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2학기 네 번째 시간(5.14)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5-11 11:14
조회
76
저는 이번 주 채운샘 강의에서 ‘배려’에 관해 말씀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더 도덕적인 인간들이 되었을까요? 그렇게 보이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소위 인권 감수성이나 성인지 감수성이라 불리는 것들이 높아졌습니다. 과거에는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가령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던 차별적 언어사용)이 폭력으로 인식되고 공적으로 문제화되고 있습니다.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점점 더 섬세한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초면에 나이와 직업을 묻지 않는 것, 나이가 어리다고 반말하지 않는 것, (칭찬이라도) 상대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점점 기본적인 예의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배려하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의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채운샘 말씀처럼 여기에는 무언가 타산적인 데가 있습니다. 채운샘은 이러한 배려에 서비스적인 관점이 전제되어 있지 않느냐고 지적하셨죠.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고객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법입니다. 그렇다보니 여기엔 상대를 은근히 얕잡아보는 시선이 은폐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배려하고 맞춰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쾌적함과 대접받는 느낌을 주면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리라는 계산.

저는 종종 고객으로서 서비스를 받는 것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주는 게 아직도 좀 어색하고(물론 빡빡이라 미용실에 갈 일이 없는 요즘이지만), 너무 친절한 태도는 부담스럽습니다. 이 불편함은 서비스가 저를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서비스를 받는 동안에는 제가 스스로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조심히 배려되어야 할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취약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배려에도 타인을 무력화시키는 데가 있지 않을까요? 배려는 타인을 선을 넘는 질문 하나에 기분이 상할 수 있는, 언제나 누군가의 보살핌을 결여하고 있는 존재로 만듭니다. 이런 질문이 듭니다. 도대체 ‘잘 해준다는 것’이 타자에 대한 윤리일 수 있는가?

‘존재의 기술’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점점 더 도덕적으로 되어 온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n개의 적절함이 발명되어야 할 다종다양한 관계들을 과잉된 배려로 뭉뚱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더 섬세해진 것이 아니라 관계로부터 울퉁불퉁한 모든 것들을 소거함으로써 점점 더 둔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 다른 맥락일 수 있지만) 고대인들에게 양생은 “수많은 가능한 상황에 대해 개인을 무장”(165쪽)시키기 위한 실천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육체와의 관계라는 이러한 문제는 다른 인간들과 관계하는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일요일 세미나에서 읽고 있는 《명상록》을 보면 스토아 철학자이자 로마의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는 아첨하는 사람이나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단단한 중심을 갖는 것을 타인과 관계하기 위한 윤리-기술의 핵심으로 여겼습니다. 말하자면 여기에서는, 타인의 배려/배려 없음에 휘둘리지 않는 굳건하고도 유연한 몸과 마음을 갖는 것, 그것들을 가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연마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타자에 대한 윤리의 중심에도 역시 자기 자신과의 관계, 존재의 기술이 놓여 있는 것이죠. 물론 이것을 현재 우리의 조건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자기중심을 갖기 위한 아무런 훈련도 없이 타인을 배려한다는 것이 공허하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배려는 오히려 타인을 적절히 배려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합니다. 미덕은 순수한(이타적인) 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에 있다는 것.

다음시간에는 <쾌락의 활용> 3장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경혜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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