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4강 후기 : "발터 벤야민 : 역사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로서의 역사"

작성자
HY
작성일
2018-07-20 12:45
조회
170
철학자, 문화비평가, 미학자 ... 발터 벤야민을 장식한 호칭들은 그의 드넓은 학문적 관심사를 보여줍니다. 요즈음 인문학 구석구석을 쏘다니다 보면 익히 접하게 될 그의 명성! 역사를 배워도, 문학을 공부해도, 미학을 접해도, 영화는 물론 사진에도 새겨진 그만의 인장은 쉽게 바래지 않습니다. 현대성 연구에 많은 영감을 주는 벤야민의 인기 비결이 자못 궁금해집니다. 이번에는 역사에 관한 그의 거침없는 발언들이 주인공을 자처합니다. 그뿐 아니라, 엑스트라도 화려합니다. 클레가 그렸던 천사들, 여조라는 이름의 귀신도 북적이는 와중을 사유해보았습니다. 무엇을?-이미지를, 어떻게?-역사철학적으로!

*

몇 편의 영화로부터

<액트 오브 킬링> The Act of Killing, 2012 을 보는 것은 곤혹스럽습니다. 영화는 1965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주도한 가해자들을 등장시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살인을 거리낌 없이 재현합니다. 이런 데는 이유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인도네시아에선 가해자들이 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오펜하이머 감독은 원래 피해자들의 회고가 중심이 된 다큐를 찍으려 했지만, 모종의 협박으로 촬영이 여의치 않게 되자 방향을 선회합니다. 피해자 중의 일부가 차라리 '저지른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가해자들을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 권유했고, 그것이 연출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둘씩 시연되는 현장 검증은 처참함을 게워내고, 그것을 일일이 지켜봐야할 관객들에겐 깊은 탄식이 동원됩니다. 후속작인 <침묵의 시선> The Look of Silence, 2014 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비중을 균형 있게 설정하며, 종국엔 그들의 직접적인 대면을 유도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들 연작을 숨죽여 봤던 경험은 쉬이 잊히지 않습니다.

영화에선 자행의 기억을 훈장처럼 내보이는 이들에게 감독이 책임을 묻자 '다 지난 일 아니냐'고 반응하는 이들의 모습이 삽입됩니다. 피해자들은 '잊어야 한다'는 말로 무력함을 대신합니다.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는 다른 방식들이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물어봐야 할 것들이 생겨납니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적 사건은 단일한 기억으로 존재하는가? ) 60년대에 벌어진 일본의 학생운동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마이 백 페이지> My Back Page, 2011 도 비슷한 질문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나요? 그것은 누가 기억하는 것이며, 어떻게 기억되나요.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일까요, 실재하는 현실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최근 화제가 된 모 드라마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역사의 문제란 주로 고증의 여부로 이해됩니다.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는 자세가 치밀한 사실 검증('Fact')의 문제로 치환되는 순간. 더불어 구한말의 격랑에 놓인 인물들 간의 긴박어린 로맨스는 시청자에게 짜릿한 스펙터클함을 부각합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역사는 이렇게 소비되어온 것일까요?

'역사적인 것'의 전형들

역사를 소재로 한 그림의 전형으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이 인용됩니다. 채운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서구에서 역사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프랑스 혁명 이후라고 합니다. 다비드는 바로 그 중심에 있었던 화가였습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Oath of the Horatii, 1784 라는 이름의 회화는 로마 시대를 소재로 합니다. 한쪽에는 호라티우스 세 형제가 로마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하는 모습이, 다른 한쪽에는 몹시 슬퍼하고 있는 여성과 아이들의 세계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칼을 부여잡은 남성들의 단결된 모습은 직선적이고, 정치적으로 공적인 에너지가 충만합니다. 늘어진 여인들과 아이들이 자아내는 비탄은 앞서 것과 대비되어, 도리어 정치적인 명분을 조명하는 데 일조합니다. 같은 화가가 그린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1799 도 사정은 같습니다. 로마 제국의 남자들이 전리품의 하나로 강탈한 사비니 여자들이 있습니다. 이윽고 사비니의 남자들이 그녀들을 되찾으려 로마로 향하자, 보다 못한 여인들이 둘 세력의 중재를 시도합니다. 싸워봤자 과부가 되거나 고아가 되거나, 여인들의 시련은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비드가 이 작품을 남긴 이유는 당시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과도시대에 만연했던 갈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화가는 중재라는 메시지를 통해서 현실에 어린 갈등의 봉합을 의도한 것입니다.

모쪼록, 역사란 그렇게 현재의 모범이 될만한 과거를 취사하는 방식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납니다. 상기된 과거란 선택에 따른 결과이자, 숭앙해야 할 가치를 전파하는 데 기여합니다. 그러면 되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치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어떤 역사적 이미지가 '기억할만한 가치'로써 소환될 적에, 과거와 현재가 관계 맺는 방식을 문제적으로 바라볼 이유가 생깁니다. '풍속'이라는 말을 굳이 쓰면서까지, 진정 역사적인 것과 풍속적인 것을 구분하려는 태도의 저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조금 더 시기적으로 가까운 사건으로 2차 대전 시기의 유대인 학살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예시할 수 있겠습니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에는 유대인 추모 공원이 있습니다. 피터 아이스만은 이곳에 높낮이가 다른 2711개의 비석을 설치해놓았습니다. 방문자들은 비석 사이로 걸어 다니고, 때로는 그 위에 걸터 앉으면서 사건을 환기하게 됩니다.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이스라엘 작가인 메나쉬 카디쉬먼이 제작한 '메모리 보이드' The Memory Void에 눈길이 갔습니다. 유대인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인데, 학살된 유대인 얼굴 모양의 철판이 바닥에 넓게 깔려 있고, 관객들이 그 위를 걸어 다니면 주변에 쇳소리가 신음하듯 마찰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5.18 기념 공원에 가면 추모를 위해 제작된 조형물을 보게 됩니다. 한데, 어딘가 낯이 익습니다. 동상은 당시 군대의 만행에 맞선 광주 시민들을 소재로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격전지에 참전한 용사들을 기념하는 동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입장이 다른 이를 표현한 형식은 정작 비슷한 구도를 차용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함.

기억과 애도라는 유사한 성질을 공유함에도, 어떤 작품은 낯설고, 어떤 작품은 전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념공원의 동상처럼 사실적인 결과물로부터 느껴지는 비장함은 '재현'의 문제와 가닿습니다. 추모라는 행위가 재현의 양식과 결탁할 때, '진정한' 추모란 얼마만큼 역사를 '사실적으로' 기억할 것인가를 줄곧 당부하게 되는 맥락에 귀속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역사를 대했던 자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범'이 될만한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 그런데 이것은 정말로 가능할까요? 10년 전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알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물며 어제 일어난 일을 완벽하게 구상하여 올바르게 나타내 보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재현의 논리는 과연 온전한 추모를 약속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천사, 파국에 임하다

점차 거품같이 불어나는 물음들을 잠시 걷어내 보면, 한 장의 그림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파울 클레가 그렸던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 1920 라는 이름의 작품입니다. 화폭의 중심에는 천사가 놓여있습니다. 어딘가 기묘한 모습의 천사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사란 흔히 '신의 사도'로 불립니다. 클레가 그린 천사의 모습보다 우리의 눈에 한층 친숙한 천사가 프란젤리코의 그림에 보입니다. '수태고지' The Annunciation, 1450 를 전해주기 위해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 통보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 "

이때의 천사는 신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미셸 세르라는 철학자는 매개적 존재로서 천사를 '진동하는 메시지'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듣는 소리도 공기라는 매질의 진동을 거친 (또한 고막과 각종 신경망의 작용을 통과한) 청각적 현상입니다. 매질의 존재가 있는 한, 근원적인 사건은 언제나 2차적인 작용으로 이해됩니다. 그 때문에 천사는 '사이'에 있는 존재이자, 신이나 인간과 동일하지 않은 존재인 것입니다. '모든 메시지는 진동한다'는 말은, 잡음 없이 메시지를 접하기란 불가하다는 말이 됩니다. 신으로 표상되는 진리란 언제나 해석을 문제 삼게 될 것이라는 말은, '모든 메시지는 해석의 문제다'는 말로 바꿔 쓸 수 있겠지요. 천사의 외형조차, 지금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본래부터 순백한 외형을 갖춘 모습이진 않았습니다. (조토의 어느 그림에 삽입된 천사는 잘 먹고 자란 닭?처럼 비대합니다) 세월 따라 천사의 모습도 점차 '구성'되어왔던 것이죠. 가만보면 천사의 성별도 제법 모호합니다. 프랑스의 랭스 성당 정문에 부착되어있는 '천사의 미소' 부조를 보고서 어떤 이들은 '이것이야 말로 천사다운(?) 모습이다'라고 감탄했다고 해요. 그렇다면 여기서 '천사다움'이란?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모호한 중간자, 메신저. 이도 저도 아닌 변이 상태에서 이리저리 진동하는 자들에 어울릴법한 표현일 것입니다.

클레의 천사 그림을 보면, 이것이 잘 느껴집니다. 그려진 자는 사람도 새도 아닙니다. 날개인지 손인지, 날 수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도 애매하죠. 날아 오르려는 자인지, 추락하려는 자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에 감명을 받은 벤야민은 천사의 형상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9번째 테제 중)

천사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역사가는 폭풍에 시달리는 중이고, 그는 자신이 발을 붙인 현재의 더미들에 안주하여 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닥쳐오는 미래와 저만치 과거가 되어 떠밀려가는 잔해들 사이에 놓인 자입니다.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그의 자세는 어딘가 어정쩡해 보입니다. 그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보는 자'인 것입니다. (* 엉뚱하게도, 여기서 저는 일전에 즐겨보았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사도(작품에서 이들은 angel로 번역됩니다)들이 나타나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일으킨다는 전개가 특징적이고, 수습할 수 없는 균열에 방황하는 주인공의 성장이 병행됩니다. 로봇인지 유기체인지, 구원의 신호인지 파멸의 징조인지 알쏭달쏭한 사도의 이미지는 어쨌든 이렇게..^^)

벤야민과 루쉰 : 천사와 여조

벤야민이 클레의 그림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몇 년 전, 루쉰은 <여조>를 집필합니다. '여조'女弔는 복수하기 위한 집념이 강한 귀신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조는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잡으려'하는 탓에 복수의 대상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솥을 엎어놓고 동그란 검댕을 만들어서 귀신을 쫓습니다. 이를 루쉰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잡으려드는 데 반대하는 것이지, 복수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압박받는 사람들은 설령 보복하려는 독한 마음은 없을지라도 남의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오직 음으로 양으로 남의 피를 빨고 살을 먹는 악인과 그 조력자들만이 '남에게 당하여도 따지지 말라', '지나간 잘못은 잊자' 따위의 격언을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차개정잡문 말편』, '여조' 중)

채운 선생님은 천사와 여조의 닮은 점을 짚어냈습니다. 천사와 여조는 모두 일상 속에 균열을 선사하는 위기의 순간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무언가를 알려준다는 것이죠. (메시지 없는 천사 없듯, 사연 없는 귀신도 없습니다!) 이질감이 드는 외형은 "현실 속으로 출몰하는 요철"이자 둘 다 "과거를 단절"시킵니다. (강의안 인용) 이뿐 아니라, 루쉰과 벤야민이 각각 처한 상황도 묘하게 닮았습니다. 루쉰은 '여조'를 발표한 1936년 무렵, 보수적 문학가들과 진보적 청년들과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역사철학테제>가 쓰이기 직전인 1939년에는 독일과 소련 간의 불가침 조약이 체결됩니다. 마르크스와 공산당을 혐오한 히틀러와 나치즘을 적으로 삼은 소련 간의 '뜨악한 조약'은 많은 지식인에게 충격을 줍니다. 한때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벤야민에게 이 순간은 아찔함을 안겨줍니다. 역사적 진보에 대한 기약이 깨져버린 혼돈의 상황. 벤야민은 불현듯 잔해가 나뒹굴고, 파괴적으로 흩뿌리는 현재성의 돌출로부터 '희미한 메시아적 힘'(테제 2)을 발견합니다. 클레가 출현시킨 천사로부터 각인된 역사적인 깨우침을, 벤야민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말은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의 매순간순간이 인용가능하게 될 거라는 뜻이다. 살았던 순간들 하나하나가 최후의 심판일이 될 날의 의사 일정이 인용 대상이 될 것이다."(테제 3)

기술의 역사? 구성의 역사!

인용한다는 것은 출처가 되는 대상과 그것을 기재하려는 대상 간의 관계를 설정하려는 행위입니다. 과거의 한 대목을 내부의 연속성으로부터 탈취해내고, 현재의 해석을 가미하여 새로운 의미를 기술합니다. (단장취의 斷章取義) 벤야민에게 역사가란 곧 인용하는 자이고, 섬광처럼 붙잡힌 과거로부터 현재의 탈구를 만들어내는 자입니다.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휙 지나간다.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과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 (테제 5) ...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과제는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다. (테제 6)"

역사적 유물론자인 벤야민이 비판의 날을 세우는 대상은 '역사주의자 역사가'입니다. 이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는 진보를 믿으며,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현재의 인과를 도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자입니다. 역사주의적 역사가는 승리자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며, 지배자들의 개선 행렬에 동참합니다. 이들에게 역사의 물증은 곧 전리품을 말하며, 그것을 문화재라 칭하여 보관합니다. 하지만 역사적 유물론자는 문화재들에 거리를 두고 그것을 바라봅니다. 반대로, 역사주의자들에게 역사란 거리를 둔 채로 미적으로 향유하면 그만인 어떤 것입니다. 역사적 유물론자임을 자처한 벤야민은 역사주의자들의 허점을 '기록'과 '전승'이라는 단어로 묘파해냅니다.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 그리고 문화의 기록 자체가 야만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 전승의 과정 역시 야만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테제 7) 역사적 유물론자는 "가능한 한도 내에서 그러한 전승에서 비켜"서고, 일정한 인과의 방향성을 거스르면서 역사를 '솔질'하죠.

 
"역사는 구성의 대상이며, 이때 구성의 장소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시간jetztzeit으로 충만된 시간이다. (테제 14) ... 역사의 연속체를 폭파한다는 의식은 행동을 하는 순간에 있는 혁명적 계급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대혁명은 새로운 달력을 도입하였다. (테제 15) ... 역사주의가 과거에 대한 '영원한' 이미지를 제시한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제시한다. (테제 16)"

그러므로 역사가라는 말은 과거를 보존하는 무덤 지기가 아닙니다. 역사가는 단일한 철로와도 같은 '역사의 연속체'에 균열을 내며, 현재적인 투쟁 속에서만 과거와 연관을 맺을 수 있음을 증명하고, '지금시간'이 당면한 '예외'이자 '비상사태'임을 몸 바쳐 설파하려는 자에게 어울릴 이름입니다. 벤야민은 좀 더 과감한 비유도 서슴지 않습니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주의라는 유곽에서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창녀에게 몸을 던지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그는 자신의 힘을 제어할 줄 알며, 역사의 연속체를 폭파하기에 충분한 정력을 갖고 있다." (테제 16)

이로써 현재의 젊은 세대가 그 시절의 '홀로코스트'나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사건들, 혹은 그동안 '역사주의'의 그늘이 드리워져 아직 언명되지 못한 소소한 사건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를 묻는 말 앞에 조금씩 입을 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득, 섬광처럼 마주치는 크고 작은 순간을 잡는 것. 예컨대, 한 차례의 이별을 겪은 사람에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무심코 환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픔을 지닌 사람에게 그 사람을 직접 떠올리게 하는 사진을 들이미는 행위는 사뭇 염려스럽습니다. 이별이란 사건이 연인 간의 사랑이나 누군가의 죽음을 아우를 때, 기억은 그 사람이 좋아했던 음식의 맛이나 우연하게 마주친 습관적인 언행으로부터 지금과 이곳에 무심코 소환됩니다.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음에도 그것을 언급하려는 자세를 신중히 고민할 적에, 재현의 논리는 그 효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애도의 윤리가 그들과 우리의 관계를 맺어줄 것입니다.

성좌의 포착, 꿈과의 거리

 
"보편사의 방법론은 가산(加算)적이다. 그것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 급급하다.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구성 Konstruction의 원칙에 근거를 둔다. 사유에는 생각들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사유는, 그것이 긴장으로 가득 찬 상황(성좌 Konstellation) 속에서 갑자기 정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상황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 " (테제 17)

이렇게 역사가 구성되어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순간을 벤야민을 '성좌' Konstellation 라는 말 속에 집약시킵니다. 별들은 서로 다른 운동 속에서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냅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바라보는 별은 수억 광년 전의 흔적이자, 대개는 이미 사라지고 없을 존재들의 증거입니다. 벤야민에게 별자리는 본래부터 누군가에 의해 이름 붙여 전승되어온 것이 아닌, 자신의 눈이 마주쳐서 낯선 이름을 부여해야할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역사가란 바람이 스치듯 현저하게 반짝이는 현재성의 섬광으로부터 과거를 낚아 올리는 사람입니다. 이는 <일방통행로>에서 제시한 '꿈'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이제 막 꿈에서 깬 자는 잠에 취한 상태이기에 식욕이랄 게 별로 없습니다. 식탁 위에서 반찬을 깨작이면 부모님께 한소리 듣죠. (세수나 하고 와!) 벤야민도 잘 알고 있나 봅니다. "하루와 마주치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든 아니면 내면의 집중을 위해서든 식욕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아침식사를 물리친다. 그만큼 그는 밤의 세계와 낮의 세계 사이의 단절을 회피한다. ...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은 마치 잠꼬대하듯이 꿈을 이야기한다." (『일방통행로』)

벤야민에게 과거란 꿈과 같은 것입니다. 꿈을 부여잡고 잠에 취한 자는, 말하자면 과거에 매몰된 자인 것입니다. 벤야민은 단언합니다. 과거에 취한 자는 과거를 해석할 수 없다! 달콤한 꿈인가 끔찍한 꿈인가에 상관없이, 꿈을 해석하기 위해선 내가 꾼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떠 먹어야합니다. 역사철학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과거를 해석하려는 자도 현재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벤야민은 더 재미난 비유를 소개합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깨우기 위해선 왕자의 달콤한 키스가 아니라, 주방보조를 후려친 요리사의 매가 필요하다고 말이죠. (<톰과 제리> 에서 톰은 이따금 제리가 내려친 후라이팬을 맞습니다.. 대략 그런 것처럼,) 왕자의 키스는 잠결에 또 다른 도취를 가미하려는 것인 반면, 매질은 기존 상황과의 무자비한 단절을 초래합니다. 벤야민은 전장의 폭격으로 파헤친 땅 위에 드러난 골동품들로 비유를 이어갑니다.

이야기 속의 미녀는 어떤 진리이자 과거로, 왕자는 역사주의자, 요리사는 역사적 유물론자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앞선 비유들은, '꿈을 해석하는 자가 되려면 꿈에서 확실히 깨어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안겨줍니다. '옛날 옛적에'라는 말에 취하지 않도록 채비할 자는 역사가일 것이고, 이것은 비평가의 자세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는 어떤 소설이나 영화의 감상적인 측면과 못내 타협합니다. 실은, 무엇인가에 흠뻑 빠져보는 경험은 중요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꿈꾸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뿐더러, 도리어 매번 달라지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자신의 꿈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려면, 그것으로부터 확실한 거리를 설정하지 않고선 불가합니다. 그렇기에 새로움은 가산과 무관합니다. 각성은 탈바꿈하거나 혁명적 위기로 내몰려지는 순간에 도래합니다. 천사가 날갯짓을 준비하듯이, 죽었던 귀신이 우리 곁을 찾아오듯이, 가라앉은 잔해가 상공으로 역류하듯이, 과거가 현재에 맞부딪히며 해석의 불씨가 번쩍이는 순간에 찾아옵니다.

과거는 현재와의 관계에서 매 순간 생겨나고, 꿈도 종종 꾸게 됩니다. '역사적 글쓰기'란 지나간 것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것, 이미 지나간 것을 마침 당면한 것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입니다. "과거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다시 쓰는' 현재의 실천"입니다. (강의안 인용) 혁명이란 과거의 것을 보존하려는 것도, 이익을 목적으로 의도된 방향을 부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역사는 모범적 사례들의 집합이 아니기에, 무한한 잠재성의 차원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역사는 단지 배경으로만 전락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은 많은 영화나 드라마들은 볼거리를 위하여 시대를 병풍으로 삼고, 로맨스나 액션의 요소를 가미한 주인공을 등장시킵니다. (이리하여 상투성은 제거되지 않고, 다만 신속하게 은폐됩니다) 이것은 무대가 될 공간을 먼저 채색하고, 그 위로 정물들을 기입하려는 풍경화의 방식과 겹쳐집니다. 그러는 한편, 역사의 문제로서 사실 여부에 급급해하는 현재를 내세울 경우, 현재란 언제까지나 과거의 권위에 종속되기 마련입니다. 결국 역사란 고스란히 드러날 수 없는 것이자, 그저 순간적으로 붙잡혀지는 것이 됩니다. 벤야민이 바라보는 과거는 가만히 장식되길 원치 않고, 종종 붙들려져 해석되어지길 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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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오브 킬링>의 발상은 제게 여전한 탄식과 경탄을 아울러 안겨주지만, 개봉 당시에 일부 평론가들은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적용하여 작품을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구체적인 시연을 통해 끔찍한 상황을 재연하려는 행위는, 다수의 관객과 유족들에게 잔혹한 체험을 (정황상의 불가피함을 이유삼아) 노골적으로 정당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의 영화가 기억과 역사에 관한 이토록 간단없는 사유를 이끌었던 경우는 오랫동안 좀처럼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앵포르멜 informel 운동을 주도한 포트리에의 '인질' Otages, 1945 연작에 비하면, <액트 오브 킬링>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여러모로 '문제적'입니다. 한편, 이러한 충격 없이는 이미지에 자칫 무감해질 수 있을 시대를 이미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벤야민의 단상도 물리적인 시간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혁명은 반드시 며칠 후를 기약하지도, 몇 분 뒤의 변덕을 용인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역사철학은 지나쳐온 것을 다르게 이해할 활로를 열어놓거나, 또 다른 여지를 마련해놓는 작금의 자세에 방점을 놓았습니다. 매 순간이란 말은 초침의 째각이는 운동이나 달력의 날짜와 상관없을 꾸준함을 내포합니다. 파국에 놓인 어정쩡한 천사의 그림에서 시작된 사유는, 어쩌면 저 밑바닥마저 긍정할 수 있을 에너지를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땅속 깊이 잠재해있을 의미의 영도(零度)마저도 희망으로 삼아버리는 자세. 군데군데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느라 정리가 조금 길어졌습니다. 놓친 부분도 있어 아쉽지만, 후기를 여기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파괴적 성격"에서 벤야민이 말하기를, "후손에게 사물을 물려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사물을 물려주는 방법은 못 만지게 해서 보전하는 것이다. 한편, 후손에게 상황을 물려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상황을 물려주는 방법은 실용되게 해서 청산하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중)
전체 4

  • 2018-07-21 12:09
    역사란 현재적인 투쟁 속에서 과거와 연관을 맺는 것! 현재 나를 관통하는 가치들과 싸우지 않으면 과거에 매몰되며 살아갈 뿐! 왜 역사가 필요한가, 두루뭉실하던 역사의 개념이 조금이나마 정리된 것 같아요.

  • 2018-07-21 14:04
    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현실 속에서 문제를 구성하면서.

  • 2018-07-22 00:39
    벤야민의 비유는 참 흥미롭네요! 특이 주방보조를 후려친 요리사의 매는 무척. 그리고 톰을 내리치는 제리의 후라이팬을 추가해주는 한역샘의 비유도 또한.
    (저는 그런 후라이팬이 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내가 꾼 것이 꿈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한다는 것, 매질을 통한 무자비한 단절의 필요성이 재밌습니다.
    역사는 배경으로 전락할 수 없다는, 과거는 가만히 장식되길 바라지 않고, 종종 붙들려져해석되어지길 바라고 있다는 설명도 좋구요! 처음에 나왔던 드라마와 역사 이야기가 다시 끝에 정리되어 나오네요! (이런걸 수미상관 구조라고 ...) 너무너무 꼼꼼하고 풍성한 후기를 또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재밌게 잘읽었고 정리하는데 되움이 됐어요~

  • 2018-07-23 13:54
    요즈음 주변에 월철하러 다닌다고 그래서 당분간 월요일엔 시간이 없다구 마구 떠벌리고 있습니다.
    4강 까지는,뭐 마지막 강의까지 마찬가지이겠지만 참 어렵다,다리가 저린다,그런데 졸립지는 않다, 반면에 젊은 학인들의 순수함과 진지함에 감동입니다.
    4강 까지의 강좌와 후기 잘 듣고 잘 읽었습니다. 단어가 던져주는, 그림이 보여주는 속살들을 다시 생각하는 힘을 얻습니다.
    강좌와 후기에도 진지함이 묻어나는 규문의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