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차라 5.21 후기

작성자
계숙
작성일
2018-05-27 13:18
조회
108
 

 

지난주에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를 읽고 토의하였다.

 

4부의 시작은 차라의 머리가 어느새 백발이 되었을 정도로 세월이 지났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동굴에서 ‘절박한 부르짖음’을 듣게 된다. 그 부르짖음은 자신을 부르는 것이자. ‘보다 지체 높은 인간’이 부르는 소리며, 어떤 고약한 짐승의 습격으로 인한 절박한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차라는 또다시 길을 나서게 된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 읽은 분량에서 차라가 만나게 된 사람들은 실직한 성직자, 더없이 추악한 자, 제발로 거렁뱅이가 된 자,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이다. 이들은 차라가 기대했던 ‘보다 지체 높은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랜 헛수고 끝에 자신의 동굴로 되돌아간 차라는 자신들이 만나고 초대했던 많은 이들이 뒤섞여 내는 소리를 듣고는 그 소리가 이전에 들었던 ‘절박한 부르짖음’과 너무나 유사함을 깨닫게 된다.

차라가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보다 지체 높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이들이 대단히 지체 놓은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반 대중‘~보다’ 지체높은 인간이라고는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대중이 자신의 생존에 급급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데 비에 적어도 이들은 가치를 찾고 의미를 묻는 사람들이 아니냐는 점에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죽인 자에 대해서 ‘더없이 추악한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 대해 논의 했다. ‘신을 죽인 자’는 오랫동안 인간을 억누르는 존재로 군림한 ‘신’을 죽였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온 자로 추앙받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이유로 그렇게 역겹다는 평가를 받게된 것일까. 이에 대해 인간이 죽인 ‘신’, 인간이 죽일 수 있었던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었을 뿐이다. 인간이 해명할 수 없는 모든 것에 ‘신’이란 이름을 갖다 붙이곤, 결국 그 ‘신’이 자신을 속속들이 꿰뚫어본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인간은 자신의 신을 죽인다. 그리고 신의 자리에 이제 인간을 가져다 놓는다. 인간이 중심이며, 인간만이 가치라는 듯이. 니체는 삶을 직시하지 못하는 신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불신앙, 반신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인간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니체의 힘의지는 인간이 자신에게서 의지를 갖고 무언가를 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힘의 작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림자’는 인간이 그렇게 벗어나려고 하지만 놓지 못하는 자의식으로, ‘제발로 거렁뱅이가 된 자’에 대해서는 자기애에 빠져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하고 오로지 ‘되새김질’만 하는 것을 배우려는 것으로 자로 해석해보았다.

이들과 함께한 만찬이후에 차라가 펼친 ‘보다 지체 높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위버멘쉬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언급이 있었지만, 그렇다면 ‘위버멘쉬’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문이 막혀 더 이상의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위버멘쉬에 대한 깨우침, 그리고 ‘정오에’라는 장에서 펼쳐진 순간과 영원회귀에 대한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이 계속될 공부에서 요구되는 것 같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