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2학기 여섯 번째 시간(5.28)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5-24 12:43
조회
76
고대 그리스는 ‘동성애’를 ‘포용’한 사회일까요? 이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우선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 간의 사랑이 금기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동성애’라는 특권적 범주가 없었으며 억압하거나 관용해야 할 보편적 경험으로서의 동성애 같은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틀린 진술입니다. 그리스인들은 단지 인간에게는 (그 대상의 성별과 무관하게)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끌림 같은 것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이성에 대한 사랑과 동성에 대한 사랑이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거기서 두 종류의 ‘욕망’을 식별해내지도 못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는 지점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얼마나 정상적이고 규범에 맞는 관계를 맺는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자신의 쾌락을 절제하는가 아니면 쾌락에 자신을 내어줘버리는가 하는 것이 도덕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토론 중에는 ‘소년의 명예’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특별히 ‘문제적’으로 여겨졌던 것은 자유민 소년과 자유민 성인 남성 사이의 연애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적으로 여겨졌던 것은 거기에서 어떤 범죄성이나 비정상성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두 당사자들 사이의 (신분과 연령상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위험을 수반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소년애’가 ‘문제’가 되는데, 여기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 관계 안에서 소년들이 더욱 적극적인 도덕의 주체로 간주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민 소년들은 ‘아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성장의 완전함이라는 관점에서만 성인들과 구별되며, 장차 타인들을 통치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자기 자신을 지배하기 위한 훈련을 요청 받는 존재들이었죠. 사랑받는 자인 이들은 사랑하는 자(성인 남성)와의 관계에서 ‘명예’를 지킬 것을 요청받습니다. 이들은 추종자들을 그저 완고히 거부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것도 아닌 방식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신중하고 능동적으로 상대를 선별하는 자신의 판별력을 통해 스스로의 명예를 입증했습니다.

‘소년의 명예’와 관련하여 우리는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젊은이들을 찬양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올바른 행실을 권고하고자 했던 데모스테네스의 《연애술》에서 “내내 문제되는 것은 아이스퀴네aischune, 즉 수치심”(302쪽)이었습니다. 이 수치심이란 불명예를 피하려는 감정이자 사람들에게 낙인찍힐 수도 있는 불명예이기도 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어떤 순간에 수치심을 느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했을 때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지배를 상실했다고 느낄 때 수치심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늘 중요 했던 것이 ‘자기 지배’의 문제이며, ‘소년의 명예’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소년 자신이 스스로를 지배하고 절제함으로써 타인들에게서 승리를 거두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양도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으며 가장 강한 자로 남아 있는 것, 또 그의 저항력, 단호함, 절제에 의해 추종자들과 애인들을 능가하는 것, 이것이 청년이 사랑의 영역에서 그의 가치를 입증하는 방법”(311쪽)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수치심을 느끼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수치심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 달까요. 가령 유튜버들은 악플 하나하나에 상처를 받지만, 자신이 타인의 시선과 관심에 의존하고 있고 인기를 구걸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서는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낄지 몰라도, 자기 자신의 실존을 방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신의 삶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시간을 경제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느끼겠지만요. 이러한 죄책감과 수치심의 차이는, 죄책감이 어떤 이상이나 규범이나 당위에 비추어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을 폄하하고 무력화하는 것이라면, 수치심은 이런 방식으로 일방적인 지배하에 놓이도록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고 ‘삶의 새로운 짜임’(스피노자)을 실험하려는 의지와 연관됩니다. 어쩌면 수치심이 작동하는 관계와 윤리를 발명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시간에는 《쾌락의 활용》을 끝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채운샘 강의가 있을 예정이구요, 간식은 청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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