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6강 후기 : 질 들뢰즈 & 장 뤽 고다르 : 다시, 이미지를 사유한다는 것

작성자
박주영
작성일
2018-08-05 20:44
조회
142
     마지막 6강은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철학자 질 들뢰즈와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룰 예정이었으나, 채운샘이 본 강의 준비중에 고다르의 영화 찍는 방식과 푸코의 철학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어 저번주에 등장했던 푸코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관련이 있는지는 아래 내용을 보시면 될 것 같아요.

1.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철학하는 월요일을 통해 만났던 베르그손, 들뢰즈 등이 아니었다면, 저는 시간이 1시간, 1분, 1초가 동일하게 흐르는 연속적인 것, 양적인 것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시계를 보면서 ‘아 이제 30분이 흘렀구나.’, ‘퇴근시간이 3시간 남았네.’라고 시간을 수량화하여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 사무실에서 지루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고 즐거운 점심시간은 짧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시간은 진정 분초 단위로 나눠지고 연속적이며, 선형적으로 흐른다고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시간을 공간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시간의 차이를 오래된 사진을 보고 느끼거나 시계, 달력 등을 통해 인지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연속적, 선형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인과관계에 매우 익숙합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시간이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네요. 즉 과거가 먼저 있고 현재가 다음이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간의 면이 굴절되면서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섞이고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애매하다고 봅니다. 그는 시간이 동시적으로 분기하는 것을 보여줄 때 시간을 느낄 수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영화에서 보여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며, 시간에 대한 사유가 가능하기 때문이죠.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인과적으로 흐르지 않는 시간, 시간의 동시적 분기 등을 잘 보여준다고 합니다. ‘클레어의 카메라’라는 작품처럼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모자이크처럼 교차하여 기억과 시간의 경계를 허물어 버립니다. 이소룡의 영화 ‘용쟁호투’ 거울방 장면도 동시에 진행되는 다양한 장면을 잘 포착하여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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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편의 이미지 : 보려는 대로 보기 vs 다른 방식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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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사진은 미국의 팝스타 45명이 모여 결성한 ‘USA For Africa’입니다. 그들은 1985년 1월 28일 로스앤젤레스의 A&M 레코딩 스튜디오에 모여 아프리카 난민을 위한 자선기금 마련을 위해 10여 시간이란 긴 시간의 철야 강행으로 ‘We are the World'를 녹음했고(녹음과정과 아프리카 난민이 교차 편집된 뮤직비디오가 중요), 이 노래는 85년 4월 3일부터 4주간 정상을 지켰으며, 그 결과 2억 달러를 모금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인류애를 전 세계에 보여준 역사적인 작품으로 기억하는데요. 두 번째 사진은 World Press Photo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꿈의 음식‘이라는 사진인데, 이는 빈곤 포르노 이슈로 역풍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We are the World' 뮤직비디오와 ’꿈의 음식‘에서 무엇을 보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떤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일까요? 뮤직비디오는 45명의 팝스타와 아프리카 어린이가 계속 교차하여 보여주는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몽타주 기법은 관계없는 이미지를 붙여서 만드는 것으로 UN난민기구, 월드비전, Save the Children 등 국제 구호단체들이 모금활동을 위한 영상제작시 이 기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우리는 ‘We are the World' 뮤직비디오의 장면들을 어떻게 인식하죠? ’마이클 잭슨이 노래 부르네.‘, ’아프리카 어린아이가 비쩍 말랐네.‘와 같이 장면, 장면을 단편적으로 볼까요? 실제 두 장면은 서로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뮤직비디오를 볼 때 장면과 장면사이의 인과를 만들어서 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뮤직비디오를 불쌍한 아프리카 어린이 지원을 위해 팝스타들이 한데 모여 노래를 부르는 감동적인 작품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꿈의 음식‘은 어찌보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사진이죠. 구호단체들 홈페이지, 뉴스 등에서 자주 접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저는 이런 사진을 보면, 이들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UN난민기구 등에 후원을 하곤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문득 드는 생각이, ’왜 나는 이런 사진을 보면 이 어린이들을 불쌍하다고 여기고 돈을 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까?‘ 입니다. 사실 나는 얘들이 진짜 배가 고픈지, 그리고 그 생활이 즐겁지 않은지 전혀 모르죠. 다만 사진을 통해 이들을 불쌍한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그리고 내 습관대로 봅니다. 이미 본다는 것은 내 의식과 무의식이 투영된 결과입니다. ’꿈의 음식‘ 사진을 보고 느낀 내 감정에는 ’빈곤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비쩍 마르고 배가 나온 애들은 배가 고프고 불행하다.‘. ’불쌍한 사람에게는 기부를 해야한다.‘ 등의 저의 여러 가지 생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화가로서의 세잔의 초기 역사는 자신의 상투형과의 싸움의 역사인데, 그는 정물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사과를 여러 가지 면으로 그리면서 보려는 대로 보지 말고 여러 가지로 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고다르도 “사람들이 현재 보는 힘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을 우리는 매우 강하게 느낀다. 읽기만 하지, 더 이상 이미지를 보지 않는다.”라고 말했고, 베르토프도 보는 법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 그 동안 책 등 글을 잘 읽어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미지를 잘 봐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아요. 보는 것은 너무 익숙해서 ‘내가 이것을 잘 보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면서, 글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영향을 주는 이미지에 대해 이를 잘 보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지를 사유하는 것은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그 이미지를 뚫고 무엇인가를 생성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3. 역사/이야기 그리고 영화 : 장 뤽 고다르, <영화의 역사들>

    장 뤽 고다르는 총 4부(각 부는 A, B로 구성)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의 역사들 : Histoire(s) du cinema>라는 연작을 만들었습니다. 제목만 보면 영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초창기 작품으로는 A, B가 있고, 이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서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성에 대한 역사가 아니라 ‘왜 사람들이 성을 말하게 되었는지’ 등 성이 등장하게 된 배치 등을 물었듯이 고다르는 영화속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다 사용하며, ‘지금도 영화는 시대 안에서 작동하고 움직이고 있다.’라는 것을 담았습니다. 그에게 모든 이미지는 참입니다. 즉 올바른 이미지, 나쁜 이미지, 거짓된 이미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고다르에게는 이미지의 허구 여부도 의미가 없어요. 단, 중요한 것은 이미지들을 서로 연결지어 새롭게 배열하고 충돌시키면서 새로운 세상의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고다르는 영화는 기억(memoire)이지, 추억(souvenir)이 아니라고 말했는데요. 추억은 제가 가끔 보는 어릴 때 사진 등과 같은 사적 소유된 기억, 즉 기념품화된 기억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기억은 무엇일까요? 고다르는 아우슈비츠 사건 이후 인간에 대해, 그리고 기억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베트남전, 걸프전 등은 그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일 뿐일까요? 베트남전에 대한 이미지가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나에게 영향을 준다면 베트남전은 과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현재인 것입니다. 연대기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의 총체적인 사태입니다. 우리는 연대기적인, 즉 선형적인 역사에 너무 익숙하지만,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에 호출되고 있기에 선형적인 역사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저 하나의 연대기적 사실로서만 대상화된 역사라는 것이 있을까요? 그런 만큼 영화는 현재 속에 들어온 과거로 이를 보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주고 영향을 미치므로 기억입니다.
    고다르는 증언으로서의 이미지를 중시했습니다. 아무도 무엇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없을 때, 이에 대해 말을 해야 하며,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할 때 봐야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진, 힌츠 페터의 광주 민주화운동 영상, 제주 4.3사건 사진 등에 대해서 직접 마주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데, 이를 봐야합니다.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폭력입니다. 이 사건들은 끊임없이 해석되고 있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학살한 것을 망각한 것도 학살에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희망/영화의 역사/ 언어가 없는 역사. 밤의 역사. 신은 인간을 버렸다. (...) 피카소와 게르니카는 누구나 기억한다. 성년에 총살당한 젊은 철학자는 잊혀져도, 포로였던 고야는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조지 스티븐스가 처음으로 16밀리 컬러로 강제수용소를 촬영하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양지는 없었다. 39년에서 44년까지 다큐멘터리의 순교와 부활, 얼마나 대단한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는 것은, 우리들 보이지 않는 눈의 감미로운 기적은.”이라고 말했는데요. 그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아우슈비츠 등의 이미지를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를 읽어내고자 했습니다. 역사의 틈을 찢고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어코 보이게 하려는 작업인데(아 저는 이 영화도 보지 않았고, 설사 봤더라도 이게 무엇인지 이해를 못 할 것만 같다는), 이미지들의 배치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푸코와 유사한 지점을 만날 수 있는데, 푸코가 역사를 계열화작업, 즉 배치의 문제로 본 것처럼, 고다르도 영화를 역사적 아카이브인 이미지들의 몽타주 작업으로 봤습니다. 그는 영화의 본질이 몽타주라고 했죠. 그는 이미지들을 몽타주 작업을 통해 영화를 찍었기에 이미지 도둑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적소유권을 부정하였으며, 창작자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만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다르는 증언으로서의 이미지를 중시했지만, 영화 자체가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는데요. 설사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분명히 사물을 보는 일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물들에 대해 먼저 말하고 난 다음에야 보는 것을 선호하며, 이미지는 법정의 증거 같은 것이라고 했어요. 그에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증거를 제시하는 것과 같은데, 영화를 만드는 것은 변호사, 판사, 검사가 되어 소송에서 증거를 가져온 다음 그것이 무엇에 관한 증거라는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역사와 생성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건자체 즉 생성이고, 역사는 단지 조건들의 집합을 의미합니다. 사건을 어떤 층위에서 발생하는 지 묻는 계열화, 이것이 역사입니다. 그렇기에 역사와 사건 사이에는 괴리가 있습니다. 역사를 이루는 그 조건들이 아무리 최근의 것이라도 인간은 생성을 향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 위해 그 집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혁명적 생성, 혁명적 되기에 달려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와 생성을 영화와 연결하면 어떻게 될까요? 영화는 이미지를 현재화하는 예술로 사건의 발생으로서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는 무엇인가에 빛을 비추는 행위로, 어둠속에 있는 이미지를 빛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입니다. 이를 통해 권력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요. 푸코는 <오욕에 찌든 자들의 삶>에서 “그들 입자 중 일부가 우리에게 당도하기 위해서는 그러나 적어도 한순간이나마 그것들을 빛나게 만드는 빛의 묶음이 도래해야 했다. 다른 장소에서 도래하는 빛. 그것이 없었다면 그들은 밤 속에서 계속 숨어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 빛은 권력으로 그들의 삶에서 권력과의 충돌이 없었으면 이는 한번도 말해지지 않고 사라져갈 운명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푸코는 철학이 어떤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철학자는 보편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광인, 죄수, 어린이 등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의 확성기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고다르가 영화를 찍는 방식, 그의 영화에 대한 철학과 유사하죠. 고다르는 클로드 란츠만의 표상불가능성에 대해 이와 같이 비판합니다. “증언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입니다. 영화는 어둠속에서 빛을 찾는 행위로 무언가를 생성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다르의 영화와 삶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며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고다르에게 영화는 꿈이나 환상이 아닙니다. 그에게 영화는 삶이고, 영화와 삶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화는 사랑인데, 관객은 낯선 이미지를 만나러 오는 자로 만나려는 선의가 있으므로 이는 사랑이고 만남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되묻고, 다른 방법으로 질문하며, 새로운 영화를 생성해 나갑니다. 낯선 이미지를 보러오는 타자와 사랑을 합니다. 고다르라는 영화감독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는데, 나이가 들었어도 계속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영화를 찍는 삶이 존경스럽네요. 진부한 생각, 습관에 머무르고 싶은 게으른 제 모습과 너무 대비가 되었습니다. 이번 후기는 어떤 다른 것보다 더 어려웠는데, 영화, 이미지, 고다르 등 저에게 매우 낯선 주제였기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내용도 자신이 없어요. 그러나 이번 후기 작성을 통해 저의 사유 지평을 손톱만큼은 늘린 것 같습니다.^^
전체 4

  • 2018-08-05 22:46
    이럴수가! 내 앞전에, 후기=한역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앞, 중간, 뒤를 쓱 읽고 댓글을 달았지 뭐요!ㅋㅋㅋ 우리 철월 멤버 주영샘이 올린 후기를....(혹시 읽었다면 잊어주시길) 대신, (별 의미 없지만) 8월 말에 있을 고다르 영화제에 1착으로 초대합니다~~

    • 2018-08-06 19:47
      전 못 봤어요...ㅋㅋㅋ 제가 이번에 철월 후기를 처음으로 쓰기도 했구요. 8월말 영화제는 꼭 참석할께요.. 감사합니다..^^

  • 2018-08-06 20:36
    본다는 건 인식과 관련되고, 인식은 배치와 관련되고... 이제는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여전히 '이미지', '컷' 등등에 관심이 확 가지는 않지만, 고다르의 인터뷰 때문에라도 관심을 가져야만 할 것 같아요!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이해할 수 없고 난해한 게 예술이라는 저 나름의 편견이 있었는데, 이번 강의에서 그걸 깼네요. ㅎ

  • 2018-08-06 21:06
    고다르의 '예술가에게는 어떤 권리도 없다, 단지 의무만 있을 뿐' 이라는 말이 저는 무척 인상깊었는데요,
    볼 수 없는 것을 기어코 보게 하여 관객에게 낯선 것을 마주하게 하는 고다르의 영화, 그의 '사랑'? 이 기대되네요~ 물론 저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마지막 후기를 써주셔서 무척무척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