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푸코와 고다르가 만났을 때! <영화의 역사들> 감상 및 강의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18-08-29 16:39
조회
127
영화의 역사(들)

‘이게 영화야?!’ 예상은 했지만 시작부터 깜깜했습니다. 제발 10초라도 한 장면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등장하는 그림이며, 영화 장면, 영상 기록, 깔리는 음악 중 아는 것은 전혀 없는데 자막은 화면을 설명해주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줄거리도 의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를 네 시간 반 동안 바라보는 일은, 외국 tv채널을 3초에 한 번씩 바꿔가며 바라보는 것과 유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이한 경험이었습니다. 간식과 쉬는 시간이 없었다면 그 시간을 제정신으로 견딜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다들 강의를 듣고 영화를 보면 좋았겠다고 영화를 4분의 1쯤 봤을 때 말하셨습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강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1. 정치성


고다르는 1968년 ‘지가 베르토프 집단’을 만들어 정치적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성은 정당 정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정치의 재현이 아닙니다. 고다르는 노동자,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과의 토론을 바탕으로 ‘정치적 주제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의 영화 속에는 남녀가 밀회를 나누는 장면에서도 끊임없이 바깥의 소음, 데모 구호 등이 개입되어 들어옵니다. 순수하고 독자적인 개인적 발화는 존재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혼자 있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무의식이 의식 속으로 개입해 들어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다르에게는 정치/비정치, 일상/비일상 이분법적 구분이 없습니다. 그의 영화는 정치적 문제를 다뤄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상에서의 일들이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걸그룹이 춤을 추는 것을 스마트폰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정치성. 여성이 그렇게 춤을 추는 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방식과, 바라보게 하는 사회적, 의식적, 기술적 배치. 본다는 행위 속에 개입되는 힘이 어떻게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냐는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푸코입니다. 푸코는 우리가 어떤 것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것과 어떤 공간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보게 되는가 하는 ‘배치’에 대해 주목합니다. 들/가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무의식(욕망) 자체의 정치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원한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것이지요. 지금의 우리는 무언가를 욕망할 때조차 자본주의 안에서 구도화된 방식으로 밖에 욕망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투쟁해야 하는 것은 정당 정치, 정치판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무의식을 주조하는(그런 방식으로 흐르게 하는) 배치가 가지는 정치성입니다.

2.역사

영화의 역사를 영화로 보여준다는 것.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를 글도 강의도 아닌 영화로 보여줍니다. 무수히 많은 그림과 영화 컷들, 다큐 기록, 음악 등이 빠르게 교차하는 <영화의 역사들>은 순전 장면과 텍스트들의 계속되는 편집 작업처럼 보입니다. 고다르는 바로 그 편집, 이어붙이기의 방식을 통해 영화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 장면과 음악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무질서한 혼합물로 보이지만, 고다르는 자신이 가진 무수히 많은 과거의 파편인 사료 document들을 이어붙입니다. 그 편집 안에 고다르 자신의 문제의식과 이데올로기, 무의식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의 역사라고 하면 ‘기차의 도착’부터 시작해 연대기적으로 영화가 어떻게 발달해왔는가를 보여주는 방법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고다르는 영화에 대한 자기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역사에 대한 이런 방식의 사고는 푸코의 감각과 통합니다. 그는 감옥의 역사에 대해 쓸 때, 그것의 기원과 변천사를 나열하는 틀을 벗어납니다. 도대체 감옥이라는 규율권력이 어느 시대 어느 조건에서 요청되었는지, 그것을 둘러싼 의학계의 담론, 정치계, 교육계의 담론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발생의 차원을 묻습니다. 이것을 계보학, 고고학적 사유라고 합니다. 역사는 현재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감각과 직결됩니다. 지금의 조건, 지금의 경험이 아니고서는 역사는 구성될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의 문제의식 속에서 과거를 바라볼 때, 그 무수한 사료들이 언표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어떤 문제를 가지고 어떤 사료를 어떻게 배치시키는가, 어떤 사료, 어떤 담론과 묶어서 배치시키는가로부터 의미는 발생합니다.

현재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수많은 document의 이어붙이는 작업. 푸코가 말하는 바로 그런 방식의 역사 구성이 고다르의 영화에는 드러납니다. 이 때문에 고다르에게 역사는 대문자 H로 시작하는 History가 아닙니다.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기술되는 역사들historise인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를 영화로서 보여줄 때 회화, 사진, 영상, 음악 등 다수의 예술 영역을 넘나들며 충격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데, 고다르는 그런 작업을 ‘몽타주’라고 부르며 몽타주를 만드는 것이 영화의 진정한 사명이라고 합니다.

영화에 (미술 잡지에서처럼) 그림을 넣을 때 그 이전에 오는 이미지는 무엇이고 그 이후에 오는 이미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내가 회화에서 좋아하는 것은 좀 초점이 안 맞지만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되지만 대회를 넣어, 영화 속에서 그 대화를 보여준다면, 이러한 식의 리얼리티를 보여 준다면, 그때 정확히 초점을 맞춘 영화 이미지와 말들 사이에는 초점 밖의 영역이 생긴다. 이 초점 밖에 있는 세계가 진정한 영화이다. -개빈 스미스, 장 뤽 고다르와의 대화, 301

 

3. 사유의 강제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사실 행간을 읽는 것입니다. 단어와 단어사이의, 문장과 문장 사이의, 컷과 컷 사이의 행간으로부터 우리는 의미를 끌어냅니다. 영화를 볼 때에도 A장면 뒤에 왜 B장면이 나오는 거지? 왜 다음이 저것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해석이 요구됩니다. 보통의 영화나, 소설은 앞뒤에 너무도 분명하고 촘촘한 인과인 줄거리와 서사가 준비되어 있어 별다른 노력 없이 알아서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A와 B 사이의 유사성이나 서사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 그것이 난해하거나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낯섦을 경험합니다. 예술 작품 앞에서 주로 그러하듯이 일종의 충격을 겪는 것이지요. 그 지점에서 우리는 배치를 읽어내야 할 역할을 갖게 됩니다. 즉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고다르는 바로 그것을 바랍니다.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예술을 폭력적입니다. 기존의 나의 상식으로는 단 한 줄, 단 한 장면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영화의 역사들> 전반에 걸쳐서 당신은 지극히 아름답고 숭고한 이미지와 공포와 잔학의 이미지를 병치시키고 있다. 영화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빈 스미스, 장 뤽 고다르와의 대화, 304p

아우슈비츠의 잔혹한 장면을 마주할 때 우리는 아주 전형적인 방식의 엄숙함 속으로 밀려들어가 익숙한 정서를 꺼냅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아름다운 미소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 두 이미지가 겹쳐진다면 우리는 어떤 감정을 꺼내야 할지 막히게 됩니다. 기존에 일상적으로 바라보던 것들이 굉장히 낯설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가 말했던 예술의 ‘소격효과’와도 같습니다. 다른 각도, 다른 배치에서 봤을 때, 어느 순간 사물이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이 터져 나오고 사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사물과의 맺어온 관계 방식을 다르게 해가는 것입니다.

 

4. 윤리

<영화의 역사들>에는 “영화는 화장품 산업이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화장품이란 진짜를 꾸미는 허위입니다. 또한 “영화는 무엇인가?”하는 스스로의 질문에 “nothing"이라고 대답합니다. 영화와 사진, 그림은 그 자체로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것들의 잔해일 뿐입니다. 어떤 기록이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다르는 이미 지나간 것, 찍은 것으로부터 어떻게 보여주지 않은 것들을 읽어내고 사유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질문은 관객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하고 고다르 자신을 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다르의 세 번째 질문은 윤리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고다르는 “something"이라고 답합니다. 이 찍혀진 것들을 가지고 어떤 것을 구성해 낼 수 있는가는 분명히 윤리적인 문제입니다. 고다르는 차마 볼 수 없는 것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여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가 지금까지 배제해온 목소리를 어떻게 끄집어 낼 것인가, 그 목소리들의 복권을 고민한 푸코의 윤리와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보아버리는 것의 윤리적 고통,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의 갈 곳 없는 윤리적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부야 다카시는 이를 ‘오욕으로서의 주시’라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카테고리화된 개념 체계, 그것에 의한 망각의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던 것들을 그 망각의 어둠 속으로부터 기억의 빛 속으로 끌어내는 것, 이것이 영화의 최초의 몸짓이었다. 그리고 이미 거기에 망각의 자유 속에서 안주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기억 속으로 감광하여 버린다고 하는 오욕의 고통이 영화에 더욱 다가가는 것이 된다. ··· 망각에 안주하도록 놓아두었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을 기억의 시선 속에서 각인하기····· - 나부야 다카시, 죽은 자의 오욕

 

 

공부를 많이 한 후에 (한 십년 뒤?? ㅠㅠ) <영화의 역사들>을 다시 본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하하. 예상했던 대로 영화에는 몰입하지도 감명 받지도 못했습니다만, 강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보이네요. 아마 두 번 다시 이런 영화는 만나지 못하겠지만 강렬한 추억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물론 기억될 장면은 남아있지 않지만요. 언제 또 ‘고 선생님’과의 인연이 닿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만난다면 그땐 이번보다는 훨씬 반가울 것 같습니다. <영화의 역사들> 후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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