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2학기 일곱 번째 시간(6.11)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6-04 13:55
조회
112
시간이 참 빠르죠? 《성의 역사》 1권을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권을 펼쳐들고 있네요! 저희는 한 주를 쉬고 다음 주부터 다시 《성의 역사》3권에 돌입합니다. 첫 주에는 우선 1장을 읽고 각자의 질문이 담아 텍스트를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희수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자, 잠시 《성의 역사》 1권의 문제의식을 복기해볼까요? 1권에서 푸코는 근대인들의 ‘욕망의 해석학’을 분석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푸코가 넘어가고자 했던 것은 ‘억압’ VS ‘욕망’의 구도였죠. 욕망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욕망하거나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것을 자유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욕망의 배후에 욕망하는 주체를 상정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을 제약하는 동시에 구성하는 조건을 분리시키게 되죠. 부단히 발생하는 욕망이 나의 것이라면, 그것에 한계를 부여하는 외부적 조건은 곧 ‘억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금지하고 억압하고 질서를 내면화시키는 ‘사회’와 쪼갤 수 없는 원자와도 같은 욕망과 이해관계를 탑재하고 있는 ‘개인’ 사이의 대립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우리는 사회로부터 부여된 의무와 나의 진짜 욕망을 구분하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 바깥에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 어떤 제약이나 한계도 없이 나의 욕망대로 실현되는 삶, 그러한 세계를 갈망하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욕망이라는 것이 실체화된다는 점입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의식하지만 자신이 그러한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욕구의 원인이 아닙니다. 욕구는 특정한 조건 속에서, 어떠어떠한 마주침들 속에서 발생하는 중에 있죠. 그런데도, 우리는 욕구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믿어버립니다. 관계들 속에서 생산되고 있는 욕구들, 그러한 욕구들을 발생시키는 관계들에 주목하기보다는 ‘욕구하는 나’에 집중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는 그 욕구가 도덕적인지를 따지며 욕구의 주체를 심판하거나, 욕구의 실현을 위한 수단들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거나, 욕구를 좌절시킨 외부 원인을 문제 삼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욕망의 해석학’의 방식입니다. 욕망을 그것을 발생시킨 조건과 분리시킨 뒤 그것의 정상, 비정상을 따지거나 선, 악의 규정을 부과하는 방식.

푸코가 문제라고 느낀 것은, ‘욕망의 해석학’에 의존하는 한 ‘주체의 자기 변형’의 여지가 없어진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하에서 소비자는 권리 상 자유롭지만 소비자라는 지위 자체로부터 빠져나갈 여지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간택을 기다리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 놓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가 명령하는 대로 얼마든 자유롭게 변덕을 부릴 수 있죠. 그러나 그는 선택지 자체로부터 떠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들과의 관계에서 충동질당하는 욕구와 자본의 회로에 따라 흘러가는 욕망을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동일시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소비자는 권리 상으로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누구보다 잘 길들여집니다.

푸코가 고민했던 것은 저항과 자유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를 매우 세밀하게 개별적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인구의 흐름으로서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근대적 통치의 메커니즘과 어떻게 다른 관계를 맺어볼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실체화된 욕망을, 주체를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보게 만드는 욕망이라는 소실점을 해체할 필요를 느낀 것이죠. 이러한 맥락 속에서 푸코는 《성의 역사》 1권에서 성(sexuality)이 관념적 실체임을 보여주었고, 2권에서는 고대로 돌아가 자신의 욕망과 다르게 관계 맺을 가능성을 탐색했습니다.

고대에는 ‘나는 욕망한다’라거나 ‘금지된 것일수록 욕망도 커진다’ 같은 전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욕망이란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욕망의 주체에게 귀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욕망의 주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겠죠. 왜냐하면 이들에게 욕망이란 특정한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주체의 행위 속에서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체는 욕망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욕망과 맺는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행복이란 욕망을 무한히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최상의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욕망을 해석하려하지 않고 쾌락을 어떻게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설정으로부터 자기 연마라는 차원이 제기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욕구와 적절한 관계를 맺기라는 과제는 금기를 내면화하고 코드를 습득하는 것으로는 수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기술은 자기만의 균형을 발명하고 유지하기 위한 실험과 수련을 요청합니다.

자기변형이라는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게 하는 개념입니다. 이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새장에 갇힌 새는 왜 불행할까요? 우리는 그 새가 자유를 빼앗겼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 새는 자기변형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예속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그 새가 더 넓은 새장에서 더 많은 풍요를 보장받는다고 해도 그 지위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을 자신의 자유와 예속으로, 또 행복과 불행으로 여길 것인가? 푸코가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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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7 13:09
    욕망의 해석학 / 쾌락의 활용 이라는 렌즈 덕분에 사고의 '고행'이 즐겁습니다. 푸코 보살의 논의를 명쾌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시는 채운쌤과 건화쌤께도 감사합니다. 이번 후기는 정말 잘 읽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