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미셸 푸코 : 이미지, 차이들의 놀이 (feat.앤디 워홀)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18-07-27 00:22
조회
128
Thinking Monday 이미지를 사유하다
  1. 미셸 푸코 : 이미지, 차이들의 놀이 (feat.앤디 워홀)


푸코는 회화를 글쓰기의 주제로 자주 가져와 사유했었다고 합니다. 르네 마그리뜨는 반향을 일으켰던 푸코의 저작 <말과 사물>의 독자였기도 하며 푸코와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에세이는 마그리트 작품에 대한 책이기 이전에 푸코의 회화론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 푸코는 현대 회화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차이의 개념, 재현이라는 현대 회화의 오래된 전통을 깨는 것으로서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1. LSD의 효과를 play시키기!


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 대한 서평인 <철학극장>에서 푸코는 철학이란 가면을 쓰고 연극이 벌어지는 극장, 무대와 같은 곳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철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진부한 사유의 과정이 아니라, 매회 공연마다 다른 방식으로 캐릭터를 펼쳐내고 다른 감동, 당혹, play를 보여주는 무대가 됩니다.

<철학극장>에서 (본인의 경험에 입각한?) 마약 LSD가 보여주는 vis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세계는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경계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흔들리는 상태이며 색채에 대해서도 굉장히 예민해져 환상적인 것들로 펼쳐진다고 합니다. 현상과 윤곽이 고정되지 않고 진동하며 일정한 형상의 패턴을 만들어 내는 경험. “범주들의 우월성을 제거하자마자 무차이성의 지반을 잡아 찢어내 버리고 탈중심화되고 나선형적이며 울려 퍼지는 것으로 제시할 뿐 아니라 매 순간마다 환영-사건들로 가득 차게 만든다.(<철학극장> 강의안 재인용)”

이는 마치 불교에서 명상을 깊이 할 때 느껴지는 지각장과 청각장의 변화에서 보이는 비전과 유사합니다. 심층지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감각적 각성. 강의시간에 시각자료를 통해 봤던 LSD의 비전을 표현한 이미지와 불교의 만다라의 형태와 어딘가 묘하게 닮았다고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런 감각적 지각적 ‘활성화’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처럼 마약은 우리의 고정된 감각, 습관화된 인식 작용, 딱딱한 사유 체계에 균열을 내는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습관적인 우리 사유의 구도, 언어로만 이뤄진 루틴은 미세한 감각과 지각들을 틀에 우겨 넣음으로서 그 차이들을 무시합니다. 푸코는 마약이 세계에 대한 활성화된 감각으로서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에 주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약에 의존한 새로운 지각은 어느 순간 다시 새로움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늘 수동적입니다. 이를 박탈된 상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마약에 준하는 어떤 것을 만나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니체는 “예술은 우리가 진리로 숨 막혀 죽는 것을 막게 하려고 생겨난 거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철학은 진리만을 얘기하고, 국가는 선만을 이야기합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거짓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늘 사실적인 것, 더 진짜인 것, 진리이고 선인 것을 찾으려는 틀 속에서 예술은 차이를 발생시킵니다. <철학극장>에서 푸코가 말하는 철학이란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전제하고 그 진리를 찾아가는 사유의 노동이 아닙니다. 마치 배우들이 무대에서 유희를 벌이듯 철학·사유함 역시도 하나의 플레이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만들어진 사유가 아닌 사유의 생산, 발생 자체를 물었다고 합니다. 생각한다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바로 우리의 습관화되고 패턴화된 사유방식인 상념이라는 것과 더 이상 그 판에 박힌 상념이 작동하지 않고 미쳐버릴 때 일어나는 새로운 생각으로서의 사유가 있습니다. 상념과 사유. 세상에는 우리가 가진 일상적 관념들로 환원되지 않고, 거기에 우겨넣어지지 않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것들과 마주치지만 그걸 끝까지 밀고 붙들고 있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해한 척, 모른 척 넘어가야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유들을 화두라고 하는데, 그것을 오래도록 치열하게 붙들고 사유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 화두를 깬다고 표현합니다. 기존의 사유 패턴으로 잡히지 않는 것들을 끝까지 밀고나가 결국에는 기존의 패턴과 틀을 깨어버린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세상 속에는 우리의 감각 체계, 사유 체계로 포착되지 않는 수많은 사건과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고정되고 고체화된 언어나 사유 체계 안에서 지각하려 하지만 세계의 실상은 고정된 상태가 아닌 기체 내지 액체와 같이 유동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즉 모든 사물들이 규정되지 않고, 정의되지 않은 채 플레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물들은 해석되지 않고, 의미를 담고 있지 않는 기호로서 떠다니며 상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그것들을 감각하고 지각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정된 사고의 방식을 깨버려야 합니다. “뻔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올바른 모델들이 아니라, 눈을 뒤집히게 하고 영혼을 당황시키면서 다른 것이 되기를 강요하는 기호들과의 우연한 만남. 판단하고 분석하고 검증하지 말고 흐르고 날고 도약하라고 강요하는 기호들.” 철학도 예술도 반복되어온 우리 사고와 언어의 틀 속에 가둬두는 것이 아닌, 무대 위에서 매번 상연되고 플레이되는 기호로서 만나기!

 
  1. 재현과 재현의 역사.


<윌로 씨의 휴가>라는 제목은 마치 윌로 씨의 휴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윌로 씨는 휴가지에서 짐을 날라주고 잡일을 해주는 드라이버이자 일꾼입니다. 휴가 온 사람들의 잡일들 돕는 역할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제목처럼 그 휴가지에서 진짜 휴가로서 지내는 사람은 바로 윌로 씨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자리만 옮겼을 뿐 이전의 삶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모험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이 예정된 것들을 하고 상식적인 것들을 합니다. 반면 윌로 씨는 일을 하는 와중임에도 조각배 위에서 뭔가를 끄적거리기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오밤중에 폭죽을 터뜨리는 등 사건과 사고로 가득 찬 시간들을 보냅니다. 마지막 날 사람들은 윌로 씨가 휴가를 망쳤다고 사람들을 투덜거리지만, 아이들과 몇 노인들은 지루한 휴가를 재밌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윌로 씨에게 전합니다.

반복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휴가를 온 사람들과 윌로씨에게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휴가지에서 영위하려 했던 것은 규정적 반복, 즉 재생산으로 서의 반복입니다. 조건이 변함에도 자신이 해오던 것들을 그대로 재생하려는 경향인 것입니다. 자기 삶의 패턴을 다만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윌로 씨는 계속해서 차이의 반복, 생산으로서의 반복을 보여줍니다. 일상 속에서 매 순간 차이를 만들어내는, 휴가 속에 있는 일상인 것입니다.

 

마그리뜨

이미지를 본 순간,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사물을 환기하게 합니다. 그 사물이라 함은 이미지가 지시하는 바인 원본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체를 가진 그림만 보아도 부랴부랴 그것이 지시하는 바인 원본을 검색합니다. 우리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원본을 떠올립니다. 마그리뜨의 검은 형상이 그림자가 그냥 종이 위의 얼룩일 뿐입니다. 마그리뜨의 그림은 이미지 자체가 사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15세기 서양 회화는 원근법의 발견과 함께 수학적, 과학적 정밀한 계산으로, 어떻게 우리 눈에 보이는 3차원을 회화의 2차원에 고스란히 투영해 내는가에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세상을 얼마나 더 있는 그대로(눈에 보이는 그대로이지 존재하는 그대로는 아닙니다만) 재현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이것이 서양 회화 500년의 전통으로 이어진 재현의 역사입니다.

마그리뜨의 작품들은 우리가 얼마나 이미지를 단지 원본의 투영으로만 보고 있는지를, 우리가 얼마나 사실적인 것에 속고 있었는가를 깨치게 합니다. 밖의 풍경과 연속되듯 외부와 구분이 안가는 캔버스. ‘아니, 사실은 아주 정밀하게 계산되어 밖의 풍경과 겹치게 놓여진걸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한 번 더 재현의 논리에 갇히고 맙니다. 그 회화가 지시하고 있는 논리적이고 이해 가능한 실제 모습이 있을 거라는 믿음. 비논리를 이해의 부재상태로 간주하려는 습관. 어딘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을 거야라고 하며 자기 지각을 의심하더라도 이미지와 원본의 지시 관계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은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비논리도 아닙니다. 그냥 녹색, 흰색 등의 물감이 혼합된 캔버스 천입니다. 깨어져도 바깥과 연속된 창문, 열리면 밖은 어둠인 것 같으면서도 창문 시트지도 아닌 구름과 바다.

이런 그림들은 원근법이란 게 얼마나 허망한 인간 시각의 트릭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쉽게 이미지를 그것이 지시하는 ‘원래 이러이러한 모양’이라는 틀 속에서만 보는가의 질문하게 합니다. 그림을 보면서 그 그림이 참조하고 있는 모델을 떠올리는 우리는 차이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규정적 반복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회화적 현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지요. 그냥 선, 색, 얼룩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그리트는 재현의 논리의 문제를 아주 재현적인 방법으로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원본과 모사의 관계를 성립시키지 않는, 회화에 대한 은유로서.

푸코는 여기서 상사, 시뮬라리티 simularity의 개념을 말합니다. 서로 닮음. 거기에는 원본과 모사라는 위계가 없습니다. B를 닮은 A라는 방향성도 없습니다. 원본과 그 방향성을 상정하는 닮음의 단어는 resemblece, 유사성이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까 싶습니다. 여기서는 원본과의 닮음, 즉 원본이 성립되고 동시에 정도에 따른 위계가 성립됩니다. 더 이상 실재를 그대로 담아내는 모사와 재현으로서의 예술이 아닌, 차이들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위계 없는 反재현의 역사를 갖는 예술로 탈바꿈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그네트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현실의 반대인 현실이라는 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뿐일까요? 그들은 현실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실체화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이한 것들로 가득한 것이 현실입니다.



자연의 은총, 1963. 르네 마그리뜨

<자연의 은총>이라는 그림에는 나무에서 자라난 나뭇잎 형상에서 위로 갈수록 새의 현상과 비슷해지는 나무도 아닌 새도 아닌 어떤 존재가 있습니다. 이건 나무라고도 새라고도 뭐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머릿속의 분류표에서 이것은 새나 나무로 확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괴물, 마녀, 타자성 따위의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하지만 자연은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어떤 규정성과 범주에도 묶이지 않지요. 마그리뜨는 하나의 언어적 규정성 속에 갇히지 않는 생성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발을 닮아가는 부츠, 바다를 닮아가는 배 등. 그것은 발도 신발도 아닌 것, 서로 닮아간 모양입니다. B와의 마주침 속에서 A는 A 아닌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B도 아니지요. 수영이란 육지에서의 개체성을 잃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와 물이 새로운 관계형성에 들어가는 것. 푸코는 이것을 상사라고 했고, 들뢰즈는 이것을 상호-되기라고 표현했을 거라고 합니다.

 

앤디 워홀



나는 너와 포드자동차를 사랑한다, 1961. 제임스 로젠퀴스트

미국의 대중문화가 다른 문화들을 잠식하던 20세기 초반, 추상미술의 시대 이후 팝아트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가로로 삼등분된 거대한 화폭에 명품 차와, 영화의 섹스 신, 미국인들의 인스턴트 즉석 라면을 확대해서 가득 차게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각각 권력과 색, 식에 대한 상징이기도 한데, 그 세 가지는 채워도 채워도 충분치 않고, 더 큰 자극을 바란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끊임없이 허기짐을 유발시키는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압도적인 사이즈로 표현하면서 다른 식의 이미지를 생산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이는 대중문화가 우리의 일상 속에 아주 깊숙이 밀고 들어온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나는 미술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자라지 않았다, 나는 TV속의 미키마우스를 보고 자랐다.”라고 말한 앤디 워홀은 팝아트의 선구자라고 불리기도 하며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를 계속 뛰어다니며 스캔들을 만들어내는 시대의 셀럽이었습니다. 그는 대중문화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가져옵니다. 뒤샹 이후로 상품이미지가 예술의 범주를 허물게 되면서 현대 예술에서 자기가 한 것만 예술로 여기지 않은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일찍이 자신의 아뜰리에를 ‘팩토리’라고 불렀던 워홀은 그보다 더 나아가 작품에 대해 어떠한 작가성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은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고, 원본도 없으며, 창작 주체의 흔적도 없습니다. 그는 고급미술과 상업미술의 경계를 허뭅니다. 상업미술은 우리가 매일 보는 상품, 광고, 더 나아가 정치인, 연예인 등의 아이콘을 가져옵니다. 너무 흔해서 미술로서의 가치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들을 가지고와 그 이미지들을 그대로 찍어냅니다. “대중적 이미지들을 ‘미술관 속 고급미술’이라는 맥락에 침투”시킵니다. 그것은 복제, 차용, 반복에 가깝지 창조는 아닙니다.

푸코는 앤디워홀이 보여주고 했던 것을 시뮬라크라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합니다. 그것은 원본 없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지가 재현의 논리 속에서 지시하고 있는 원본을 둔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가, 역사적인 것들인가, 아름다운 것들인가를 재현하는가. 그림의 가치는 곳 원본의 가치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코카콜라는 무었을 재현하고 있을까요? 무엇을 지시하고 있을까요? 상품은 기본적으로 원본이 없습니다. “코카콜라야 말로 민주주의의 산물”이라고 워홀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같은 것입니다. 원본이 있어서 이미지가 그것을 복제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가 원본성을 치환하는 것입니다.

<기술 복제와 예술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은 지금까지의 작품은 원본이 있어서 그 원본이 가지는 유일무이함의 아우라가 있었다만, 지금은 이미지가 그 원본을 압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시대의 작품은 원본에서 확인할 수 없는 걸 오히려 복제 이미지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구글에 들어가면 모나리자의 세부컷과 확대컷들이 떠돌지요. 유투부에서는 x선 촬영으로 명화들의 밑그림까지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미지들이 원본을 압도하고 있는 격입니다. 어떤 것이 원본인지 알 필요성도 없게 된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딥페이크 영상을 보면 목소리와 표정 말투가 완전히 동일한 오마바가 트럼프를 비난하는 말을 합니다. 원본과 카피, 이미지와 실재의 위계가 전복된 시대, 이미지가 원본과 실제를 구축하는 실로 “미친 이미지들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시뮬라크라의 2가지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실제가 있는 자들에게는 이런 현상이 위협이겠고, 실상은 보기에 따라 매번 다르게 형성되는 시뮬라크라로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능동적 해석의 가능성을 찾게 합니다.



FA18-4751 마릴린 먼로, 1967. 앤디워홀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업은 어떻게 이미지가 원본을 흘러넘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똑같은 복제로 보이는 실크스크린 판화작업은 그 안에 차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동일하게 찍어내도 매번 잉크의 농도와 채도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베르그손이 이미지는 물체이고 끊임없이 운동하는 단면들의 합이라고 말했듯이 이 실크스크린들의 합이 그 대상인 것입니다. 마린린 먼로는 이런 방식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크스크린은 존재를 위협하는 가짜 복제가 아니라 이 세계를 구성하는 단면들일 뿐입니다. 결국 세상에는 이런 시뮬라크라들 밖에 없다면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질문만이 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미지를 생성해 낼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현재 속에서 과거의 이미지를 해석해 낼 것인가.

결국은 해석의 싸움이고 해석의 역량이 중요한 것입니다. 시뮬라크라의 시대. 이 시뮬라크라들로 넘쳐나는 세계에서는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재현할 만한 것인지 위계화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미지든 Tv 속에서, 스마트폰 속에서 납작해지고 나란해집니다. 이미지는 위계 없이 동일하게 흘러넘치고 거기서 해석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 됩니다. 우리가 해석의 역량을 능동적으로 훨씬 더 크게 발휘하지 않으면 이미지의 수용자가 될 뿐입니다. 유투브의 채널이 사람들이 욕망에 따라 구성되듯, 우리 스스로가 채널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습니다. 딥페이크와 같이 실제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이미지가 지나친 왜곡과 공격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채널을 만들어서 우리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을 만들지 못하면 혼란만 남을 뿐입니다.

어줍잖은 이해력으로 마구 쓰다 보니 알맹이도 없이 길어지기만 했습니다. 들은 것을 재현하려고 했지만, 다른 의미의 反재현이 된 것 같네요...ㅠㅠ 급마무리에 심지어 늦기까지...

다음 시간은 마지막 강의인 6강 / 질 들뢰즈 : 시간의 이중화, 그리고 이미지의 분열적 생성 (feat. 장 뤽 고다르)입니다! 모두가 참석해 주실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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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29 16:50
    앗, 민호씨가 후기를 남겼군요.. 게으름 때문에 퇴고가 늦었지만, 저번에 약속한만큼 늦게나마 후기를 남겨보겠습니다! 복습겸 잘 읽었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