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10.8 태풍 후기 - 수경조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10-12 21:59
조회
310
어가행렬 어쩌고 때문에 좀 늦게 도착해서 초반의 토론을 좀 놓쳤는데도 불구하고 후기를 맡게 됐어요. 엉엉.  아무튼 들은 얘기 중에서 최선을 다해 정리해볼게요.

 

도야의 연설장면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때 저처럼 '엄청 그럴 듯하고 훌륭했다, 단지 그의 삶이 그의 훌륭한 말과 매치되지 않는 점이 문제가 있다'는 평도 있었고. '오히려 설득력이 없고 어딘지 불안하고 의심스러워 보이는데, 청렴한 학자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그의 행동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는 부유하는 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어요. 그는 학자라는 이름에 또 다른 권력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의혹이었죠. 부유함으로 권력을 삼는 것처럼, 학문을 우월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도 무언가에 구애받는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었는데요. 여기에서 문제는 그의 삶과 말이 일치하느냐, 혹은 그가 어떤 것에 구애를 받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이런 에피소드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 것, 그것을 넘어서는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연설 장면이라든가, 결혼식 장면의 묘사 등등에서 이 캐릭터는 이렇고, 저 캐릭터는 이런데 난 이쪽이 더 좋다, 이 쪽이 잘못됐다 등등의 감상이나 판단의 단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것을 바라보는 눈인 것이지 사건 자체에 골몰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렇게 보이게 한 소세키의 의도가 무엇일까. 무엇을 부여주고 싶었던 것일까로 연결시켜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였어요. 예를 들자면, 어떤 에피소드는 ‘근대는 학자를 외톨이로 만든다’든가 뭐 이런 식의 해석이 가능할만한(해석의 여지를 열어주는) 근대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거죠.

여기에서 두 가지의 일상 속에서의 예를 가지고 더 자세히 이야기했는데요. 하나는 지하철에서 두 사람이 삿대질을 해 가며 싸움이 격해지는 상황을 그린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었어요. 이 때 그 두 사람의 싸움을 보여주는 방식이 무척 다양할 수 있어요. 두 사람의 말에만 집중하고 그 하는 이야기의 내용에만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말의 시시비비를 따지게 되죠. 누가 잘못했네. 쟤가 너무했네. 이게 보통 우리가 공통과제를 할 때 벗어나지 못하는 시각이기도 하고요. 그건 평소에 우리가 주변의 사건들로 수다를 떠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해요. 하지만 두 사람에게서 조금만 떨어져도, 당사자들에게 심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해학과 골계미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변할 수 있어요. 혹은 그 장면을 영화로 만든다고 가정하면, 카메라가 두 사람의 대화나 모습에만 집중하지 않고 때때로 주변의 승객의 얼굴을 잡아준다거나, 그들이 타고 있는 전차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거나, 혹은 서울을, 한국을 멀리서 바라보는 식으로 전혀 다른 시도들로 그 장면을 보여줄 수 있을 거예요. 그럴 때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들도 그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생겨나요.

두 번째로 예로 등장한 것은 베가본드라는 만화책인데요. 여기서 두 무사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올 때, 싸우는 인간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날고 있는 매라든가, 사마귀나, 거미처럼, 그 두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의 모습들을 묘사하는 장면들이 같이 등장한다고 해요. 이것은 두 사람의 싸움 자체가 아니라, 전체 속에서 그들로 대표되는 인간의 배치,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주변의 다른 것들과의 관계들을 함께 보여준다는 거예요. 그 속에서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우리가 작품을 읽을 때 한 인간이 하던 말들과 그가 한 행동 사이에 불일치가 일어났을 경우, 지금 우리가(특히 제가) 과제를 하듯 그 인물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거나 그가 나쁜 캐릭터라며 비판,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에요. 평소의 생각과 행동이 모순을 이루는 입체적인 인간이 등장할 때 그 상황 상황에 그의 욕망이 드러나고, 그 간극이 말해주는 인간의 숨겨진 어떤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수 있어요. ‘얘가 어떻다’기보다는 ‘얘를 어떻게 그리고 있지’에 초점을 맞추자는 거예요. 소세키가 그 인간을 무엇이라 생각한 것인지, 왜 그 인간을 그렇게 모순적으로 그려낸 것인지, 소세키가 생각하기에 인간이란, 혹은 근대적 인간이란 어떤 모순을 품고 있다는 것인지를 인간에 대한 다채로운 묘사 속에서 엿볼 수 있다는 거예요. 사건이 있을 때 그것을 어떤 문장과 호흡으로 보여줄 지는 전적으로 작가에게 달려있는 문제고, 그것을 표현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기 마련이니까요. 작가는 이것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여야 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채운샘께서 하시던 이야기도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글을 쓰거나 막상 책을 읽을 때는 이렇게 안 되는 것일까요. 오랜 습관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외에도, 서로의 공통과제에서 내용만 전달하지 말고 해석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고요. ‘취미’등의 단어 사용도 개념정리가 없이 쉽게 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소세키는 지금의 우리처럼 단순히 취미활동을 가리키기 위해 그 표현을 쓰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호오’라는 뜻일 때도 있고, 이번의 도야가 낸 잡지 속에서의 취미는 또 다른 함축이 있는 것도 같고요. 누군가는 그것을 ‘여유’와 비슷한 느낌으로 읽어내기도 했어요.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자의적 구분도 배제하자는 얘기도 있었어요. 이 표현들에는 이미 한쪽을 기준점으로 삼는 가치판단이 포함된 말이니까요.

그리고 화자의 확신을 드러내는 듯한 과거형의 시제와, 판단을 유보하는 느낌을 주는 현재형의 시제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도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를 묻는 의견도 있었는데, 솔직히 그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작품을 읽을 수도 있구나 하고 전 엄청 놀랐습니다. 아무튼 소세키는 당시 ‘소설’이라는 것에 대해서 계속 고민을 했고, 여러모로 실험을 했으며, 그 과정들이 우리가 읽고 있는 작품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소세키의 소설들을 다소 이질적이거나 생경한 소설로 만드는 것이겠죠. 아무튼 훌륭한 작가는 다양한 거리감을 가지고(많은 렌즈들을 가지고) 한 번에 쉽게 포착되지 않는 글을 쓴다고 하네요. 소세키가 훌륭한 작가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네요. 포착이 쉽게 되지 않는 건 분명하니까요. 이걸로, 우리 조의 토론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쓰다 보니 방식은 좀 이상하게 된 것 같네요. 부끄러워하시는 분이 있어서 실명은 다 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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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13 11:41
    초반의 토론을 놓쳤다고 아쉬워하지 말아~ 다 읽고 막 이야기를 하려던 즈음에 그대가 나타난 것이야ㅎㅎ 사람들 말에 잘 놀라고 신기해 하는 것도 능력이다, 그야말로 순백의 상태에서 쏙쏙 흡수하는구나(...어..? 이거 나쁜 말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