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천하 5~6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7-21 01:29
조회
58
이번 시간에는 장자와 혜시의 학설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본문에 보시면 알겠지만, 이미 《장자》라는 텍스트가 존재하던 시대였다는 점에서 후대의 작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치언(巵言), 중언(重言), 우언(寓言)이 나오는데, 이 얘기는 〈우언〉편과 이어집니다.

현재 혜시의 텍스트가 별도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천하〉편에 혜시의 자료로 추정되는 것들(歷物十事)이 있어서 혜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그리고 혜시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장자라는 인물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혜시는 장자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재상의 자리를 두고 견제하기도 하며, 둘도 없는 친구로 그려지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혜시는 실제로 당대 강국 중 하나인 위(魏)나라 혜왕 옆에서 재상으로 오랫동안 활약합니다. 《사기》나 《장자》 〈추수〉편을 보면 장자도 초나라 왕에게 재상으로 초빙 받은 일화가 나옵니다. 우쌤은 아마 혜시라는 권세가와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면 실제로 장자의 명성도 대단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芴漠无形, 變化无常, 死與生與, 天地竝與, 神明往與! 芒乎何之, 忽乎何適, 萬物畢羅, 莫足以歸, 古之道術有在於是者. 莊周聞其風而悅之. 以謬悠之說, 荒唐之言, 无端崖之辭, 時恣縱而不儻, 不以觭見之也.

以天下爲沈濁, 不可與莊語, 以巵言爲曼衍, 以重言爲眞, 以寓言爲廣. 獨與天地精神往來而不敖倪於萬物, 不譴是非, 以與世俗處.

其書雖瓌瑋而連抃无傷也. 其辭雖參差而諔詭可觀. 彼其充實不可以已, 上與造物者遊, 而下與外死生无終始者爲友. 其於本也, 弘大而辟, 深閎而肆, 其於宗也, 可謂稠適而上遂矣. 雖然, 其應於化而解於物也, 其理不竭, 其來不蛻, 芒乎昧乎, 未之盡者.

적막하여 형체가 없고, 끊임없이 변()하고 화()하여 일정함도 없다. 죽은 것인가, 살아있는 것인가, 의식 속에 사는 것인가, 무의식 속에서 사는 것인가? 아득하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흐릿하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만물이 마침내 펼쳐져있어도 만족하여 돌아갈 줄 모른다. 옛날 도술 중에 이러한 것이 있었다. 장주가 이러한 학풍을 듣고 그것을 기뻐하였으니, 터무니없는 이야기와 황당한 말, 밑도 끝도 없는 말로 때때로 멋대로 풀어놓으면서도 치우치지 않았으며, 기이했으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천하 사람들이 혼탁해져서 장자 자신과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치언(巵言)으로서 자연스럽게 늘어놓고, 중언(重言)으로서 진실되게 하고, 우언(寓言)으로서 넓혔다. 홀로 천지의 정묘하고 신령스러운 것과 더불어 가고 오면서도 만물을 오만하게 흘겨보지 않았고, 옳음과 그름을 따져 꾸짖지 않으며 세상 사람과 함께 살았다.

장자라는 책이 비록 [이야기가] 크고 아름다우나 원만하게 변함으로써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자에 나온 글들이 비록 들쑥날쑥하지만 [논리전개]가 알쏭달쏭하여 볼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충실하게 만들기 위해 멈출 수 없었으니, 위로는 조물자와 더불어 노닐고, 아래로는 죽음과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끝과 시작이 없는 것과 사귀었다. 그 근본에 있어서 넓고 커서 트였으며, 깊고 넓으면서도 자유로웠다. 그 핵심주장에 있어서는 조화롭고 적합하여 현묘한 도()에 이르렀다고 할 만하다. 비록 그러하나, ()에 응하여 만물을 이해했어도 그 이치는 지극하지 못했으니, 다가올 [()]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어둡고 어두워라, 그것을 다한 사람이 아니다.

원래 한 단락으로 다 이어져있는데 편의상 단락을 구분했습니다.

우쌤은 장자에 대한 평이 노담과 관윤의 부록처럼 다뤄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신명(神明)은 번역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내편에서 이명(以明)과 같이 명(明)은 구체적으로 개념화됐습니다. 반면에 신(神)은 포정이 소를 해체할 때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나오지 않습니다. 신(神)이 개념으로 좀 더 구체화되는 것은 외편이나 잡편, 시대적으로 좀 지나야합니다. 일단 우쌤은 정신 작용으로 풀어주셨습니다.

망(芒)은 황(恍)의 뜻입니다. 황홀(恍惚)은 《도덕경》 14장에서 도를 묘사할 때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유유(謬悠)는 ‘어긋나다’, ‘아득하다’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사고와 맞지 않고, 상상하기에는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는 장자의 학설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황당(荒唐)이란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터무니없고, 사실이라 믿기에는 당혹스러운 것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근거 없는 장자의 말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단(端)은 ‘시작’이고, 애(崖)는 ‘끝’을 뜻합니다.

자종(恣縱)은 ‘멋대로 풀어놓다’라는 뜻입니다. 당(儻)은 ‘편당짓다’, ‘사사로이 무리짓다’라는 뜻입니다.

기(觭)는 ‘기이하다’, ‘이상하다’라는 뜻입니다. 글자에 ‘뿔’ 각(角)이 있는데, 뿔이 하나만 있어서 ‘기이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장어(莊語)는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장자와 말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장자의 학설’입니다. 전자를 따르면, “장자와 더불어 말할 수 없다.”가 되고, 후자를 따르면, “장자의 학설을 이해할 수 없다.”가 됩니다.

만연(曼衍)은 물이 퍼져나가듯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모습’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천지정신(天地精神)에서 천지와 정신을 구분해서 번역했습니다. 우쌤은 일단 정신(精神)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풀어주셨습니다.

왕래(往來)는 ‘오고 감’으로, 여기서는 ‘시간의 흐름’을 뜻합니다.

서(書)는 《장자》를 가리키고, 사(辭)는 《장자》에 나온 구절들을 말합니다.

참치(參差)는 들쑥날쑥한 모양입니다.

숙궤(諔詭)는 둘 다 ‘속이다’라는 뜻으로 ‘수수께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는 ‘알쏭달쏭한 논리전개’로 번역했습니다.

피(彼)는 ‘장자의 주장 및 학설’을 가리킵니다.

조(稠)는 조(調)로 된 판본도 있는데, 둘 다 ‘조화를 이루다’라는 뜻에서 같습니다.

해(解)는 사물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다는 뜻입니다.

세(蛻)는 ‘허물’ 혹은 ‘허물을 벗다’, ‘신선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매미가 껍질을 벗어서 우화하는 것을 비유한 글자입니다.

惠施多方, 其書五車, 其道舛駁, 其言也不中. 厤物之意,:至大无外, 謂之大一., 至小无內, 謂之小一. 无厚, 不可積也, 其大千里. 天與地卑, 山與澤平. 日方中方睨, 物方生方死.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南方无窮而有窮, 今日適越而昔來. 連環可解也. 我知天下之中央, 燕之北越之南是也. 氾愛萬物, 天地一體也.

혜시는 재주가 많고, 그 책이 다섯 수레였고, 그 도()[실상에] 어그러지고 맞지 않아 그 말이 적중하지 않았다. [그는] 사물의 뜻을 포괄해서 말했다.

“1. 지극히 커서 바깥이 없는 것, 그것을 일러 대일(大一)이라 하고,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것, 그것을 일러 소일(小一)이라 한다.

2. 두께가 없는 것은 쌓을 수는 없으나, 그 크기는 천리(千里)에 달한다.

3. 하늘은 땅과 더불어 낮고, 산은 연못과 더불어 평평하다.

4. 해는 중천에 이른 동시에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사물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간다.

5. 큰 범주에서 같으면서도 작은 범주에서는 같음과 다름이 있으니, 이것을 작게 다르다고 말하고, 만물이 모두 같으면서도 모두 다른 것, 이것을 큰 범주에서 다르다고 말한다.

6. 남쪽 방향에는 끝은 없으나 남쪽의 끝은 있고,

7. 오늘 월나라로 떠나서 어제 도착했다.

8. 둥근 고리는 풀 수 있다.

9. 나는 천하의 중앙을 알고 있으니,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이 바로 그것이다.

10. 만물을 두루 사랑하면 하늘과 땅이 한 몸이 된다.

여기부터는 혜시에 대한 장자학파의 평가인데, 혜시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인 혜시의 주장 10가지(歷物十事)가 나옵니다.

서(書)를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혜시가 쓴 책’이고, 다른 하나는 ‘혜시가 가지고 다닌 책’입니다.

천박(舛駁)은 ‘뒤섞여서 어울리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무후(无厚)는 〈양생주〉 포정이 자신의 칼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나오는 단어입니다. 우쌤은 장자가 혜시의 학설을 모조리 배척한 게 아니라 어느 것은 받아들인 증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물론〉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장자의 주장이고, 혜시의 주장인지 고민이 된다고 하셨죠.

대동이여소동리, 차지위소동리, 만물필동필리, 차지위대동리(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는 장자의 〈제물론〉의 얘기가 통하는 구절입니다. 대(大)는 사물이라는 범주를 뜻하고, 소(小)는 구체적으로 인간이 편의상 설정한 분별을 말합니다.

이밖에도 지대(至大)와 지소(至小), 천여지비(天與地卑), 방생방사(方生方死)에 대한 개념은 장자 내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惠施以此爲大, 觀於天下而曉辯者, 天下之辯者相與樂之. 卵有毛., 鷄三足., 郢有天下, 犬可以爲羊., 馬有卵., 丁子有尾., 火不熱., 山出口, 輸不碾地., 目不見., 指不至, 至不絶., 龜長於蛇., 矩不方, 規不可以爲圓., 鑿不圍枘, 飛鳥之景未嘗動也, 鏃矢之疾而有不行不止之時., 狗非犬., 黃馬驪牛三., 白狗黑., 孤駒未嘗有母., 一尺之捶, 日取其半, 萬世不竭. 辯者以此與惠施相應, 終身无窮.

혜시는 이 열 가지 명제를 뛰어난 것으로 생각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명가(名家)의 학자들을 깨우쳤고, 천하의 명가(名家)의 학자들은 서로 함께 그것을 기뻐하였다.
  1. 달걀에는 털이 있다.

  2. 닭은 다리가 세 개다.

  3. [초나라 수도] ()에 천하가 있다.

  4. 개는 양이 될 수 있다.

  5. 말은 알을 잉태한다.

  6. 개구리는 꼬리가 있다.

  7. 불은 뜨겁지 않다.

  8. 산은 입에서 나온다.

  9. 수레바퀴는 땅에 붙어있지 않다.

  10. 눈은 보지 못한다.

  11.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이르지 못하니 거기에 이르는 것은 끊어지지 않는다.

  12. 거북이는 뱀보다 길다.

  13. 각도기는 네모를 그릴 수 없고, 컴퍼스는 원을 그릴 수 없다.

  14. 구멍은 구멍에 꽂힌 것을 꽉 둘러싸고 있지 않다.

  15. 나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인 적이 없다.

  16. 쇠촉이 붙은 화살은 빨리 날아가도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지 않은 때가 있다.

  17. 강아지는 개가 아니다.

  18. 누런 말과 검은 소는 합해서 세 개다.

  19. 흰 개는 검다.

  20. 어미 없는 망아지는 어미가 있었던 적이 없다.

  21. 한 자() 길이의 채찍을 매일 반씩 자르면, 만세(萬世)가 지나도 다 자를 수 없다.

명가(名家)의 학자들은 이러한 명제들을 가지고 혜시와 더불어 서로 상대하면서 죽을 때까지 논쟁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는 변자이십일사(辯者二十一事)가 나옵니다. 이것은 전국시대 당대에 유행하던 명가(名家)의 문장으로, 혜시와 공손룡의 학설이 섞여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 화살의 패러독스로 유명한 제논과 비슷한 게 많습니다. 그런데 이 21개의 명제 중 어느 게 혜시의 것인지, 공손룡의 것인지 아직 구별이 다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흰 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공손룡은 동물에 대한 비유를 즐긴다고 하니, 일단 동물이 나오면 공손룡의 주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桓團公孫龍辯者之徒, 飾人之心, 易人之意, 能勝人之口, 不能服人之心, 辯者之囿也. 惠施日以其知與人之辯, 特與天下之辯者爲怪, 此其柢也.

환단과 공손룡은 명가(名家)의 무리들이었으니, 사람의 마음을 부풀게 하고, 사람의 뜻을 바꾸게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이겼으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했으니, 명가(名家)의 한계다. 혜시는 날마다 그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변론과 함께 했는데, 유독 천하의 명가(名家)들 중에서도 뛰어난 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환단과 공손룡은 둘 다 맹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명가(名家)의 학자들입니다.

식(飾)은 ‘꾸미다’라는 뜻으로 사람의 마음을 부풀게 하는 것입니다.

역(易)은 ‘바꾸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현혹하다’로 풀었습니다.

복(服)은 다른 사람을 ‘감복시키다’로 그의 마음을 얻는 것(得)입니다.

然惠施之口談, 自以爲最賢, 曰天地其壯乎! 施存雄而无術. 南方有倚人焉曰黃繚, 問天地所以不墜不陷, 風雨雷霆之故. 惠施不辭而應, 不慮而對, 徧爲萬物說, 說而不休, 多而无已, 猶以爲寡, 益之以怪. 以反人爲實, 而欲以勝人爲名, 是以與衆不適也. 弱於德, 强於物, 其塗隩矣. 由天地之道觀惠施之能, 其猶一蚊一蝱之勞者也. 其於物也何庸! 夫充一尙可, 曰愈貴道, 幾矣! 惠施不能以此自寧, 散於萬物而不厭, 卒以善辯爲名. 惜乎! 惠施之才, 駘蕩而不得, 逐萬物而不反, 是窮響以聲, 形與影競走也. 悲夫!

그러나 혜시의 말은 스스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했으니, “하늘과 땅은 장대하구나!”라고 말했다. 혜시는 웅대함은 있었으나 [옛사람의] 도술(道術)은 없었다. 남쪽에 기인이 있었으니, 황요(黃繚)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혜시에게 하늘과 땅이 떨어지지 않고, 꺼지지 않는 이유와 비, 바람, 천둥이 일어나는 까닭을 물었다. 혜시는 사양하지 않고 대답했는데, 심사숙고하지 않고 대답하여 두루 만물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설명하는 것이 쉼이 없었고, 많은 것을 얘기하면서도 그치지 않았는데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겨서 거기에 궤변을 더하였다. 사람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것을 실질로 삼아서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을 명예로 삼았으니,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지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을 추구하는 것은 관심이 없으면서도 사물에 대한 주장은 강하게 했으니, 그가 살아온 길이 협소했다. 천지의 도()로 말미암아 혜시의 능력을 본다면, 모기 한 마리, 등애 한 마리의 수고로움과 같다. 사물에 있어서는 어찌하겠는가! 무릇 한 가지에 충실했다면 그래도 괜찮았겠으나, 더욱 도를 발전시켰다고 말했다면, 위험하다! 혜시는 이것으로 스스로 편안하지 못했고, 만물을 확산시키면서 싫증내지 않았으니, 마침내 말 잘하는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애석하구나! 혜시의 재능이 많은 것을 했으나 얻은 것은 없었고, 만물이 일어나는 현상에 도달했으나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이는 메아리를 막으려고 큰 소리를 지르고, 몸이 그림자와 더불어 경주를 한다. 슬프구나!

구담(口談)이라고 표현한 것은 혜시가 실제로 저술보다는 말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천지기장호(天地其壯乎)는 “천지가 넓구나!”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혜시 자신의 도(道)가 천지의 넓음에 비견된다는 비유로 사용됐습니다.

사(辭)는 ‘사양하다’, 려(慮)는 ‘심사숙고하다’라는 뜻으로 황요의 질문에 대해 조금의 생각하는 과정도 없이 대답하는 것을 보여주는 글자입니다.

태탕(駘蕩)은 ‘넓고 큰 모양’으로 지식을 쌓으며 정치를 하는 등 한 것은 많지만 실제로 얻은 것이 없음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궁향이성, 형여영경주야(窮響以聲, 形與影競走也)는 재밌으면서도 유명한 구절입니다. 인간이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고 그 안에 담긴 이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풍자한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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