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3강 후기 : "앙리 베르그손 : 이미지, 물질, 기억"

작성자
HY
작성일
2018-07-14 18:38
조회
128
언젠가 홍상수 감독이 세잔에 대한 애정을 밝혔던 적이 생각납니다. 홍 감독은 유학 시절에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냈던 때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세잔의 그림을 유독 관심 있게 보았다고 해요. 인터뷰에 따르면, 다른 작품들은 '뭔지 알겠어'라는 느낌을 줬다면 세잔은 뭔가 확언하고 단정짓기 어려운 오묘한 감동을 안겨줬더라는 겁니다. 저는 한동안 그 이유가 내심 궁금했었고, 이번 강의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은 것 같습니다. 3주 차 후기 시작하겠습니다.

*

의자에서 생 빅투아르 산까지

현대 미술가인 조셉 코수스의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One & Three Chairs, 1965)라는 작품에는 앉을 수 있는 나무 의자, 의자가 찍힌 사진, 의자의 정의가 적힌 사전적 설명문이 등장합니다. 작품은 '이 중에서 내가 아는 진짜 의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실재와 얼마만큼 닮아있을까, 그렇다면 이미지는 과연 실재에 가까운가 주관에 가까운가, 철학적으로는 대략 이런 질문들이 마구 던져지기 마련입니다.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인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 (Grande Odalisque, 1814) 그림에는 나신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언뜻 보면 실감이 날 만큼 아름답지만, 우리 눈에 너무 사실적인 것은 그 자체로는 사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여인의 주변에 걸린 커튼의 상세한 주름, 머리 장식 하나하나... 우리의 눈은 과연 이 모든 요소를 캐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똑같은 강의를 듣더라도 어떤 말은 생각나고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날 선생님이 입으신 옷은? 먹었던 간식의 종류는? 누구의 얼굴은 기억나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날'에 대한 각기 다른 단면을 취합니다.)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전지적인 시각을 차용한 눈은 '신의 눈'입니다. 이상적인 비례를 위해 특정 부위를 왜곡시켜 그린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그에 비하면 인상주의 시대에 활약했던 르누아르, 모네의 그림은 지금 내게 보이는 것에 한층 집중합니다. 그들은 현재 인상 지우는 것을 고스란히 그려내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렇게 인상주의는 기존의 시각에 파문을 일으킨 양식을 창조했고, 쇠라는 이를 더 정교하게 발전시킵니다. 그는 점묘화를 주고 그렸는데, 점들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보색대비를 활용했습니다. 곧 흩어져버릴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성에 집중한 인상주의를 넘어서, 쇠라의 그림에는 정적임과 안정성이 갖춰져 있는 듯합니다.

이는 '끊임없이 새롭게 인상 지워지고 변화하는 세계는 어떻게 지속하는가?' 내지, '계속되는 차이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어떻게 견고함을 갖출까'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세잔의 작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존의 인상주의 그림들이 변화하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면서도 일순 흐릿해지는 해체의 지점에 천착했다면, 세잔의 그림은 견고함과 지속하는 구조마저 담아내 보였습니다. 채운 선생님께서는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지 않는 지속성", "끊임없이 차이화함에도 반복되는 세계의 동시적 설명"이라고 정리하셨습니다. 마침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가 애용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날 강의 시간에 감상한 세잔의 몇몇 그림들이 있습니다. '생 빅투아르 산'을 담은 연작에는 먼저 산이 보이고, 구석구석에 나무들과 집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렴풋하게 보면 '저게 집이나 바위겠거니' 합니다. 하지만 부분을 확대해보면 형상이 흐려집니다. 특정한 형체가 인식되지만 그것을 구별 짓게 하는 색과 터치들은 주변과의 관계에서 존재감을 발휘합니다. 세잔의 그림에는 색채들이 한껏 진동하면서도 나름의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부단히 진동하면서 구체화되는 세계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의 획 앞에서 고민하기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속'이라는 말은 언뜻 형용모순처럼 들립니다. <주역>에서 '역'(易)이란 글자도 '변화하다'와 '항상되다'는 뜻을 아우릅니다. 역의 원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와 일상에서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지금 햇볕이 쨍한 여름을 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년 찾아올 계절조차 어떤 경우는 조금 이르게 오거나, 조금 늦게 찾아옵니다. 여름을 공유하는 나날 안에서도 하루하루 더 덥거나 덜 더운 날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변화무쌍하면서 일관된 기류에 우리가 속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의 신체도 각종 대사작용들로 열일하면서 수많은 세포들의 생과 사를 주관하지만, 그러면서도 일관된 항상성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피부는 떨어질 각질과 돋아나는 새살의 차이가 반복적으로 교차하는 장입니다. 이처럼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존재는 생성을 거듭합니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앙리 조르주 클르소의 <피카소의 비밀> (The Mystery Of Picasso, 1956)을 베르그송적인 영화로 소개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피카소는 백지 위에 선을 그립니다. 선을 하나둘 그리는 장면에서 '저게 뭐지' 싶다가도, 어느새 선들의 집합은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어떤 선을 긋는 것이 뭐가 될지 모르는 순간들이 발견됩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화룡점정'으로만 생각해버린다면, 피카소의 작업은 마치 아기가 화폭에 장난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캔버스를 종횡하는 선 하나는 규정적이지 않고, 그렇기에 창조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산물이 됩니다. 한 획하고 싸우는 화가의 자세. 그것은 세잔의 수많은 미완성작에 묻어난 고민이 전하는 바입니다. 이때 작가들의 시작(詩作)과 소설 쓰기도 결국은 한 단어/한 문장과의 치열한 싸움이란 말이 생각났습니다.

세잔의 풍경화는 선험적인 공간이 먼저 있고, 그 안에 각종 사물이 삽입된 구성으로만 설명될 수 없습니다. 공간 자체는 그 안에 뭐가 놓이냐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규문의 거실에는 큰 탁자가 놓여있는 데, 학우들이 그곳에서 공부할 때 탁자는 공부 공간으로, 밥을 가져다 먹을 때는 식탁으로 변모합니다. 프로젝터를 켜놓고 영화를 본다면 관객석으로, 그 위에서 탁구를 친다면 탁구대가 될 것입니다. 베르그송의 사유는 공간에 뭐가 있느냐에 따라 그 본질이 다르게 규정된다는 것과 더불어, 공간에 내재된 요소 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이끕니다. 이는 한편으로 똑같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배치된 모든 요소의 균질함이 적용된 공간은 아님을 말해줍니다. 세잔이 그려낸 산의 부분들은 균질한 색채로 통일되지 않습니다. 그려낸 스타일은 조금 다르더라도, 이전 수업시간에 봤던 클레의 그림('파르나소스 산에서', Ad Parnassum, 1932)을 수놓은 각양각색의 모자이크 점들이 떠올랐습니다.

'직관'과 '지속'의 개념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은 수많은 '습관적인 사유'에 젖어 들기 쉽습니다. 어떤 그림에 나타난 대상과 원본의 위계를 따져보고, 하나의 공간에 균질함과 통일성을 곧잘 부여합니다. 우리는 함께 지내면 같은 것을 서로 보았다고, 들었다고 믿고, 믿는 만큼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유의 습관성을 전복시킬 것이냐? 베르그송은 우리의 지성은 본질을 파악하는 데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노력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사유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강조하는 직관은 (애인이 바람피는 것을 잡아낼 '촉'이나 'Feel' 같은 것이 아니라..^^) '전체의 법칙을 꿰뚫는 사유능력'이라고 합니다. 

 "철학한다는 것은 사유의 습관적인 작업 방향을 전복시키는 것" ... 직관은 "새로운 것 안에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단절되지 않은 연속을 지각한다. 정신이 자기 자신이 지닌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신에서부터 끌어낸다는 사실, 정신성이란 바로 이런 점에 있다는 사실, 또 정신 안에 수태된 실재가 곧 창조라는 사실을 직관은 보고 알고 있다." ... "편의를 거부하고 어려움을 자초하라"  (『사유와 운동』) 

노력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될 것이고 그로써 많은 것을 사유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습관적 사유'를 지양함에 따라 '편의를 거부'하고 '어려움을 자초'할 때만이 가능할 것이라는 따끔한 충고에 의해서 진심 가득한 생기를 얻습니다. 상투성과의 치열한 투쟁! 예술가들은 줄곧 '클리셰'와 분투하면서 변화와 차이의 과정을 겪어왔다고 합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들의 작업이 갖는 지속은 일종의 '정신적 창조'이자, "예견 불가능한 것의 끊임없는 창조 혹은 차이화 과정"인 것입니다.

세잔처럼 하얀 캔버스를 마주한 이들은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문제에 직면하며,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냅니다. 클리셰란 남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고스란히 흉내 낼 때 발생하는 사태입니다.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퍼즐 맞추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퍼즐 조각 하나는 상하좌우에 무엇이 놓이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위치가, 몫이, '역량'이 한껏 발휘될 수 있습니다. 조각 하나하나는 균질하지 않지만, 그들의 역량은 서로가 '제대로 깍지를 낄 때' 잘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퍼즐 맞추기에 동원될 어려움은 결국 '관계'를 염두에 둔 고민입니다. 또한 퍼즐의 묘미는 그런 과정을 몸소 겪고 경험하는 데 있을 겁니다.

'지속' 개념이 함축한 시간의 문제는 결국 오래 걸리냐 짧게 걸리냐의 문제라기보다, 과정을 겪어내는 문제일 것입니다. 베르그송이 말한 시간 개념에는 오로지 차이를 드러내고 만들어지고 있는 사물만이 존재합니다. 세잔은 진동하는 색채와 터치가 반영된 사과를 그려내면서 이를 회화적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정리할 필요가 있겠네요. 베르그송에게 이미지란 '변화하고 있는 물질의 단면'이고, 그런 이미지들의 총체가 곧 물질을 이룹니다.

상투적이냐, 창조적이냐 

다시 말해, 베르그송의 이미지는 사과에 대한 언어 표상도, 사진 이미지도 아닙니다. 그에게 이미지는 (현재에도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조금씩 산화되고, 변화하는 빛의 방향과 강도에 의해 다르게 반사되며, 수분의 증발로 인해 몰래몰래 다른 질감을 갖추고 있을, 심지어 보는 사람의 운동과 위치에 따라 달리 포착될 수 있을법한) 사과라는 물질의 단면입니다. 우리는 시시각각의 단면만을 잠시 취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한편, 스피노자에게 이미지란 신체의 변용과 마주침으로부터 -뇌 언저리에?- 새겨진 흔적 같은 것입니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물질이다!'라는 말은, 이미지가  ["주관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닌 순수한 경험"이자, 그런 종류의 '실재를 지칭한다'] (강의안에서 인용) -는 말로 설명됩니다. 이미지란 물질적이면서도 의식과 더불어 연관된다는 것. 여기서 베르그송은 관념론자와 실재론자의 이미지론을 넘어섭니다. (이 부분이 조금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나'라고 하는 특권적 이미지를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지각은 곧잘 뺄샘 작용을 하는데, 우리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려고 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다른 세계를 접하고, 각자의 사정과 관심사에 맞춰서 그것의 단면을 절단합니다. 지각-이미지는 세계와의 작용과 반작용에 따라 매 순간 발생합니다.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냐에 따라 잘린 단면은 제각각입니다.

어떤 것은 주의 깊게 접하고, 다른 건 산만하게 접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억도 결국 지각-이미지의 뺄셈에 따라 구성된 산물임을 알게 해줍니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현재적인 것은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됩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손들어 인사할 때, 처음에 들었던 낯선 느낌과 약간의 두려움(?)은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내면서 그 사람을 달리 보게합니다.  그에 따라 우리의 상태도 크고 작은 변화를 겪습니다. ('그 사람이구나!' - 이어지는 안도와 반가움) 그러므로 과거는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잠재적인 것으로 작용합니다. 우리가 가진 다양한 편견을 뒷받침할 단면들, 그것 역시 모든 현재적인 것은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고 이해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 과거를 어떤 방식으로 취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거나 공부를 할 때, 우리 자신은 상투적이거나 창조적으로 그것들과 접속하게 됩니다. 여기서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닌, '잠재적 차원의 현실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베르그송의 철학은 우리가 얼마나 익숙한 것을 추구하려는 가에 대한 문제 제기임과 아울러, 우리가 얼마나 상투적인 일상 속에 예속되어있는가에 대한 고발이자,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얻을 것인가를 되묻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사주와 손금도 일견 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사주는 생년월일시에 따라 '타고났다'고 볼 수 있지만, 세운과 대운과 월진과 일진, 심지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른 리듬과 경향'을 만들어냅니다. 손금도 들여다보면 매번 달리 보입니다. 세월에 따라 신체가 변이하는 만큼 없던 금이 생겨나기도 하고, 어떤 금은 사라지기도 합니다. 더불어 관찰하는 자의 의식이나 가치관도 바뀝니다. 곤궁함에 시달릴 때는 재물선만 찾게 되고, 좀 외롭다 싶을 때는 애정운에 매달립니다. 그렇다 보니 놓치거나 주의 깊게 확인하지 못한 선이나, 글자들도 무심코 발견되거나 생겨납니다.

또한 우리는 그날의 변덕과 상관없이 인정하는 각각의 성향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주요한 금이 사라지거나, 주어진 여덞 글자 자체가 변하진 않습니다. 차이와 반복, 변이와 생성과 같은 것도 꼭 '하루아침'의 사태와 결부되진 않습니다. (일상에서 어떤 변화를 체감하는 순간은 '어느덧', '문득', '모르는 새'라는 말과 잘 어울립니다. 어느덧 여름이고, 문득 2018년의 절반이고, 모르는 새에 졸업반이고 ...) 그러면서도 늘 다른 선들, 다른 운기와 맞물리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손금도 사주만큼이나 다른 요소와의 관계를 따져 묻는 명리의 분과입니다. 이것은 시의에 맞는 유연한 해석과 통변을 필요로 합니다. (이를 잘 설명하기 위해선 그때마다의 올바른 직관을 부여할만한 깊고도 너른 공부가 필요하겠죠.. 책임이 막중합니다. ^^)

판에 박힌 것과 전투하던 화가들의 열정은 '늘 깨어있으라'는 말을 주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아무래도 '깨어있기 위해 공부하라'는 말, 씨앗처럼 새겨야겠습니다! 이번 후기는 끝.

* 들뢰즈와 베르그송의 사유를 엄밀히 구별하는 게 다소 어려웠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더 공부해야겠습니다.. ㅠㅠ
전체 5

  • 2018-07-14 21:35
    한역샘을 철월 후기 담당으로~~ 성실한 정리와 깨알같은 응용, 모범적인 마지막 멘트까지!ㅋㅋㅋㅋ 변이와 생성 대해 말씀하신 것에 몹시 공감합니다~

  • 2018-07-15 07:33
    얼마만에 보는 '후기다운 후기'인가!! 한역을 철월 후기 담당으로 하자는 데 나도 한 표!(이게 웬 민호 복 터지는 소리야~ㅋㅋ)

  • 2018-07-15 10:39
    새로운 시선과 사유를 발견하는 즐거움~
    불금보다는 철월.이네요~
    후기 잘 읽었어요

  • 2018-07-15 19:38
    흰 캠퍼스가 비어 있는 것 이 아니라 그 위에 온갖 클리셰가 가득 차 있고 화가는 매번 그 클리셰와 싸워야 한다는 것.
    문득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손금도 변화한다는 게 신기하네요~

    강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흔쾌히 후기를 맞아주신 것도요)

  • 2018-07-16 16:30
    철월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으로, 채운샘께서 읽어보라고 강추하셔서 꼼꼼 읽었는데, 역시 마음을 잡아끄는 후기네요!!!
    공짜로 강의의 엑기스를 통째로 전해듣는듯요. 잘 읽었습니다. 종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