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숙제방

장자 시즌2 1주차 메모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6-18 08:56
조회
33
  1. 6. 18 금요일 / 장자 시즌2 1주차 메모 / 박규창


 

탈중심화의 계열 장자의 사유가 정치적인 이유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공자가 개탄했던 ‘도(道)가 땅에 떨어진 시대’보다 더욱 참혹했다. 공자를 기점으로 많은 사(士)들이 도를 회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농사와 노동을 중요시하는 학파, 반전을 위해 수성(守城)을 실천하는 학파, 예와 문화의 회복을 주장하는 학파 등등이 있었다. 주장하는 바는 다양했지만, 이들은 특정한 질서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한 데 묶을 수 있겠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질서의 회복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원인이라고 비판하는 쪽도 있었다. 장자를 비롯한 은둔자들(도가쪽 인물들)이 이쪽이다. 장자가 보기에, 처벌해야 할 흉악한 죄수는 본받아야 할 도덕적 성인과 함께 등장했다. 본받아 살아야 할 성인이 없다면, 처벌해야 할 죄수도 없다. 따라서 형법을 교정하고 더욱 촘촘하게 죄수를 예방하려는 모든 노력은 곧 범죄를 조장하는 행위와 직결된다.

그렇다면 장자는 결국 어떤 것도 다스리지 말아야 한다는 허무주의적 태도를 주장하는 것일까? 만약 장자가 어떤 정치적 주장을 외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로부터 어떤 정치적 태도를 발견할 수는 없는 걸까?

질서를 회복하자는 쪽과 있는 그대로 두자는 쪽 중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대 중국에서 ‘정치’를 사유할 때는 저 두 계열이 함께 있었다. 공·맹은 노·장과 같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중심적 질서의 성립을 주장했고, 반대로 노·장은 공·맹을 비판하면서 탈중심화된 세계를 주장했다. 장자는 다스림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반(反)정치주의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결코 정치의 영역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반정치적인 면모는 무엇이 다스림인지, 다스림의 주체와 기준은 무엇이 돼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곱씹게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양생(養生)을 모델로 하는 정치

장자가 전면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사회의 형태는 유가, 법가, 묵가처럼 위에 있는 통치자가 특정한 가치를 아래에 있는 백성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장자는 이러한 행위가 그들의 타고난 본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봤다. 본성이 파괴된 사람은 탐욕에 이끌려 끊임없이 다투게 된다. 장자는 아무리 숭고한 가치를 따르려 해도, 이미 특정한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본성을 파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유가와 묵가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차꼬나 목에 씌우는 칼 따위의 쐐기가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지 못하겠고, (…) 질곡을 채우는 자물쇠가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천지 2장, 11쪽)

장자는 정치의 패러다임으로 양생(養生)을 제시한다. 천하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몸을 천하를 돌보는 것보다 중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자기 몸만 신경 쓰라는 이기주의적 태도는 아니다. 장자는 아무리 자기 몸 하나 희생한다고 해도 천하를 돌볼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천하를 자기 뜻대로 통치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 사유다. 가령, 자기 몸보다 천하를 중시하는 요·순·우 같은 인물들은 “다리의 털이 없어질 정도로 부지런히 일하지만 (…) 여전히 다 감당하지 못했다.” 이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을 유배 보내고, 처형하는 세상을 만들 뿐이었다.

우리가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정치 모델도 장자가 비판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악인을 근절하면 사회는 평화로워질까? 만약 그렇다면 악인은 어떻게 근절할 수 있을까? 악인을 가혹하게 처벌하고, 전시하는 법을 만들면 될까? 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를 보면, 범죄자를 피해자의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처벌하고, 처벌이 가해지는 동안 범죄자는 여러 학교를 돌며 아이들에게 ‘나처럼 살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렇게 범죄자를 처벌하는 동안, 피해자의 가족과 범죄자, 그것을 보는 아이들 모두 누구도 ‘범죄 없는 사회’를 희망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장자가 비판한 지점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물론 장자의 말을 따른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범죄자들을 모조리 처벌하고 뿌리 뽑으려 해서, 정말 사회가 나아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히려 영화를 참고하면, 그러한 믿음을 실행하는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힘듦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장자는 사회의 평화를 사법적 모델, 계약적 모델로 보려는 모든 정치론을 반대한다.

그렇다면 장자의 ‘양생’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일단 단순히 수명 연장이 아님은 분명하다. 요 임금-국경지기의 에피소드를 보면, 요 임금은 안정된 삶을 위해 인간이 따를 수 있는 것을 금욕한다. 그러나 국경지기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살지 못하는 요 임금의 금욕적 태도를 문제시한다. 통치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양생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는 것과 연관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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