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 6강 후기 : 질 들뢰즈 & 장 뤽 고다르 : 다시, 이미지를 사유한다는 것

작성자
HY
작성일
2018-08-07 12:20
조회
126
누벨바그의 총아를 만났던 수업. 어려울수록 뭔가 첨예하다 느꼈습니다. 사실, '영화사(들)'이 들뢰즈보다 푸코적인 사유와 더 어울릴법한 작품인 것 같다는 말씀이 그랬습니다. 아, 이거야말로 (미워도) 다시 한 번, 자꾸만 돌이켜보게 되는 학문의 민낯이 아닌가. 계획서에 적힌대로만 성찰되지 않았듯, 마지막 시간이 '화수미제' 火水未濟 로 남은 듯하여, 여운이 물씬 드리웁니다. 천재의 등장에 반색하는 들뢰즈와 달리, 한쪽은 어딘가 딴청을 피우는 것 같았다는 선생님의 코멘트가 재밌습니다. 대단원은 영화와 역사에 대한 사유들이 장식했습니다. 미완의 기획으로 남은 수업. 느즈막히 머리를 싸매고, 역량껏 적어 보겠습니다.

*

Ch. 1 : 시간-이미지?

<시네마 I,II> 는 여러모로 경이로운 책입니다. 한평생 철학 문헌이며 문학 작품을 탐독한 들뢰즈였지만, 그림이며 음악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도 관심 많은 철학자였습니다. 그러는 한편, 영화는 얼마나 많이 봤던가요. <시네마>의 부록에 실린 영화 목록을 보면 이 분이 정녕 사람인가.. 싶습니다. <시네마> 연작은 영화를 남달리 애정한 흔적을 보여줍니다. (아, 세미나의 추억..) 1권이 '운동-이미지'를 중심으로 쓰였던 한편, 2권의 부제는 '시간-이미지'랍니다. 이미지의 운동이 집약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시간이라는 문제를 고민했다..라고 표현하면 좀..그렇겠죠? (죄송합니다. 미완의 추억..) 들뢰즈의 '운동-이미지'는 베르그송의 이미지론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저번 후기에서, "베르그송에게 이미지란 '변화하고 있는 물질의 단면'이고, 그런 이미지들의 총체가 곧 물질을 이룹니다"라고 적은 바 있습니다. 운동-이미지를 "지속 안에서 움직이는 단면"으로 요약한다면, 시간-이미지는 어떻게 정리될까요?

헛, 그것은 제게 어려운 질문이지만, 맥락을 조금 짚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운동-이미지'를 다뤘던 1권과 '시간-이미지'의 출현을 다룬 2권을 가로지르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세계 대전인 것이죠. 그 중에도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2차 대전은 전통적 체계의 판도를 뒤집었습니다.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던 아우슈비츠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아울러, 그동안 긍정해 마지않던 인간(중심)적인 것, 합리적인 것에 대한 의심과 회의에 불이 붙습니다. 따라서 그동안 이미지와 기억, 역사를 지탱하던 일련의 법칙도 무효해집니다. 먼저, 원인과 결과의 선형적 시간 모델이 갖췄던 필연성이 상실됩니다. 여기서 어떤 장면(상황)이 다른 장면(상황)을 뒷바라지(?)하는 역할 분담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통합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지향됨에 따라, 각자의 쇼트는 분산됩니다. 인물의 측면에서도, 주인공이 중심이 된 서사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즉, 주인공이 주체적인 몫을 수행하지 않고, 개인적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한 행동반경에서 이탈됩니다. 관객의 입장에선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시간은 운동을 통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에, 운동-이미지는 시간을 운동에 종속시킨다. 반면 시간-이미지는 시간을 운동에 대한 사유 이전에 위치시킨다. ... 우리는 이미지들을 상호관계 속에 배치하면서 시간에 대한 간접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는데, 이때 이 간접적인 이미지는 닫힌 체계 속에 있으면서 통일성을 띠고 있는 이미지들 자체와의 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 시간-이미지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미지들이 서로에게 반응하는가(상호관계성)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 즉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두 이미지 사이의 간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 (<들뢰즈: 철학과 영화> 중; 괄호 부분은 필자)

대략 이러한 점들이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의 이행에 수반되는 특징들로 볼 수 있습니다. 장 뤽 고다르로 대표되는 누벨바그 영화의 출현이 곧 시간-이미지의 도래를 보여준다고, 들뢰즈는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들뢰즈에게 '시간'은 어떻게 경험되는 것일까요, 아니 그 전에, 우리는 시간을 어찌 느끼나요. 가물거리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꽂혀있는 빛바랜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여기와 그 시절의 틈.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시간 감각이란 기억의 작용에 수반되곤 합니다. ('러브레터'의 애틋한 분위기를 떠올려보세요!) 벤야민에게 기억은 예컨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흔적과 현실이 관계하며 발생합니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더듬어가면서 제기한 기억의 문제도 벤야민과 일견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 들뢰즈의 시간론

한편, 들뢰즈의 시간 인식은 좀 다릅니다. 들뢰즈에게 시간은 동시적으로 분기합니다! 얼마 전 사과의 꿈틀대는 단면을 포착한 세잔의 그림과, 베르그송의 이미지론을 배운 적이 있었죠? 그것을 활용해봅시다. 현재라는 시제도 계속해서 작동하고 꿈틀대면서, 움직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현재'라고 명명해도, 현재는 어느샌가 우리의 인식을 저만치 달아납니다. 생각하기에, 들뢰즈에게 현재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과거로의 즉각적인 이행을 수행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여, 현재란 끊임없는 이행의 과정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자, 과거의 것과 섞이고 유동하면서 작동됩니다. 과거란 나중에서야, 사후에야 밝혀질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존은 과거와 상호작용 하되, 크고 작은 차이들을 매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가 반복적으로 호흡하는 것도, 공부하러 규문을 찾아가는 과정도 세세하게 따져보면 과거와의 상호 작용 없이는 불가능한 현상입니다. 알고 보자면, 애초에 백지 위에서 무엇을 시작한다거나, 살균된 채로 어떤 상황에 돌입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상황이 주는 밀도에 따라서 느낌이 좀 낯설고, 적응이 좀 어려울 뿐입니다. 갈등 없는 과정 없으며, 돌입하더라도 순간이란 끊임없이 갱신되어갈 뿐! 이행의 과정은 이전과 같은 기분, 똑같은 상태로 경험되진 않습니다. 일상의 구조는 그렇게 같은 듯, 어딘가 분명 다릅니다. 오호, '같은 듯 다르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시간관에 따르자면, 과거와 현재가 '동시적'으로 '공존'한다는 역설이 허용될 수 있겠죠. (설득할 재간이 부족한 저의 무지를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시간-이미지에 근거한 서사도 이처럼 역설적으로 파악됩니다. 요컨대, 직선적이고 연대기적인 시간형이 해체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가는 흐름이 깨지면 어찌 되느냐? 일단 굉장히 낯설 테죠..(^^;) 앞서 나열했던 시간-이미지의 맥락을 참고한다면 감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홍상수 감독의 몇몇 영화들과, 고다르의 '아워 뮤직'을 예시하였습니다. 보통은 앞 장면에서 A와 B가 만났다면, 이후 장면에서 둘은 서로를 알아보아야 맞습니다. 재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객들과 달리, 어찌된 일인지 둘은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클레어의 카메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안 되는 장면도 곧잘 삽입됩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여기서 저는 지난 세미나에서 감상했던 부뉴엘 감독의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일전에 죽은 인물이 뻔뻔하게 살아나고,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갈수록 파악되질 않으면서, '뭣이 중헌지'를 논하려는 둘 사이의 위계도 점차 사라집니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서사에 기입된 시간적 흐름이 불분명하게 파악되고, 전후의 맥락이 교란되는 지점을 제공합니다. 예컨대, 사라예보에서 느닷없이 아메리카 원주민과 마주한 순간이 연출되는 고다르의 '아워 뮤직'에서도 서로 다른 시간적 층위가 발견됩니다.

- 크리스털 이미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더라도, 한쪽에서는 파티가, 다른 한쪽에서는 사생결단이 공존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면, 동일한 장소에서도 찰나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게 감각될 것이고, 시제를 넘나들면서 이리저리 분산하는 선분들의 자취가 시간의 민낯을 드러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시간이란 공간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하시며, 앞에 있었던 것이 뒤의 원인이 되는 것도 아닌, "동시적인 분기"가 들뢰즈의 시간론의 핵심이란 점을 강조했습니다. 시간의 불균질함은 내가 겪는 인과와 다른 이들이 겪는 인과를, 거듭해서 '이행'하고 있는 현재와 과거의 조건을 서로간 교차시키면서 구성됩니다. 이로써 시간은 중층적인 방식으로 현시되며, 이에 이미지가 분열적으로 구성될 조건이 마련됩니다. <시네마 II>에는 '크리스털 이미지'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들뢰즈의 시간론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보면 아마도 크리스털 이미지로 제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소룡이 주연한 '용쟁호투'라는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거울에 방에서 보스와 결투하는 씬이 유명합니다. (오손 웰스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을 오마주한 장면이라고 합니다^^) 거울에 비친 상이 있고, 그것을 비춘 또 다른 상이 보이고, 다시 그 거울을 비춘 상이 생기고 ... 대체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중심이 되는 형상 이외 나머지 것들 간의 유기적인 종합을 설정하기 어렵습니다. 원본과 반사된 형상의 관계가 역전되고 혼란을 가중하며, 실제 인물이 누구고 반사상이 어떤 것인지 식별하려는 시도 또한 무의미해집니다. 이는 들뢰즈의 영화론이 푸코의 회화론과 일부 접목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유해보자면, 들뢰즈에게 시간은 "끝없이 두 개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속을 걷는 과정으로 체험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원래 고다르X들뢰즈를 중심으로 강의를 계획하셨으나, 고다르의 사유가 푸코와 더 가깝다는 것을 알고 생각이 잠깐 바뀌셨다며, 중반부턴 살짝 변주된 흐름으로 강의하셨습니다. 아무튼, 이제부턴 고다르의 비중이 조금씩 커집니다!

Ch. 2 : 배치를 문제삼기

1985년 무렵, 거물급 가수들이 모여 한목소리로 "We Are The World"를 열창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캠페인을 목적으로 만든 뮤직비디오도 공개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층위의 이미지가 교차하며 전시됩니다. 한쪽은 궁핍에 겨워 절망에 빠진 난민들이, 다른 쪽에는 내로라하는 팝스타들의 모습이 교환됩니다. 이를 두고 평론가 세르주 다네는 촌철을 날렸습니다. "치욕적 영상이다!" 그는 대스타의 열창과 굶주린 아이들의 병치가 보여준 이미지의 배치, 즉,  '몽타주'의 윤리를 제기합니다. 다시 말해, 이는 상이한 이미지들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는 것입니다. 몽타주란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를 효과적으로 출현시킵니다. 오죽하면 고다르 왈, 몽타주란 "영화가 발명해낸 유일한 것"('영화의 역사(들)' 중)이라 말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적어도 세르주 다네에겐, 연출된 이미지들이 동등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책무가 있었고, 선의라는 목적성에 '어용'된 구도를 비판하고자 했던 겁니다. 여러 취지를 떠나, 이미지 자체를 논한다는 것. 숏과 숏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에 주목할 이유가 생깁니다. 오늘처럼 이미지가 곳곳에서 만발하는 시대에, 그것이 어떠한 맥락에 던져졌는지를 되묻는 일은 사유를 촉발하고 저의를 묻게합니다. 최근, 모 일간지는 어느 정치인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전하면서 논란을 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고란 바로 옆에 큼지막한 사진이 실렸는데, 우승한 야구 선수들이 물을 뿌리면서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즉, 고인을 조롱하는 뉘앙스를 의도한 것이 아니냐는 독자들의 항의가 있었던 것이죠. 결국 몽타주란 편집의 효과이자, 의미의 영역 또한독자의 능동적 읽기로 확장됩니다. (경계에서 꽃이 피기도 하고, 사이에서 악취가 풍기기도 하는 법!) 점점 더 교묘한 전략으로 출현하는 이미지에 맞서, 그것의 배치를 골몰하게 생각해볼 이유를 자꾸만 다짐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 증언하는 이미지(들)

하나의 이미지를 마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고심해왔던 감독, 장 뤽 고다르는 마침내 '영화의 역사(들)' 이란 작품을 발표합니다. 작품 속에는 온갖 회화 이미지, 뉴스 이미지, 주요 영화의 장면들이 차용되면서 서로를 충돌시키고 낯설고 새로운 의미를 발굴해냅니다. 마치 수많은 인용구로 집필된 거대한 저서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영화의 역사'라고 해서, 뤼미에르 형제의 일화부터 시작하진 않습니다.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성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인 배치와 단절의 흔적을 물었듯, 고다르는 전쟁과 예술의 파편을 수집하여 이어붙이고, 영화사를 둘러싼 시공간의 축을 완전히 재구성합니다. 이것은 한 시대에 관여한 무수한 요소들의 관계를 묻되, 단선적이지 않은 이야기의 묶음을 캐내고, 이로부터 다중의 혐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입니다. '과연, 어떻게 나열하여 무엇이 솟아오르게 할 것인가?' - <영화사(들)>은 앞선 고민을 장비한 역사적, 영화적 발굴 작업의 적나라한 고백들로 구성됩니다.

다른 시간대를 통과하는 복수의 증언들로 구성된 역사(들). 영화의 역사는 영화들의 나열도 아니고, 역사적 사건들의 나열도 아닙니다. 별개의 역사를 동여맨 지층들끼리 상충하면서 낯선 감각, 다른 사태로의 실마리가 습곡 운동에 투입됩니다. 이처럼 영화적으로 고안된 '낯설게 하기'의 전략이 노리는 것은 극과 분리된 채로 안도감에 안주하고픈 우리의 상습적인, 상투적인 자세입니다. 고다르에게 영화라는 것이, 역사라는 것이 그러하듯, 모든 것은 나와 별도의 세계에서 진행되지 않습니다.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은 것들은 일상의 균열을, 얼마의 불편함을 안겨줄지언정 무수한 질문("영화란 무엇인가? -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출입마저 봉쇄하진 않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에 따라 "그가 가져오는 이미지들은 세상에 대한 명제이며, 그 명제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의 존립이기 때문에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다"(정성일)는 헤아림이 용인됩니다.

따져보면, 역사에 관한 푸코의 작업도 흩어진 불연속의 단층을 헤아리면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만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성은 억압되었는가? -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파편처럼 떨어진 자료를 발굴하여 활용하고, 답습된 맥락 없이 절취하여 이어 붙이면서 낯선 의미를 만드는 것. 하나의 장면, 자료, 하사건으로부터 특정한 의미가 투출되진 못합니다. 의미란 이것과 저것의 관계 안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죠. 정형화된 아귀가 어긋나버릴 찰나, 삐걱거림은 다른 관계의 징후로 제시되는 울림입니다. (Out of Joint) 서로가 점차 이상하게 엮어지면서 계열화되는 기류, 불현듯 출몰하는 진상의 낯빛은 고다르의 영화와 푸코의 역사관을 단짝 삼아 살피게끔 합니다.

- 이 (영화)를 보라!

 
"학살한 것을 망각한 것도 학살에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희망/ 영화의 역사/ 언어가 없는 역사. 밤의 역사. 신은 인간을 버렸다.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50년간 사람들은 냉혹한 현실을 상상을 통해 따뜻하게 했지만, 이제 현실은 복수를 시작해 이곳에서 피와 눈물을 추구한다. ... 극영화의 거장들은 현실의 역습을 제어할 수 없었다." (고다르, <영화의 역사(들)> 1A; 강의안 인용)

고다르의 <영화사(들)>은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에 대한 반론입니다. 지난번에 재현의 문제를 공부했을 때, <쇼아>는 제게 대안처럼 다가온 작품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학살을 재현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에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발언하기 위한 책임을 감행했던 작품. <쇼아>가 표상할 수 없는 역사의 한계를 윤리적인 차원에서 설득시켰다면, 고다르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여라!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거듭해 말하고자 할 때, 목격하고자 할 적에, 그것은 증인이 되어 증언하리니' - 어쩌면 'We Are The World'에서 문제 되는 것은 이미지 자체라기보다도, 그것을 전시의 일종으로 만든 편집의 구성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고다르의 필름 위에 현상된 참상들의 민낯은 직면하기의 불가능성을 무릅쓴 시도이자, 여기저기에 잔존하는 숱한 증언의 잠재성을 채록하기 위한 과감한 실험으로 읽혀질 것입니다. "이미지는 두 개의 동떨어진 현실을 관련짓는 것에서 태어난다"는 그의 말은 어딘가 벤야민적입니다. 발터 벤야민에게도 역사란 마치 이곳과 저곳의 쇼트가 충격하여 의미가 일깨워지는 순간으로 목격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고다르는 남들이 몸사리면서 보존하는 역사의 장면을 능숙하게 탈취하는 '이미지의 도둑'(김성욱)이며, 이를 생경한 발견을 위한 증거로 채택함으로써 그는 "형사나 변호사, 판관 혹은 검사"(1981년 인터뷰 중; 강의안 인용)로 분장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조르주 멜리아스의 영화를 상영할 권리를 두고 멜리아스의 후손들이 필름의 소유권을 주장하자, 고다르가 이를 비난했던 이유도 납득이 갑니다. 역사적 이미지의 상연을 권리 분쟁에 위치시킬 때, 현장은 박제될 것이며, 그것은 이채로운 사색의 조건을 형성하려는 것에 제동을 겁니다. 일찍이 고다르는 저자로서 감독의 권리에 회의하였으며, 자본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 매체의 숙명을 간파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영화를 연출하면서 겪는 자본에 대한 고민을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방식으로 남겼습니다. 자본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반드시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들로 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꿔 말해보자면, 자본이라는 표상을 굳이 '재현'할 필연성은 없는 것입니다. 표상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남다른 의미를 구현하려는 다채로운 노력을 우리는 익히 배워왔습니다.

- 어둠에서 벗어나기

 
"그들 입자 중 일부가 우리에게 당도하기 위해서는 그러나 적어도 한순간이나마 그것들을 빛나게 만드는 빛의 묶음이 도래해야 했다. 다른 장소에서 도래하는 빛. 그것이 없었다면 그들은 밤 속에서 계속 숨어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항상 그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기도 했을 밤으로부터 그들을 떼어내는 빛, 즉 권력이라는 빛과의 조우가 있었다. ... 권력과 가장 비소한 실존 사이를 오간 짧은, 삐걱거리는 소리 같은 말들, 아마도 바로 거기에 비소한 실존의 기념비가 있다. 시간을 초월해 이들 실존에게 희미한 광휘, 한순간의 섬광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것들을 전달해준다." (미셸 푸코, 오욕에 찌든 자들의 삶; 강의안 인용)

철학하는 자의 책무를 르포적인 행위로 번역하는 푸코의 글은 고다르의 연출론과 맞물립니다. 영화를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오는 행위"(<아워 뮤직>)에 비유했던 말인즉, 카메라를 향하는 것이란 가려진 바를 드러내는 것으로, 소리 내지 못하는 자에게 확성기가 되어주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증인의 자격이 처음부터 마땅하게 발언해야 할 누군가를 상정하지 않듯, 고다르에겐 유난히 상기해야할 사건도, 반드시 찍어야 할 대상의 정당함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찍는다는 것은 상황에 빛(섬광)을 부여하는 행위로 이해되며, 삐걱대는 자의 비소한 실존성을 점지해낼 것입니다. 고다르의 작품에는 서열화되지 않은 다중의 관계망이, 감독인 자신과 영화의 관계마저도 거리낌 없이 노출됩니다. 영화를 성찰하는 영화를 찍는다는 것. 말하자면, 고다르는 카메라가 특정인만을 겨냥하는지, 작품이 특정한 메시지를 의도하고 있는지, 감독으로서 자신이 영화의 부름에 얼마큼 가까운 것인지를 되묻고, 주시하며, 경계하는 것입니다.

푸코적으로 말한다면, 이와 같은 자기반영성이란 어쩌면 고다르 본인을 둘러싼 숱한 권력 관계를 기민하게 포착하면서, 그토록 자신이 권력의 작동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영화는 전혀 친숙하지도, 쉽게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고다르는 세잔과 마찬가지로, 상투성에 좀처럼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택한 것입니다. 이전에 잠시 살펴보았듯, 세잔의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사과가 아니라, 사과라는 정물을 얼마나 '잘' 마주할 수 있나를 근심한 흔적입니다. 캔버스의 사과가 우리의 인식 바깥에 위치한 대상(-thing)이지 않음을 보여준바, 세잔이 사과를 단순히 묘사(설명)하지 않는 대신, 정물을 둘러싼 사건들의 발생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닫힌 구조에 근거한 해설을 마련하지 않고, 열린 구조의 생성 작용을 부단하게 감지하기.  "더 많이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미 확립된 지식에 대한 가장 분명한 확신을 버려야 한다." (지가 베르토프, <키노아이> 중)

우리는 곧잘 '예술 영화'라는 딱지를 비대중적 영화, 고상하기짝이 없는 영화에 붙이지만, 따져 보면 그것은 한 편의 영화를 '대상'으로 낙인찍고, 자신은 그것과 무관함을 용인하려는 안이함을 긍정하기 위한 자세입니다. 불가능성에 시달려온 작업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약시킨 감독처럼, 관객에게는 목도하려는 것 앞에서 치열한 무력을 감수할 몫이 주어져 있진 않을까요.  우리가 '예술 영화'로 간단히 호명하려는 작품들에는 색다른 관점, 생소한 감수성을 일깨울 질문들로 가득하답니다. 감응어린 전류에 물음(?)과 느낌(!)이 연달아 반짝일 무렵, 떠도는 반딧불의 자취를 성좌처럼 이어가기.

*

<쇼아>의 물음에 대한 <영화사(들)>의 대답을 지켜보며, 그리스 신화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의 이야기. 목을 '절취'하기 위해서, 대면을 무릅쓴 자의 숙명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이번 시간, 저에게는 란츠만과 고다르의 이견을 정리한 부분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이처럼, 차이를 겸비한 타자성은 우리를 성찰의 계기로, 공부의 장으로, 매혹으로 안내합니다. ('차이'나는 클래스?) 미숙한 후기는 여기서 쫑.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물론 현대의 삶에서 우리는 타인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좀 무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자신들이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꺼이 밖으로 나와서 앞으로 걸어가며, 미지의 영역으로 자신을 던지고, 타인과 만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타인들도 마찬가지로 기꺼이 자신들의 편에서 우리에게 다가와서 만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만나려는 선의가 있다. 그것이 영화이다."  (장 뤽 고다르 인터뷰, 1983년; 강의안 인용)
전체 3

  • 2018-08-07 12:48
    이것이 정녕 후기의 지존! 내가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그리고 말하려고 했던 것을 이리 성실하고 꼼꼼하게 정리해주다니!!! 널 내 강의비서로 데리고 다니고 싶은 탐욕이 생길 지경이구나!! 한역아 넌 무슨 강의든 듣고 싶은 대로 들어라. 대신 후기를 맡아주어라. 담번에 계약서에 도장 찍자!ㅋㅋㅋ

  • 2018-08-09 00:36
    오오..!!
    지난 6주에 걸친 강의를 총망라하면서 이렇게 아름답고(?) 탄탄한 후기가 탄생했네요!!
    <이미지를 사유하다> 강의가 누구보다도 한역샘께 큰 배움이자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지 않았나 감히 장담합니다.
    매번 후기로 부담을 드려서 죄송했습니다만, 이렇게 멋진 후기로 맺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려는 선의가 있다"는 고다르의 영화 뿐아니라 앞으로 마주하게 될 예술 작품들과 메두사(?)들에 대해서,
    샘의 말대로,
    "관객에게는 목도하려는 것 앞에서 치열한 무력을 감수할 몫이 주어져 있진 않을까요."!!

  • 2018-08-09 21:12
    (아, 세미나의 추억..) ㅠㅠㅠ
    몹시 찔리네요. 후일을 기약해봅니다~^^
    (괄호 안에서 꿈틀대는 한역샘의 목소리를 듣는 맛이 쏠쏠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