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 5강 후기 : 미셸 푸코 : 이미지, 차이들의 놀이 (feat.앤디 워홀)

작성자
HY
작성일
2018-07-29 16:59
조회
109
빛★나는 두상만큼 반짝이는 푸코의 사유는 약에 취한듯, 나비가 되어 우둔함으로 가득찬 현실을 종횡합니다. 그는 마그리트의 유머가 묻어난 꽃가루를 견인하면서, '무차이성의 지반'이 드리운 우리의 피부를 벌처럼 쏘아댑니다. 재현(representation)에 맞선 푸코는 흔쾌히 전사가 됩니다. 날선 폭로의 현장 속에 앤디 워홀과 윌로씨도 동참했습니다. 가차없지만 흥이 살아있는 재현과의 전쟁! 배운 바를 최대한 구슬리면서, 무대삼아 역량껏 구술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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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걸기 : LSD와 멜랑꼴리

푸코는 "사유의 원천"이 되는 LSD의 효과를 예찬합니다. (이게 웬일?) 마약은 인간의 미세한 감각을 일깨웁니다. 마약에 의해 확장된 감각과 고양된 의식은 분별심을 누그러뜨리고, 세상을 달리 인식하게 만듭니다. 색채는 화려하다 못해 현란해지고, 본래의 구획된 영역을 눈부시게 넘나들며, 각종 형상은 유동성 있게 변합니다. (사이키델릭 아트 psychedelic Art 는 이것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해줍니다.) 마약 성분은 신체 내부의 신경체계에 영향을 주어서 기존의 소통 체계에 균열을 낸다고 해요. 언어란 이미 규정된 사고의 체계를 표상합니다. 반대로, 이는 발생적인 것을 포착하기가 어렵다는 말도 됩니다. 마약을 섭취한 이들은 곧잘 '헛소리'를 내지릅니다. 문법에도 맞지 않고, 이상야릇하거나 어딘가 상식적이지 않은 반응들이 터져나옵니다.

 
"이 환각제는 범주들의 우월성을 제거하자마자 무차이성의 지반을 잡아 찢어내 버리고 우둔함의 음울한 무언극을 분산시킨다. 그리고 이 일의적이고 무범주적인 덩어리를, 단지 잡다하고 동적이고 비대칭적이고 탈중심화되고 나선형적이며 울려 퍼지는 것으로 제시할 뿐 아니라 매 순간마다 환영-사건들로 가득차게 만든다 ... 마약은 다른 효과도 낳는다. 곧 사유는 고유한 차이들을 한 지점으로 모으고, 그 배경을 제거하며, 사유 임무의 부동성 안에서 그 말 없는 몸짓을 통한 관조적인 우둔함을 박탈해버린다. ... 그렇지만 그 차이들을 매우 미세하고 서로 떨어져 있으며 미소짓는 영원한 사건들로서 반짝거리며 나타나게 하는 하나의 지반을 확립한다." (푸코, <철학극장> ; 강의안 인용)

가히, 마약에 대한 예찬으로 읽혀집니다. 푸코의 멋들어진 문장에 담긴 저의는 무엇일까요? (대마초..합법화?)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열어줄 마약은 되려 스스로를 컨트롤 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마약 자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흡사 마약을 접한 것과도 같은 전환을 기대하고 있을 푸코의 속뜻일 겁니다. 공교롭게도 사이키델릭함을 소재 삼은 그림들과, 불가적 깨우침을 소재로 한 만다라 그림이 하나로 겹쳐집니다. 그러므로, 진지한 수행의 관점에서 LSD를 조망할 필요가 생깁니다. 기존의 사유 체계로 포착할 수 없는 미세한 감각의 운동을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 부지런히 진동, 변이, 생성되는 세계의 실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적어도 구도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마약에 '준하는' 지각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사유하기는 위안이나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말하기에 앞서 전개된 우울함에 대한 논의도 자못 예사롭지 않습니다. 창조를 업으로 삼는 예술가가 흔히 겪는 증상이 바로 우울 Melancholia 입니다. 창조를 위한 예술로서의 저항은 일상에 만연한 클리셰와의 사투를 가리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일상을 역류하는 낯선 리듬에 자신의 신체성을 예고 없이 투신해버립니다. 그 증거로 나타난 에너지가 바로 우울인 것이죠. 하여, 사유와 느낌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습관화된 감각으론 깨우침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우울함을 재고할 여지를 흔쾌히 마련해준 친절한 푸코 씨.


Play Time! (with 윌로씨)


 
"그것은 무대 위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반복한다. 즉 단 한 번에 그것은 자신을 그것을 주사위통 밖으로 던져 버린다. 우연, 극장, 그리고 비틀림들이 반향을 울리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우연이 그 세 가지 사이에서 반향을 강요할 때 사유는 무아지경이 되고, 사유할 가치를 지니게 된다." (<철학극장> ; 강의안 인용)

푸코는 사유의 파격을 주문합니다. 성찰에 동원되는 질문 중에는 판에 박힌 것이 많습니다. 그래선지 앞서 無我之境이란 번역은 매우 절묘합니다. 질문이 화두가 되어 '깨야 하는 것'으로 변용될 때, 많은 선승은 깨우침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엄마가 접시에 음식을 담을 동안에, 아장아장 걸어온 아기가 접시를 만지고 놀다가 깨버립니다. 그래도 아기는 방실방실 웃습니다. (쓸모에 속박?된 접시를 장난감으로 여긴 아기 부처님?) 마찬가지로 '깨지기'와 '깨치기'는 한 끗 차이입니다. 따분함을 유발하지 않으려면, 사유도 놀이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푸코는 철학을 연극의 과정에 비유합니다.

독일의 '뉴저먼 시네마'를 이끌었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말했습니다. "새로운 관객이 없다면 새로운 영화라는 것도 없습니다."(강의안 인용)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관람자뿐이다"고 말했던 클레도 '아직 오지 않은 민중'이자 미래의 관객을 기다립니다. 작품에 담긴 의미를 저자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60년대를 휩쓸었던 '저자의 죽음'에서 멈춰선지 오래. 이로써 작품에 적용될 다채로운 해석, 반짝이는 마주침을 발견할 수 있는 관객의 몫이 커졌습니다. 끊임없는 차이는 반복되는 해석에 의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관객의 책무는 객석에 가만히 앉아 '판단하고 분석하고 검증'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스테이지 위로 난입하고, 무아(無我)적으로 놀아야 하지 않을까요? 리듬에 맞춰 진동하는 자, 이미 '해방'되었습니다. 따라서 머리맡에 놓인 고전을 창조의 무대로 여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베고 잔 책을 재료삼아 꿈꾸고, 일어나 숟가락을 들고 문장을 음미해보는 겁니다. 고전은 섬기고 보존하기 위한 우상이 아닙니다. 다시-쓰기(Re-Writeing)위해 깨어있는 자는 저만치 쌓인 어둠의 더께를 날려 보내고, 다가올 여명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어쩌다 불꽃에 놀아나는 윌로씨의 행적도 깊은 잠에 빠져있던 이들을 격렬하게 깨웁니다. <윌로씨의 휴가>는 프랑스에 정착한 바캉스 문화를 익살스럽게 그려냅니다. 오직 휴가를 위해 온몸을 불사했다고 말해도 좋을만한 이들에게 드디어 바캉스가 시작됩니다. 근데 웬일인지, 누려야할 휴양지의 나날은 점차 일과처럼 단조롭게 흘러갑니다. 사람들은 정해진 일과시간에 맞춰서 밥을 먹고, 테니스를 치고, 카드놀이를 합니다. 주인공 윌로씨는 휴가철을 맞이한 손님들을 운송하는 기사입니다. 그는 해프닝을 만들고 주변인에게 오해도 삽니다. 다만 의도치 않으니, 코믹함은 배가 됩니다. 종일 근-엄한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윌로씨 덕분에 웃음을 되찾습니다. 온종일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그 때문에 점차 휴양지도 들썩입니다. 마지막에는 윌로씨가 실수로 화약창고를 터트립니다. 아닌 밤중의 불꽃놀이는 "똑같이 움직이고, 똑같이 즐기며, 똑같이 쉬고, 똑같이 먹는" 휴가의 현장에 '소란'과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강의안 인용) 또한 윌로씨는 바닷가에 밀려온 페인트통과, 카펫으로 깔린 여우가죽과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자아내며 자신만의 스텝을 밟습니다. 이들의 매 순간을 재미있게 포착한 프레임 안에는 딱히 위계랄 것도 없어 뵙니다.


농담의 힘, 마그리트의 유머


 
"...  부연해서 말하자면 사고를 하도록 유도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웃음이라는 사실이다" (Feat.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중)

웃음이 무기임을 알고 있는 화가. 푸코는 전통적 사유에 일격을 날릴만한 용병으로 르네 마그리트를 고용합니다. 서양 회화의 오랜 전통은 삼차원의 세계를 이차원의 평면 위에 그대로 옮기는 작업을 중시했습니다. 정밀한 재현을 위한 원근법의 발전은 15세기 무렵의 알베르티를 위시한 예술가들의 야심이었습니다. 소실점을 중심으로 구성된 비례에 사물의 위치를 투영시키는 방법의 개발, 그것은 절대적인 중심을 향한 합리적 배치의 예술적 구현이었습니다. 그 옛날의 신 神이 그랬듯이, 이제부턴 인간이 시선의 중심을 이루고 세계의 척도를 자임합니다.

마그리트는 르네상스의 회화론이 오랫동안 축조해온 야심에 균열을 냅니다.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 1933 은 훼방의 증거로 볼만한 작품입니다. 방 안에 캔버스를 받치는 이젤이 서 있고, 캔버스에 그려진 것과 창밖의 풍경이 겹쳐 보입니다. 나무는 창밖에 '실재'하는 것일 수도, 아니면 화폭에 '재현'된 것일 수 있습니다. 마그리트는 묻고 있습니다. '그대로 옮기는 게 중요하다며?' 캔버스와 풍경이 그만 붙어버렸습니다. 마그리트는 '회화란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라는 오랜 비유를 조롱합니다. 자기 논리가 없는 회화란 제 역량을 펼칠 수 없음을 폭로하는 순간입니다.

그림이란 단지 무엇을 보고 그렸다는 사실만 알려주면 끝인 걸까요? 가령 '확대경' The Looking Glass, 1963 을 봅시다. 창문 바깥은 까맣기에 풍경과 일치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오른쪽 창의 위쪽 귀퉁이에 노출된 문틀은 창문이 바깥을 투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창문은 바깥의 풍경을 보여주는 걸까요, 아니면 하늘색과 구름무늬의 시트지가 붙여진 것일까요. 질문은 새로운 질문을 구성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창문을 보면서 바깥의 것을 환기하는가? 즉, 우리는 왜 그림을 보면서 대상이 되는 모델(원형)을 참조하는가? 이것은 저것을 그린 것이고, 저것은 이것을 그린 것이라는 규정성은 그림만의 논리를 부정하는 데 일조합니다. 고유한 색과 선과 면을 가진 회화의 논리에 주목할 때, 원본과 카피의 문제는 점차 부차적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지된 재현 - 에드워드 제임스의 초상' not to be reproduced (portrait of edward james), 1937 은 노골적으로 냉소합니다. 그림자는 있지만, 반사 주체가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의 이미지는 무엇을 참조하고 있나요. 이 남자와 저 남자의 모습은 닮았지만, 둘은 마주보지 않으므로 단일한 대상으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형상 사이에 놓인 물체를 거울로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 저는 농담삼아 한쪽이 귀신..이 아닐까 살짝 의심해봤습니다.. ^^) 확실한 것은, 마그리트의 세계에는 거짓과 참의 구분이나, 한쪽이 더 중시되거나 경시되는 구조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마그리트는 유사에서 상사를 분리해 내고, 후자를 전자와 반대로 작용하게 하는 것 같다. 유사에는 ‘주인’이 있다. ...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슷하다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 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중)

여기서 푸코의 '유사' resemblance 와 '상사' similitude 개념이 구별됩니다. 유사의 관계가 '모델에 대한 닮음'에 기반한다면, 상사란 "스스로를 닮으면서 무한한 계열선을 그리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상사의 관계가 전하는 바, "모델과 복사물의 관계 대신 반복되는 닮음들 사이로 솟아오르는 차이들"이 중요하답니다. 마그리트의 '표절' Plagiary, 1960 과 '자연의 은총' the natural graces, 1964(62?) 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표절'이라는 제목의 그림에 화병이 보이고, 꽃다발이 있습니다. 다발 속에는 다시 꽃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묻게 되는 함정에 주의합시다! 꽃다발이 먼저냐 꽃나무가 먼저냐를 물을 때, 우리는 어느새 원형적인 것을, 선행적인 것과 후행적인 것의 판별을 찾게 됩니다. 딸이 엄마를 닮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엄마가 딸을 닮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걸까요? 통념은 분류와 서열의 체계에서 그 자체의 개성을 무시하고 제거해버립니다. 꽃이 나무를 닮은 걸까요, 나무가 꽃을 닮은 걸까요? 나무와 새의 형상이 상호적으로 교차하는 '자연의 은총'은 한술 더 뜬 당혹스러움을 전합니다. 생각해봅시다. 나무가 새를 닮고, 새가 나무를 닮을 수는 없나요? '나무 같은 것'과 '새 같은 것'의 특질은 그동안 어떻게 결정되어 온 것일까요.

마그리트는 얼핏 보면 아무런 연관이 없을법한 새와 나뭇잎의 연관성을 모종(某種)의 가능성으로 열어둡니다. 그림에는 닮은 것들이 교차하지만 단일한 개체로 수렴되지 아니하고, 연속되는 간격을 발생시킬 뿐입니다. 세상에 닮은 것들이 솔개와 매, 가재와 게만 있나요. 신발과 발이, ('붉은 모델' The Red Model, 1935) 바다와 배가 ('유혹자' The Seducer, 1951) 서로를 좋아할 순 없을까요? (좋아하면 여러모로 닮는다던데..) 나와 다른 사람이 친구 먹으면 비슷한 구석이 하나둘 늘어나듯이, 상이함은 각자를 차츰 물들이고, 그런 연유로 각자는 또 다른 타자성을 잉태해갑니다. A는 A를 떠나가는 과정에 놓여있을 뿐이고 (A = not A), B는 B의 상태를 계속해서 탈피합니다. (B = not B) 고정된 실체로서 A나 B가 언제까지고 그대로 남아있을 수가 없다는 점은, 앞선 등식을 성립하는 중요한 전제가 됩니다. 즉, 상사란 닮음 자체가 차이를 생산하는 과정을 포착한 개념이자, 계속되는 자기 차이화의 과정을 드러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규정적 차이와 생산적 차이를 지혜로이 분별해야 합니다!) 채운 선생님께서는 만일 들뢰즈라면 이것을 '상호 -되기'로 불렀을 것이라 덧붙였습니다.

팝아트의 등장 (with 워홀씨)

1950년대를 전후로, 한때 추상 미술의 유행을 선도했던 미국의 예술계는 60년대부터 팝아트가 접수합니다. 그 무렵, 팝아트의 선구자였던 제스퍼 존스의 '깃발' Flag, 1954-55 이란 작품이 선보였습니다. '그냥 성조기잖아?'라고 시큰둥해하는 사람들. 원형에 대한 소급이 작품의 본뜻을 탈각한다는 딜레마가 주어집니다. 지긋한 눈길로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새삼스레 느껴지는 개성들이 발견됩니다. 빨간 선과 파란 배경, 별 모양 무늬 .. 작품을 보는 순간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기가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가까이 관찰해보면 작가가 이것을 매우 공들여 완성했음을 알려줄 흔적을 보게 됩니다. 일례로, 존스는 작품에 유화물감과 왁스를 섞어 만든 납 화법(wax encaustic)을 적용했는데, 이것은 장기적 보존을 위해 고대에서 활용된 기법이며 독특한 질감 형성에 일조한다고 합니다. 미국 국기라고 규정하지 않고, '깃발'이라는 제목을 붙인 점도 흥미롭습니다. 이렇듯이 사물과 기호의 상충을 통하여 재현에 반하려는 움직임은 팝아트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푸코는 '캠벨, 캠벨, 캠벨'이란 말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마감하면서, 앤디 워홀이라는 걸출한 책사를 호출합니다. 미국이 현대 미술을 주도하기 시작한 이래로, 워홀은 그 중심에서 각종 스캔들을 만들어낸 작가였습니다. 작품에 반영된 워홀의 자의식은 많은 상품으로 집약된 자본주의, TV와 스타성을 겸비한 대중문화적 현상과 연결됩니다. 그는 산과 들을 누비고 그것을 자연이라 여기며 예찬하던 시절과는 다른 유년을 보냅니다. 어릴 적부터 워홀은 (대중)문화의 자연화를 목격해온 것입니다. 시대가 변한만큼, 예술의 야심도 달라졌습니다. 그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신화나 성서의 한 대목도 아니었고, 마릴린 먼로와 코카콜라, 혹은 캠벨 수프통인 것입니다.

'모나리자' Colored Mona Lisa, 1963 는 기술복제 시대에 원본성을 넘어선 파생성에 주목합니다. 이는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모델의 실체를 환기하고, 전시된 유일무이함을 강조하는 것과 대비됩니다. '브릴로 상자' Brillo Box, 1964 는 당시 미국인들에게 널리 쓰인 비누의 포장재였습니다.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상품이 같다면 누구나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녹색 코카콜라 병' Green Coca-Cola Bottles, 1962 을 수놓은 이미지들의 범람은 우리가 깨나 민주적(?)인 세상을 산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대통령이 마시는 콜라의 맛과, 걸인이 마신 콜라의 외형 및 맛과 향은 같습니다. 푸코가 암시한 워홀의 전략은 일종의 물량 공세로 볼 수 있습니다. 굳건했던 기원의 신화는 이렇게 무장해제됩니다.

 
" <여기든 저기든 항상 동일하다. 색깔이 다양하든, 어둡건 밝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모두 무의미하다. 이 우둔함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삶도, 여자도, 죽음까지도.> 그러나 이 무한한 단조로움에 집중하는 가운데 우리는 복수성(複數性) 그 자체 - 그 중심에, 그 정점에 또는 그 너머에 그 무엇도 가지지 않는 - 의 돌연한 계시를 발견한다. " (푸코, <철학극장> ; 강의안 인용)

상품의 '민주적' 속성이 그러하듯, 우리 시대를 장식하는 이미지들도 우열 어린 배치에서 해방됐습니다. TV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아침에 진지한 얼굴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는 뉴스가 끝나면 막장성이 가미된 아침드라마가 전개됩니다. 드라마가 끝나면 생활 정보 프로그램이 편성됩니다. 다시 점심 뉴스, 이어지는 시사 논평, 리모컨을 만지면 홈쇼핑 채널, 뒤이은 저녁 뉴스, 본격 멜로 드라마, 심야의 예능 프로.. 그렇다고 TV가 전부는 아닙니다. 요즘 세대에게는 각종 BJ가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이 '뉴스룸'보다도 화제가 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척도가 부재한 상황, 이미지도 점차 예측하기 어려운 파급력으로 사건성을 좌우합니다. 우리는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을 뉴스에서 보도하는 무거운 소식으로만 접하지 않고, '먹방'을 찍는 BJ의 집안이 돌연 흔들리는 장면으로 알게 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시뮬라크르, 반격하는 이미지

따라서 사실(fact)조차도, 이제는 저마다 보고픈 것만을 보게 되는 사회적 환경 아래서 제각각이 되어버립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보수적 성향을 지닌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유튜브 등지에서 접한 '사실'과, 진보적 인사가 팟캐스트에서 썰을 풀면서 전하는 '팩트'가 한데 공존합니다. 언젠가 오바마 전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욕을 하는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합성이었지만, '딥페이크' 기술이 감쪽같이 적용된 사례였습니다. 일명 '악마의 편집'이 많은 연예인에게 논란이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상과 관계없는 이미지의 배치가 실물의 속성을 규정합니다. 가짜 fake와 카피 copy의 전성시대, 어쩌면 '미친 이미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명인이란 무엇일까요. 그들은 수많은 셔터와 카메라에 찍힌 이미지, 표상화된 메이킹-이미지들의 총합으로 존재합니다. '마릴린 먼로' Gold Marilyn Monroe, 1962 는 생전에 금발 백인, 섹스 심볼, 백치미의 스타로 소비되었던 인물입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 먼로의 얼굴은 대중적으로 유행한 먼로의 단면을 확인시켜주고, 한편으로 어딘가 미묘히 달라지는 형상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먼로의 진짜 모습은 백치가 아닐 것이라 반문하고, 그녀가 '율리시스'를 즐겨 읽을 만큼 지적이었다는 사실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을 또다른 물음으로 이어가야합니다. 그것만으로 먼로의 진상은 온전히 규명될까요.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 너의 본질을 확연히 밝혀줄만한 설명은 존재할 수 있을까요.

 
" ... 그래서 플라톤주의의 타파는 다음을 의미한다. 시뮬라크르들을 기어오르게 하라. 그리고 도상들이나 복사물들 사이에서의 그들의 권리를 긍정하라.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본질-외관 또는 원본-복사본의 구분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표상의 세계 내에서 작동한다, 문제는 이 세계 내에서 전복을 시도하는 것, ‘우상들의 황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 (Feat.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중)

오히려 진실은 하나의 존재가 여럿의 단면, 복수의 가능성을 취할 수 있더라는 점에서 민낯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과거 플라톤으로부터 언급된 '시뮬라크르' simulacre 개념은 이곳에 소환됩니다. 원한에 불타는 '여조'의 심정으로, 그들은 기어코 무덤을 헤집고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멸시와 폄하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시뮬라크르는 이데아적 '정통성'을 부정한 뒤, 재현을 에워싼 견고한 성체를 항해 타격을 장전합니다. 워홀의 Factory는 병기창으로 개조됩니다. 복수(複數)의 꿈틀대는 이미지를 군대로 삼고, 본격 지휘에 나선 시뮬라크르의 '복수혈전' 復讐血戰, 푸코의 [철학극장]에서 개봉박두!

*

시뮬라크르의 등장은 대체로 두 개의 반응을 이끕니다. 그럼에도 굳건한 실재'의 가치를 복원하려 무수한 거짓과 싸우고, 숨어있는 진실을 밝히려는 자세. 아니면 근본없는 이미지의 위계없는 난립이야말로 진정한 실상임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푸코의 경우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처럼 간단없이 범람하는 이미지는 다양한 사유의 계기를 격발합니다. 해석을 통한 역량의 발휘가 절실한 지금, 성찰하지 않는 자는 격랑에 휩쓸리고 말 것입니다. 어떤 자세를 취하든, 진정한 의미는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사유하는 자에게 달려있을 것입니다.

한편, 중요하고 하찮은 이미지가 나란히 놓인 상황은 반짝이는 전복성을 촉발시킬 계기로 작용합니다. 시스템의 견고한 통치성은 사소한 빈틈 앞에서 맥을 못 추게 될 것입니다. 월드컵 경기를 통해 지켜봤듯, 아무리 철벽수비를 자랑하는 팀조차 하나의 실수로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다면 자본의 논리에 생겨날 빈틈이란 무엇일까요. 예컨대, 딱히 돈을 벌고 싶진 않지만 소비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그렇습니다. 생산으로 귀속되지 않는 소비, 딱히 직장을 갖지 않고도 먹고 살고픈 백수(^^;)의 등장은 넌센스이자 (본의 아니게) 전복적입니다.

규정되지 않음이 만들어내는 지평은 우리에게 어떤 무의미함을 선사할지 모릅니다. 무의미를 수동적으로 이해하면 다만 무력한 허무주의에 불과하지만, 적극적으로 취하면 다양한 의미의 작물을 개간할 영토로 경험될 것입니다. 가만히 우울해하고 누워서 무기력하지만, 재밌게 여기고 싶어 하는 속내가 주변에 널리 공감되고,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는 짤방이 삐라처럼 돌아다니는 요즘. 도처에 널린 '그것'에 생겨날 도주선을 예의주시하면서 틈틈이 사유의 날을, 성찰의 도구를, 해석의 순간을 한껏 벼리도록 합시다! 해찰스레 적느라 담지 못한 대목도 여럿 지나쳐온 후기, 이로써 잠시 멈추겠습니다.

(* 반장님과 약속한 후기.. 반성하며 늦게나마 올려봅니다.)
전체 1

  • 2018-07-29 19:34
    우오오 이렇게 엄청난 후기를 또 올려주셨군요!!
    상대적으로 빈약함을 절실히 느끼지만, 강의 내용이 빼곡히 담겨있고 푸코의 소환술?이 그려지는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시뮬라크르의 '복수혈전' 復讐血戰, 푸코의 [철학극장]에서 개봉박두! 란 표현이 재밌네요~
    그 복수혈전 뒤에서 뭐라도 좀 갈게 숫돌 챙겨가야겠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