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09.24 청소 후기 (란다 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09-28 09:10
조회
410
지난 시간에는 『도련님』과 『회상』을 읽고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옥상 쌤이 개명(?)을 하셨습니다. 새로운 별명은 '란다'(맞나요?). 옥상에서 배란다로 우리에게 한 층 가까이 내려오셨답니다.ㅋㅋ

<도련님>
저희 조에서는 우선 『도련님』에 관해서 토론을 했는데, 란다쌤은 <취미의 유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도련님』을 유전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셨습니다. 소설 속의 도련님은 자신이 겪는 모든 불화와 갈등의 근원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막무가내 성격’ 탓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겪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유전에서 찾고 있는 것이죠. 란다쌤은 여기서 유전의 문제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거부가 나타난다고 보셨습니다.

우리의 유전학적 특성은 우연적인 진화의 결과물이기에 바꿀 수도 없고, 다른 것과의 비교에 의해서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인데, 당시 일본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겠죠. 서양인의 유전적 특성은 우월한 것으로 평가되고 “그게 일본에서는 근대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쫓아야 하는 목표가”(란다쌤 글) 됩니다. 도련님의 근거 없는 당당함은, 아무리 자신을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더라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무대포 기질’을 외부 척도에 맞추어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에는, 유전적 문제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소세키의 거부감을 읽어낼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도련님의 성격에 대해서 좀 더 얘기를 나눴는데, 저는 명분과 이치를 내세우는 빨간셔츠와 너구리, 알랑쇠 등에 대해 도련님이 또 다른 명분과 이치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맞서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끝물호박과 빨간셔츠의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조사해 보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논리나 명분으로 정당화된 가치에 대해서 다른 가치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능적인 거부감과 혐오감에 따라 행동하는 것. 물론 이러한 방식은 너무나 틀리기 쉽고 온갖 곤란한 상황을 야기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도련님이 가진 빨간셔츠의 세계에 포섭될 수 없는 경쾌함이 아닐까요? 란다쌤은 ‘might is right라는 말은 익히 알고 있지만 강한자의 권리와 숙직 문제는 다르다’고 할 때 도련님의 말 속에 있는 논리적 비약, 단절을 흥미롭게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논리적 단절이야말로 도련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요?

도련님이 추구하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겉과 속의 일치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도련님은 산미치광이와 함께 빨간셔츠를 궁지에 빠뜨릴 계획을 세우고 잠복을 하지만 거기에는 탐정적인 치밀함, 세련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들의 목표가 애초에 증거를 획득하는 게 아니라 그저 흠씬 두들겨 줄 기회를 잡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도련님은 잠복수사를 할 때조차 탐정적으로 될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그가 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캐내는 탐정의 관점을 갖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시코쿠라는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근대’라는 말의 함정인지도 모르겠지만, 소세키의 소설을 볼 때마다 근대를 대변하는 인물이 누구이고, 전근대를 대변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자꾸만 따져보게 됩니다. 『도련님』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옥상쌤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근대화에 가장 뒤쳐졌던 현 중 하나가 바로 시코쿠였습니다. 그런데 전근대적인 사무라이 정신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우리의 도련님이 지닌 막무가내 성격이 가장 커다란 불화를 겪는 공간이 바로 이 시코쿠라는 것입니다. 저희의 질문은 도련님이 겪는 이러한 문제들이 어째서 도쿄가 아닌 시코쿠에서 생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옥상쌤은 런던의 근대화가 도쿄에 강제되고 도쿄의 근대화가 다시 지방에 전염되는 구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러일전쟁이 끝나고(『도련님』은 1906년에 연재되었습니다.) 도쿄의 근대화는 어느 정도 안정된 반면에 시코쿠와 같은 지방의 경우에는 근대화 초기의 문제를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까지 근대화의 모순들을 끌어안고 있는 시코쿠를 배경으로 소세키는 도련님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온갖 것들 사이의 마찰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세키가 시코쿠나 나코이를 배경으로 삼았던 것은 그 공간들이 도쿄에서는 자취를 감춰 가는 근대화의 모순과 균열을 표면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란다쌤은 도련님과 그가 부임한 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여러 갈등들과 균열들은 근대화가 스무스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엄청난 단절과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상>

솔직히, 저를 포함한 모든 조원들이 힘이 빠져서 『회상』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 못 했습니다. 우선 <취미의 유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감자는 그 중 전반부의 전승기념식을 다룬 부분을 가지고 글을 썼습니다. 감자가 중점적으로 보았던 것은 소세키가 전사자들을 ‘애도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소설 속의 화자는 자신의 친구를 규정된 이름으로 애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승기념식이란 기본적으로 전사자를 신격화하고 그로부터 애국심, 민족주의로 발전하는 종류의 정서를 개인들에게 강요하는 행사라고 한다면, ‘나’는 그 안에서 위대한 남자였던 고우가 “메주콩 한 알 처럼” 무의미해진 모습을 상상하며 눈물 흘립니다. 그 다음으로 그는 고우의 명예를 고취시키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고우 생전의 연애사를 알고 싶은 호기심에 이끌려 묘지의 여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뛰어 다니죠.

감자는 소세키가 “고우를 ‘호국의 신’으로 애도하는 장면을 그리는 대신 개선식에서 그를 생각하는 친구,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눈물짓는 어머니, 한 번 만났음에도 묘지에 국화를 가져다 두는 여인을 통해서 그의 사후를 얘기하고 있다”(감자 글)고 썼습니다. 정리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정리하려 하지 않는 것이 소세키가 전사자들을 애도하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바라보는 소세키의 관점과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취미의 유전>에 나타나는 전쟁을 바라보는 ‘나’의 상이한 관점들이 어떤 하나의 관점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모순적인 채로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라며 냉소적으로 전쟁을 비판하고 승전기념식에서 마주한 장군의 얼굴이 뿜어내는 이질성에 느끼는 경외감(?), 친구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비애 등이 전쟁을 둘러싸고 소세키 안에서 공존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소세키가 <취미의 유전>을 통해 전쟁에 대한 정리되지 않는 입장을 정리하지 않은 채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회상>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특히 <회상>의 주된 주제이기도 한 삶과 죽음에 관해서 얘기를 했는데, 란다쌤은 도덕경의 ‘출생입사’(出生入死)를 말씀하시며 소세키가 슈젠지의 대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쌤의 표현에 따르면 ‘그냥 나왔으니 사는 것.’(^^) 그리고 역시 죽음과 삶의 동질성에 대한 소세키의 깨달음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런 고원한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자니 우리의 언어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소세키가 겪은 슈젠지의 대환을 어떻게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그 이후의 소설들을 읽으며)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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