 원인과 결과의 양자 구분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도 있지만, 이 양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 가는 견해가 다르다.

인과를 따진다는 것은 내가 귤을 먹는다고 할 때 여기서 인과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귤이 있어서 먹는 것이냐, 내가 있어서 귤이 먹히는 것이냐? 이 둘은 다르다. 이런 식의 언어 분석은 능동과 수동을 나누며 어떤 것을 원인과 결과로 볼 것인가이다. 중론에서도 인과에 대한 독특한 자기 이해가 있다. 이런 논리들이 복잡하다고 패스하지 말고 논리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힌두 철학의 절정인 베단타학파는 항상 그렇게 있는 것이 실재는 브라흐만뿐이다. 컵, 아지랑이 등과 같은 것들은 가짜 마야라고 말한다. 불교는 ‘실재’ 이런 거 없다. 그렇다고 ‘보이는 건 가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보이는 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지 그게 가짜인 것은 아니다. 이 지점이 불교와 승론, 상카학파의 논쟁지점이다. 베단타와 불교가 다른 점은 불교에는 이원론이 없다. 불교에서는 궁극적 세계와 현상적 세계가 둘이 아니다.

승론학파는 인간의 다양하고 공통된 경험내용을 분석할 결과 7가지 범주로 나눈다. 실체, 속성, 운동, 보편, 특수, 내속, 비존재 등이다. 실체는 속성과 운동의 기체로 정의되며 그것이 없이는 속성과 운동도 존재할 수 없다. 실체는 다시 지, 수, 화, 풍, 空, 時, 方, 아뜨만(我), 마나스(意), 의 9가지로 분류된다. 실체는 여러 가지 결과들의 원인이며, 속성이 정적이고 비교적 영속적인 성질이라면, 운동(까르마)는 가변적이고 비영속적인 성질이다.

기원전 6-7세기 우파니샤드가 정리되면서 힌두 철학의 발달로 논리학의 집대성 된다. 불교가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불교도 이 시기에 논리학이 메카라고 부르는 나날다 대학이 설립되면서 논리학이 발달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논리학의 대학자(찬드라키르, 다르마티르티)들의 논서가 티베트 불교를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반대로 서양은 중세를 거쳐오면서 논리학이 발달하지 않았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분석 철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중국은 논리학이 없지 않지만 크게 발달하지는 못했다. 불교조차도 중국으로 넘어가서 선종화 되어 버려서 지적인 담론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리학의 맥이 끊어진 경향이 있다.

불교에서 인식론은 유식이라는 식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으로 발달한다. 이러한 인식론을 집대성한 것이 유식이다. 우리가 안다는 것의 구조는 무엇인지. 식이 마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세부적으로 구분한다. 힌두 철학은 실재론이다. 궁극적인 무엇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이다. 그러나 불교는 무엇이 ‘있다’ 라는 전제를 의심하면서 6파 철학과 대척점을 이룬다. 중론에서 나가르주나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싸우는가를 볼 때 이렇게 오랫동안 축적된 인도의 논리 구조를 알아야 한다. <중론>에서 나가르주나는 인과를 바라보는 것, 현상과 실재를 바라보는 방식, 영혼과 물, 등을 하나하나 품마다 건드리고 있다.

구원의 문제

상캬체계의 목적은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설명보다, 실존의 불만과 苦(불안)의 원인을 밝힘으로써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종교적 구원에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순수의식인 참 자아가 있는데, 인간의 무지로 인해 의식이 없는 비자아의 변형인 육신, 감관, 意, 등을 참 자아와 동일시하여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속박과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요가철학은 상캬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이론적 바탕으로 삼는 학파이다. 이들은 내적인 것이 외적 실재의 근원이며, 궁극적 진리의 실현이란 인간 내면의 최심저에 있는 아뜨만(초월적 자아, 뿌루샤, 참자아)의 실현이라고 믿기에 불교와 같이 마음의 심층적 분석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요가학파도에서도 불교의 팔정도처럼 이와 비견되는 8가지 요가가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번뇌를 정화하여 자기 구원에 이른다. 야마요가, 니야마, 아사나, 쁘라나야마, 쁘라띠아하라, 드하라나, 드흐야나, 사마드히의 8가지 요가는 단계적으로 자기 구원에 이르는 수행이다.

우리가 구원이나 해탈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구원받고 싶어 한다. 구원이 뭔가? 구원이 ‘행복’인가? 서양 철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전에 내려오던 철학자들의 단편적 사유를 종합해서 핵심적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행복한 삶에 이를 것인가?” 근대어로 행복이란 의미는 원래 원어는 ‘에우다이모니아’ 좋은 정념, 우리는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가? 또 우리는 어떻게 잘 준재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이게 말하자면 구원이다. 플라톤도 구원과 전향이라는 말을 썼다. 이게 기독교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플라톤에게 구원이 되려면 누군가에게 계시를 받는 게 아니라, 내가 보는 게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는 것 자체가 전향이다. 플라톤에게 전향은 자기가 사는 삶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들은 그림자가 세상인 줄 알고 살아가는데, 어떤 선각자가 이 그림자가 진짜가 아닐지도 몰라! 하고 의심을 하며 고개를 돌려 빛을 본다. 그럼 저 밖에 뭐가 있는 거 같아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깜깜한 동굴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가면 눈이 부셔서 고난을 겪는다. 이런 고난을 겪고 내가 본 건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2차 시련을 겪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알게 된 것을 동굴로 되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지만, 사람들은 이 자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탄압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는 예수의 고난의 이미지가 있다. 여기서 선각자는 소크라테스. 선각자는 먼저 깨닫고 배우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서양에서 구원이란 유일신교인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능동적 자기 인식활동”이 있었다. 기독교는 이것을 신에 의한 구원의 문제로 바꾸어 버렸다. 신을 모르던 사람이 신을 바라보기만 해도, 전향의 의미가 되어, 구원의 의미가 ‘신에 의한 구원’으로 바뀌었다.

인도 철학의 핵심은 자기 구원이다. 윤회와 해탈에서 해탈은 자기에 의한 해탈이다. 요가도 자신이 스스로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그래서 그런 수행법들이 발달했다. 고대 철학에도 수행법이 있었다. 수행법이 없는 것은 근대철학뿐이다. 데카르트, 막스를 아무리 봐도 자기 자신의 삶의 변환을 통해 다른 삶에 이를 것인가라는 수행의 문제가 없다. 오직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생각이 근대를 지배하고 문명을 지배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들을 의심하는 지점에 와 있다.

베단따 철학과 우파니샤드

베단따 = 우파니샤드는 6파 철학 중에 종교적으로 가장 풍부하고 심오한 내용을 가진 학파로서 힌두교의 철학적, 신학적 토대를 이룬 철학이다. ‘베단따’ 라는 말은 문헌적인 면에서 가장 오래된 힌두 성전인 베다의 끝부분을 차지하는 우파니샤드를 가리킨다. 내용적으로 보면 베다의 궁극적(최종적) 목적을 뜻한다.베단따는 아뜨만(초월적자아)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우파니사드를 베다의 참다운 목적으로 보고, 그 내용을 해석하고 체계화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성립된 학파이다.

브라흐만=아뜨만=범아일여, 참다운 실재인 브라흐만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아무런 속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감각이나 개념적 사고로 파악할 수 없다. 시, 공간 인과성에 속하지도 않으며, 어떠한 개념이나 범주로도 규정지를 수 없다. 인간이 의식에서는 無와 같은 그 무엇이다. 그러나 브라흐만 자체는 결코 無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충만이자 순수의식이며 영적 희열로 체험되는 그 무엇이다. 그러면 어떻게 여기에 도달할 것인가? 인간 내면 깊이 가려져 있는 참 자아 즉 아뜨만이 바로 브라흐만이며 이것을 아는 것이 도달인 것이 된다. 그러니까 브라흐만은 남김없이 우주를 채우고 있는 충만함이며 그 자체가 희열이다.

불교에서 無我는 내가 없다가 아니다. 이 논리는 조금만 지력을 사용하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아의 느낌을 체험적으로 안다는 건 뭘까? ‘나라고 하는 것이 없구나’ 라고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사건들 속에서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라는 단독자로서 무언가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상호작용하여 경험된 것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경험에 갇힌다. 내가 아프면 아픈 거야, 다른 사람이 겪는 걸 보더라도 확장되는 게 아니라 내가 그걸 겪으면 얼마나 아플까이다. 이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도 공감이라면 공감이고 확장이라면 확장인데, 나라는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걸 벗어나서 전 존재의 경험 차원에서 이해되는 지점까지 가야 한다. 그게 불교를 이해하고 공부하고 깨닫는 데 관건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는 범은 브라흐만이고 아는 아뜨만(참자아)이다. 그래서 이 둘이 일치가 인간 지성의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본다. 불교의 선정을 범아일여와 동일시하면 안된다. 범아일여는 자신과 자신이 포함된 세상 전체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월자(범)에 대한 열린 이해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교는 초월적 어떤 대상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확장되는 쪽으로 간다. 불교에서 진아, 참된 나라는 말을 단편적으로 쓰기도 한다. 참된 나를 실체적인 의미로 쓴 것은 아니다. 불교는 현상계를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게 아니라,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 위해 고집멸도를 닦는 수행을 한다. 불교가 갖는 일상적인 삶에서 현세를 긍정한다는 것은 엄청난 지혜를 통해서만 긍정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내용이 방대하여 어쩔 수 없이 길어졌습니다. 죄송^~^)

 
전체 2

  • 2021-03-09 12:14
    오마나! 이 많은 내용을 정리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길샘! ^^
    저는 강의 듣고 공부하면서 인도 철학이 전반적으로 논리를 대단히 중요시하며 내용을 세세하게 나누어 구체적인 수행법까지 제시한다는 점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불교가 이러한 사상사적 바탕위에서 등장해 다른 철학들과의 논쟁 속에서 발달해갔다는 점도 흥미롭고요. 다음 시간 불교의 등장에 대한 강의가 기대됩니다~ ^○^

  • 2021-03-09 23:58
    영성에 대한 부분은 수업 시간에도 아!! 했었는데 후기 읽으며 다시 아!! 합니다... 
    ''존재들은 만물과의 연관성 속에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푸코는 영성을 자기와의 관계를 비롯해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 변환을 위한 자기 훈련이다'' 
    ^^ 수업후기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