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9.10 청소후기(수경조)

작성자
당근
작성일
2016-09-14 19:10
조회
581

9.10 청소후기<수경조>

<토론과정>

조의 반장인 수경쌤이『풀베개』“어떻게 읽으셨어요?” 질문을 했다. 조원들 각자 자신이 읽은 느낌을 말하고,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40분 정도 공통과제에 대한 글의 구성 및 내용에 대한 첨삭을 했다.

<『풀베개』를 어떻게 읽으셨어요? >

지니쌤 : 소세키의『문화예술론』과 그의 대한 참고 논문에서 본 문학의 이론들이 작품에 그대로 나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일본적인 ‘하이쿠’와 중국의 ‘한시’ 도 작품에 넣고 영국 소설과 동서양 그림과 자신이 구축한 문학이론을 작품에 쏟아 넣으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소설도 아니고 하이쿠도 아닌 뭔가 사생문의 중간단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응쌤 : 처음 읽었을 때는 ‘동양의 미가 아름답다’ 생각했는데,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소세키가 만든 가공의 인물 화자 ‘화공’이 어설프게 보여서 거리를 두고 읽었다.

수영쌤 : 어려웠다. 소세키가 말한 ‘사생문’ 과 연결해 보려했지만 잘 안되었다.

락쿤쌤 : 여러 장면들은 영화를 보는 것 같아 인상 적이었다. 하지만 동양적 사상과 어떤 이론에 것은 가까이 가기가 힘들었다. 화공이 온천탕에 혼자 있을 온천 주인장 딸 나미 씨가 나체로 들어올 때 묘사가 정말 아름다웠다.

수경쌤 : 철학적 이념을 글에 녹여내지 못하고, 이야기와 주장하고 싶은 이념이 따로 국밥이었다.

규창쌤 : 화자 ‘화공’이 변태인가? 여러 장면에서 훔쳐본다.

< 궁금했던 부분에 대한 이야기>

- 소세키의 ‘사생문’이 진동하는 이미지가 느껴진다.

지니쌤은 지난주 읽은『나는 고양이로소이다』그렇고 『풀베개』안에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예술론이 빼곡히 들어가 있다. 자신의 주장을 작품 안에 넣으려는 느낌이 많이 들어서 일반적인 ‘소설’ 같지 않았다. 작품의 화자가 소세키 같다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다. 수경쌤도 화자가 소세키의 예술론인가? 아니면 작품 안에 화자의 예술론인가? 혼란이 일어났다. 응쌤도 ‘비인정’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니 화자 ‘화공’이 소세키를 대변 한다 보다는 가공인물을 통해 한심한 인물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성숙한 ‘화공’이아니라 어설픈 뭔가 약간 모자란 모습을 그리는 것 같았다. 수경쌤은 지금 만약 소설 공모전에 이 작품을 냈을 때 엄청 욕먹었을 것이다. 작품 안에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철학을 녹이지 못했다. 응쌤도 책 안에 펼쳐지는 그림 같은 이미지와 묘사를 보고 ‘도교’로 푼 논문이 생각이 났다. 불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공간 느낌 특히 나미 씨를 ‘후리소데’로 그리며 걷는 모습을 글로 나타낸 문장에서는 공기와 생명이 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동아시아적 철학을 녹여내는 것 같다. 지니쌤은 그림, 시, 음악은 ‘재연’이 아니다. 소설과 연극은 대상을 재연한 거라면 그림, 시, 음악은 대상을 보긴 보되 거기서 발견하는 ‘흥취’ ‘정취’ 같은 인상을 표현한 것 같다. 거기서 받는 정취를 17자로 표현하면 하이쿠가 된다. 만약 그림을 그렸어,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인상을 뭘까? 뭘까? 찾다가 나오는 것을 그린 것이다. 마음을 그리는 것이다. 응쌤은 책안에서 3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가 물상 그 자체를 대상으로 놓고 그리는 것이 있고, 두 번째가 자기의 개성 취향대로 그리는 것이 있는데 이들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으로 그리는 것이다. 세 번째가 느낌,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다. 예술가라면 마음으로 그려야 하는 것 같다. 수경쌤은 작중 화자가 예술론을 이야기할 때는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이야기를 하는 작중 화자 화공이 왠지 전적으로 예술가의 높은 경지로 느껴지지 않는다. 왜 소세키가 풀베개를 통해 이런 글을 썼을까? 응쌤은 소게키가 100년 전 사람으로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자신이 아는 것을 글에 다 표현하려보니 책에 여러 가지 장르가 다 나온 게 아닐까? 수경쌤은 소세키가 놓인 지적 기반이 한학을 두텁게 공부하고 영국에 유학 가서 영문학을 깊게 공부했던 것이 책에 자연스레 묻어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 시대상황에 헤매는 길과 찾으려는 길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 소세키의 소설에서 ‘여자’가 비인정의 상징으로 많이 등장한다.

수경쌤은 온천에서 ‘나미’의 벗은 몸 나올 때 너무나 아름다웠다. 락쿤쌤은 그 묘사에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면서 덤덤하게 묘사했다. 지니쌤은 온천탕에서 수중기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야릇하게 느껴졌다. 수경쌤은 구조상 필요할 수도 있는데 나미라는 여자를 축으로 소설이 계속 된다는 것이 얘기해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수경쌤은 여자가 유령타입으로 나오기도 하고 상황 속에서 비인정으로 만들어 내기도 하고, 포착되지 않은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 화자 ‘화공’이 성숙한 예술가 같지 않고 자꾸 훔쳐보는 태도가 변태 같다.

락쿤쌤은 나미 씨가 전 남편을 만나면서 지갑을 꺼내고 있는 상황을 화공이 관찰하는 태도가 뭔가 화공이 좀 그래 보였다. 화공이 이발사와 스님, 나미 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뭔가 유머가 있다. 응쌤도 나미 씨를 벗은 모습을 온천장에서 만났을 때 솔직하지 못한 태도가 보였다. 또 뭔가 화공이 자기 합리화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규창쌤은 화공이 변태같다. 자꾸 훔쳐본다. 지진이 났을 때 숨어들 때 “여자가 파르르 떤다.” 라고 하지 않고 “동백꽃을 파르르 떤다. 동백꽃은 사람을 흘리는 요녀다.” 그런 장면에서 화공이 변태라고 느꼈다. 수경쌤은 화공이 어떤 상황에서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약간 판단 착오와 실수 같은 것을 보이면서 화공이 어느 정도의 예술가인지 의심스럽다. 응쌤도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다. 이발소 주인이랑 대화하는 장면이 너무 웃겼다. 얼토당토 하는 대화를 주고받고, 이발소 주인이 봄에 너무 잘 어울리는 색채의 하나다. 화공의 생각이 드러날 때 약간 허술한 솔직함이 느껴졌다.

- 인정, 비인정, 몰인정, 연민의 단어로 소세키가 말하고 싶은 것

락쿤쌤은 왜 하필 비인정, 인정 단어를 썼을까? 응쌤은 일본이 한자 문화권이라서 쓰지 않았을까? 규창쌤은 비인정에 대해 앞 뒤 개연성 없이 딱 그 장면만 보여준다. 비인정이 사생문과 연결되는 건가? 소세키가 문학예술론을 가져올 때 줄거리 없음을 그 이상을 넘어서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 경계가 인정과 몰인정이 구별 되는 건가? 응쌤은 몰인정은 근대시대의 인정머리 없는 냉혹한 자연주의로 책에 설명이 되어있다. 비인정은 할머니가 외출할 때 문을 잠그지 않는 것, 왕연명이랑 바쇼처럼 완전 초월한 세계를 노니는 것, 비를 맞으면서 자신을 그림속의 하나로 자연 과 일체화시키는 것 같다. 인정은 탐정 방식 어떤 세상을 바라보는 것, 줄거리 서사를 따지고 선적인 시각 속에서 분석하는 서양식 소설 같은 것을 인정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경쌤도 서양식 소설장르가 인정으로 보였다. 인간이 인간의 눈으로 인간사를 논할 때 서사의 인가를 가지고 펼쳐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인정은 자연과 연민을 모르는 신, 있는 걸 있는 거대로 보는 눈, 인간이 보기엔 냉정하지만 있는 그대로 보는 자연의 눈, 즉 불인한 자연의 눈을 비인정을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 화자는 ‘한시’에서 비인정을 찾는 걸까? 소설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은 인정, 한시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은 비인정.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건가? 예로 내가 맞는 입장에서 맞는 나로서 나를 볼 때 울분과 분노가 일어나지만 맞는 나가 거리감을 나를 볼 때 어떤 마주침과 충돌과 변형이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뭐하나 손잡아 주지 않는 것 같다. 꿈 이야기 할 때도 어떤 것에 있는 환상, 경계를 논하는 게 신기했다. 인정과 비인정 경계를 논하는 것 같다. 인정과 비인정으로 가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생문이 인정과 비인정 즉 한시와 소설 경계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니쌤은 책안에서 인정을 이야기할 때는 연극과 소설이 있었고 비인정은 그림, 시와 음악을 말하는 것 같다. 소설과 연극은 시와 음악과 완전히 다른 예술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나? 인정과 비인정을 구분이 있는 것 같다. 응쌤은 일반사람은 비인정을 사유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과 몰인정을 고민하는 것 같다. 수경쌤은 일반사람도 때때로 비인정의 세계를 꿈꾸는 것 같다.

응쌤은 책 속은 전체적으로 비인정의 세계로 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책 마지막에서 나미씨의 표정에서 인정을 발견한다. 당근쌤은 마지막 연민에서 비인정이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응쌤과 규창쌤은 인정의 세계를 봤다가 해서 나와 반대돼서 이상하다 생각했다. 지니쌤은 그것이 연민이므로 인정이라고 생각이 든다. 신과 가장 가까운 감정이 연민이다. 수영쌤은 마지막 문장에서 이제 그림이 될 거라고 했을 때 비인정과 가깝다 생각했다. 락쿤쌤도 나미 씨가 기차역에서 사촌 동생을 배웅하면서 감정 거기서 연민이 보였고 화공은 비로소 나미 씨에 대한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했을 때 비인정으로 갔다. 는 것 같았다. 당근쌤은 터너가 기차를 그렸을 때 그때까지 몰랐던 기차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그와 같지 않을까? 수경쌤은 흔히 있는 정서 중에 연민이 있었던 것이다. 연민은 신이 모르는 정이고 나미 씨 표정에 연민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지막에 연민이 보인 거 아니야? 락쿤쌤은 인정 같은 얼굴표정에서 마지막에 비인정이 보여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거에요,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그림이 되면 비인정으로 간다는 이미 아니었을까. 응쌤은 나미 씨가 이기자 이기자 하는 초조해하는 모습은 인간세계에서 이해관계에서 나타나는 감정인데, 그걸 넘으면 연민으로 간다. 락쿤쌤은 연민과 비인정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찾지 못했다. 수영쌤은 책 전반적으로 인정의 세계와 비인정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저희 조에서는

소세키가 작품을 통해 자신의 문학예술론과 동서양의 문학을 다 넣으려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풀베개』를 통해 사생문을 연결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찾지 못했다. 단지 사생문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데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소세키가 만들어낸 비인정 개념은 어느 정도 글에서 풀어주는데 비인정과 연민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 없어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다. 질문이 남았다.

전체 2

  • 2016-09-14 19:25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장중계인가요. 다음부터는 토픽별로 모아서 정리하심 더 좋을 것 같아요. 사생문에 대해, 연민에 대해, 소세키 작품 속의 여성 인물에 대해... 이런 식으로. 그리고 저는 이 작품이 철학을 녹여내지 못한 글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 문학론 혹은 예술론으로 보이는 한 축과 온천장에서 화공에게 일어난 이런저런 일로 이루어지는 한 축이 있음으로써 어떤 효과가 나오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그걸 보지 않으면 따로국밥처럼만 보일 뿐이라고 말한 거였는데ㅋㅋㅋ / 중간에 저 질문은 좋으네요 "인정, 비인정, 연민...으로 소세키라 말하려던 것은?" 화공이 뭔가를 보고 생각하는 것에 그칠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작품 전체가 던지는 질문이나 집중하는 주제를 생각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 2016-09-16 17:43
    울 조 토론 빨개벗겨졌군요ㅎㅎㅎ
    인정/비인정은 앞으로도 계속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 같아요. 암튼 인상적인 후기임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