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백투고] 7주차(4.29)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4-26 15:06
조회
68
이번 주에는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멜리소스의 단편들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첫 시간에 읽었던 《서양철학사》에 짧게 정리된 여러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유를 더 가까이 접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분류하자면, 세계를 근원을 수라고 생각했던 피타고라스학파와 근원은 불이며 생성변화하는 것이 세계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했던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존재하는 것(being)과 되어가는 것(becoming)을 엄격하게 구분하며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엘레아 학파(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멜리소스)의 사상을 접해볼 수 있었네요.

피에르 아도의 책에서 보았듯이 피타고라스 학파는 매우 엄격하고 비교(秘敎)적이기까지 한 집단이었습니다. 처음 학파에 들어온 구성원들은 몇 년 동안 묵언수행을 해야 했다거나, 콩이 고기를 먹지 못하는 엄격한 금기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텍스트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처음으로 철학(philosophia)을 바로 이 용어로 불렀으며, ‘수들’과 ‘이들 사이의 비례관계(symmetria)’―이것들을 그는 화성(harmonia)들이라고도 부른다―그리고 그 둘로 이루어진 원소(stoicheion)들, 이른바 기하학적인 것[도형]들(geometrika)을 원리(arche)들이라고”(187쪽)했습니다. 세계의 근원은 수학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쉽게 세계를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으로 보는 근대적 사고방식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군나르 시르베크와 닐스 길리에에 따르면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합리주의적인 신비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숫자란 유물론적 원리가 아니라 신비주의적 원리였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들에게 수학적 구조는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고 변하지 않는 보다 고차원적인 실재였고, 우리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변화무쌍한 세계는 불확실하고 비실재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세계의 수학적 질서를 인식하는 것은 변화하는 세계에 휩쓸리지 않고 어떤 불변적인 진리의 차원을 명상하는 일이었던 것이죠. 이런 생각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하는 ‘축제’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삶을 축제에 비유하며 누군가는 시합을 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장사를 하기 위해 축제에 참여하지만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구경하는 사람들로서 축제에 참석한다고 말합니다.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세속적 삶과 거리를 두고 세계의 수학적 본질을 관조하는 것. 이들의 합리적 세계관은 가장 관조적이고 신비스러운 삶의 선택과 연관됩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알레아학파(파르메니데스)의 대조적인 사유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양쪽 모두는 ‘감각’을 부정했는데,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각이 세계를 고정된 것으로 출현시킨다는 점에서 감각을 부정했고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이 변화를 증언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있다’는 게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봤습니다. 우리는 온갖 것들에 영향을 받고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하나의 흐름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흐름들 가운데 무엇을, 어떤 순간을 ‘나’라고 지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데 그렇다면 매순간 달라지는 강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강’의 존재를 무엇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요? 헤라클레이토스식 해법은 세계를 전쟁으로 어린아이의 놀이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불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파르메니데스를 비롯한 엘레아 학파의 대답은 변화와 운동을 감각의 오류로 간주하고 고정불변하는 존재가 감각의 세계 너머에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냐 생성이냐. 저는 둘 모두가 경험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존재와 생성에 대한 사유를 시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생성과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임을 깊이 명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관점으로 모든 것을 고정시키는 경험적 사고를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처럼 ‘있음’에 대한 사유를 극단까지 몰고 가면 감각적인 세계에 휩쓸리지 않고 고정불변하는 존재의 차원을 중심에 놓고 평정한 삶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공지에도 말했지만 역시 파편적인 구절들을 가지고 고대 철학자들의 사유를 접하는 것은 힘에 부친 일입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렇게 2,500년 넘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사유를 직접 접해볼 기회가 흔치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렵고 손에 잡히지 않는 공부지만! 일단 계속 읽어나가 봅시다! 도움을 받고 싶으실 때에는 첫 시간에 읽었던 군나르 시르베크와 닐스 길리에의 《서양철학사》를 다시 참고해보셔도 좋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뒷부분에 역자가 달아 놓은 해제를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이번 주에는 ‘필롤라오스와 기원전 5세기 피타고라스주의자들’(~486쪽)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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