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마제], [거협] 1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10-16 20:02
조회
44
저번시간에 읽은 〈변무(駢拇)〉에 이어 〈마제(馬蹄)〉와 〈거협(胠篋)〉을 달렸습니다. 이 세 편을 흔히들 ‘원시주의자’로 분류하는데요. 이들은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처럼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합니다. 이때 이들을 장자 이전의 도가 계열 철학자로 볼 것인지 아니면 장자 이후 나타난 새로운 흐름으로 볼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매우 함축적인 내편을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시선이 외편과 잡편에 있고, ‘원시주의’도 그러한 시선 중 하나로 볼 수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편과 결이나 어조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재미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아요.

이번 〈마제〉와 〈거협〉에서도 뒤통수를 치는 듯 한 장자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제〉는 내편 〈응제왕〉의 혼돈과 숙홀의 이야기를 주제로 풀어낸 것 같았습니다. 혼돈에게 구멍을 뚫는 행위를 본성을 인위적으로 교정하는 것이고, 그러한 교정이 우리의 삶을 해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마제〉에서도 말을 잘 다룬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을 길들이면서 오히려 말을 해친다는 얘기가 주를 이룹니다. 이를 유가의 다스림에 대한 비유로 가져와서 비판하죠. 키워드는 ‘진성(眞性)’, ‘상성(常性)’, ‘천방(天放)’이 있는데 모두 타고난 본성, 자연 그대로의 본성을 말합니다. 그밖에도 지덕지세(至德之世)가 주목할 키워드입니다.

〈거협〉은 우리가 맹신하는 앎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배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도둑으로부터 방비하기 위해 귀중품을 아무리 꽁꽁 싸매도 그것이 역설적으로 도둑이 더 훔쳐가기 편하게 해놓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거협〉편의 화자는 성인이 나타남으로써 큰 도둑이 생겨났다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유가에서 이른바 인의예지라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인간의 탐욕과 맞닿아있다는 것을 비판합니다. 키워드는 성지지법(聖知之法)입니다.

 

마제(馬蹄)

 

, 蹄可以踐霜雪, 毛可以禦風寒, 齕草飮水, 翹足而陸, 此馬之眞性也. 雖有義臺路寢, 無所用之. 及至伯樂,: 我善治馬.燒之, 剔之, 刻之, 雒之, 連之以羈馽, 編之以皁棧, 馬之死者十二三矣., 飢之, 渴之, 馳之, 驟之, 整之, 齊之, 前有橛飾之患, 而後有鞭筴之威, 而馬之死者已過半矣. 陶者曰: 我善治埴, 圓者中規, 方者中矩.匠人曰: 我善治木, 曲者中鉤, 直者應繩.夫埴木之性, 豈欲中規矩鉤繩哉? 然且世世稱之曰 伯樂善治馬, 而陶匠善治埴木,此亦治天下者之過也.

 

말은 굽으로 서리와 눈을 건너고, 털로 바람과 추위를 막을 수 있다.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다리를 들고 걸어다니니 이는 말의 타고난 본성이다. 비록 높고, 그럴듯한 누각이 있을지라도 쓸 곳이 없다. 백락(伯樂)나는 말을 잘 다룬다.”라고 하여 털을 태우고, 깎고, 낙인을 찍고 굽을 자르게 되었다. [백락이 말에] 연이어 굴레를 씌우고, 마구간에 일렬로 늘어놓는 데 이르자 말 중에 죽는 것이 열에 둘, 셋이었다. [말을 훈련시키기 위해] 굶주리게 하고, 목마르게 하고, 내달리게 하다 갑자기 멈추게 하고, 정돈시키고, 가지런하게 했다. 앞에는 수레의 멍에 때문에 고통스럽고, 뒤에는 채찍의 위엄이 도사리니 말 중에 죽는 것이 이미 절반을 넘겼다. 옹기장이가 말했다. “나는 진흙을 잘 다룬다. 둥근 것은 그림쇠에 꼭 맞고, 모난 것은 곱자에 딱 들어맞는다.” 목수가 말했다. “나는 나무를 잘 다룬다. 굽은 것은 갈고리에 꼭 맞고, 곧은 것은 먹줄에 딱 들어맞는다.” 무릇 진흙과 나무의 본성이 어찌 그림쇠, 곱자, 갈고리, 먹중에 들어맞고자 하겠는가? 그러나 세상에서 대대로 말하기를, “백락은 말을 잘 다루고, 옹기장이와 목수는 진흙과 나무를 잘 다룬다.”고 하니, 이것은 또한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잘못이다.

 

백락(伯樂)이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름보다는 말을 잘 다루는 사람에게 붙는 일종의 별명 같은 것입니다. 유가의 성인을 백락으로 비유하면서, 유가의 가르침이 백성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吾意善治天下者不然. 彼民有常性, 織而衣, 耕而食, 是謂同德., 一而不黨, 命曰天放. 故至德之世, 其行塡塡, 其視顚顚. 當是時也, 山无蹊隧, 澤无舟梁., 萬物群生, 連屬其鄕., 禽獸成群, 草木遂長. 是故禽獸可係羈而遊, 鳥鵲之巢可攀援而闚.

 

내가 생각하기에, 천하를 잘 다스리는 자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저 백성들은 가지고 태어난 본성이 있으니, 옷감을 짜서 옷을 입고, 밭을 갈아 밥을 먹으니, 이는 다 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한결같지만 의도적인 것이 아니니 이를 일러 하늘이 그리 살게 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한 덕()이 있는 시대에 백성들의 행동거지는 편안한 듯했으며, 시선은 당당했다. 그때는 산에는 오솔길이 없었으며, 못에는 배와 징검다리가 없었다. 만물은 무리 지어 살아서 살 곳을 함께 했고, 짐승들은 무리를 이루어 초목이 잘 자랄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짐승들은 끈으로 묶어서 뛰어다니며, 새 둥지는 손으로 끌어당겨서 엿볼 수 있었다.

 

잘 다스리는 것은 백락처럼 인위적으로 어떻게 기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타고난 본성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동덕(同德)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같은 본성’이라 해도 되고 혹은 ‘타고난 본성’이라 봐도 크게 차이는 없습니다.

천방(天放)은 하늘이 내려준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夫至德之世, 同與禽獸居, 族與萬物竝, 惡乎知君子小人哉! 同乎无知, 其德不離., 同乎无欲, 是謂素樸., 素樸而民性得矣. 及至聖人, 蹩躠爲仁, 踶跂爲義, 而天下始疑矣., 澶漫爲樂, 摘僻爲禮, 而天下始分矣. 故純樸不殘, 孰爲犧樽! 白玉不毁, 孰爲珪璋! 道德不廢, 安取仁義! 性情不離, 安用禮樂! 五色不亂, 孰爲文采! 五聲不亂, 孰應六律! 夫殘樸以爲器, 工匠之罪也., 毁道德以爲仁義, 聖人之過也.

 

무릇 지극한 덕()이 있는 시대에 짐승들과 함께 살았고, 만물과 어울렸으니 어찌 군자와 소인을 알겠는가! 함께 무지하니 덕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무욕하니 이를 일러 소박(素樸, 자연 그대로의 본성)이라 한다. 소박하여 백성이 본성을 얻는다. 지극한 성인의 시대에 억지로 인()을 행하고, 까치발을 세워 의()를 실천하는 데 이르자 천하가 비로소 나뉘었다. 그러므로 순연한 통나무를 해치지 않고, 누가 희준(犧樽) 같은 제기를 만드는가! 백옥(白玉)을 훼손하지 않고, 누가 규()와 장() 같은 도구를 만드는가! ()와 덕()이 폐해지지 않으면, 어찌 인()과 의()를 취하겠는가! 성정(性情)이 분리되지 않으면, 어찌 예()와 악()을 사용하겠는가! 오색이 어지럽혀지지 않으면 누가 문채를 만들겠는가! 오성이 어지럽혀지지 않으면, 누가 육률로 응답하겠는가! 무릇 통나무를 부슴으로써 그릇을 만드는 것은 장인들의 죄이고, 도와 덕을 훼손함으로써 인과 의를 삼는 것은 성인의 잘못이다.

 

소박(素樸)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어떤 인위적인 행위도 가해지지 않은 상태의 통나무, 자연 그대로 보존된 본성을 말합니다.

본성과 감각이 어지럽혀진 결과로 유가의 인의예악과 같은 가치들이 나온다는 게 포인트입니다.

 

2.

夫馬, 陸居則食草飮水, 喜則交頸相靡, 怒則分背相踶. 馬知已此矣. 夫加之以衡扼, 齊之以月題, 而馬知介倪.闉扼.鷙曼.詭銜.竊轡. 故馬之知而態至盜者, 伯樂之罪也.

 

무릇 말은, 땅에 살면서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기쁘면 목을 교차하여 서로 비비고, 화나면 떨어져 등을 지고 서로 걷어찬다. 말이 아는 것은 여기에 그친다. 그런데 [인간이 여기에] 멍에를 더하고, 달 모양의 이마장식으로 꾸미자 말이 끌채를 부러뜨리고, 멍에를 흔들어 끊고, 갑자기 들이받고, 고삐를 물어뜯을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말이 아는 것으로 난폭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백락의 잘못이다.

 

마지이차(馬知已此)는 이미 말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앎을 말합니다. 이미 그 정도만 해도 살아가는 데 충분히 지장이 없는데 여기에 인위가 가해지면서 말이 난폭해지게 된 것을 보여주는 장입니다.

 

夫赫胥氏之時, 民居不知所爲, 行不知所之, 含哺而熙, 鼓腹而遊, 民能以此矣. 及至聖人, 屈折禮樂以匡天下之形, 縣跂仁義以慰天下之心, 而民乃始踶跂好知, 爭歸於利, 不可止也. 此亦聖人過也.

 

혁서씨의 시대에 백성들은 살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다닐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 했으며, 먹을 것을 입에 물고 기뻐하고 배를 두드리며 놀았으니 백성들이 할 줄 아는 것이 이러했다. 하지만 성인이 예악에 따라 몸을 구부림으로써 천하의 몸을 바로잡고, 인의를 내걸음으로써 천하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이르러 백성들이 비로소 발돋움하여 알기를 좋아하고, 다투어 이익을 찾아가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또한 성인의 잘못이다.

 

함포이희, 고복이유(含哺而熙, 鼓腹而遊)를 네 글자로 줄이면 함포고복(含哺鼓腹)입니다. 먹고 사는 것 이상으로 욕심을 부리게 만드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잘못임을 보여주는 장입니다.

 

거협(胠篋)

 

1.

將爲胠篋探囊發匱之盜而爲守備, 則必攝緘縢, 固扃鐍, 此世俗之所謂知也. 然而巨盜至, 則負匱揭篋擔囊而趨, 唯恐緘縢扃鐍之不固也. 然則鄕之所謂知者, 不乃爲大盜積者也?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짝을 뜯는 도둑을 걱정하여 수비하려하니, 반드시 튼튼한 밧줄로 동여매고, 빗장과 걸쇠로 단단히 잠그니 이것이 세속에서 이른바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큰 도둑이 이르러 궤짝을 짊어 매고, 상자를 손에 들고, 주머니를 한쪽 어깨에 걸쳐서 달아난다. [도둑은] 오직 밧줄과 빗장과 걸쇠가 단단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이른바 앎이라고 하는 것들이 큰 도둑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故嘗試論之, 世俗之所謂知者, 有不爲大盜積者乎? 所謂聖者, 有不爲大盜守者乎? 何以知其然邪? 昔者齊國隣邑相望, 鷄狗之音相聞, 罔罟之所布, 耒耨之所刺, 方二千餘里. 闔四竟之內, 所以立宗廟社稷, 治邑屋州閭鄕曲者, 曷嘗不法聖人哉! 然而田成子一旦殺齊君而盜其國, 所盜者豈獨其國邪? 竝與其聖知之法而盜之. 故田成子有乎盜賊之名, 而身處堯舜之安, 小國不敢非, 大國不敢誅, 十二世有齊國. 則是不乃竊齊國, 竝與其聖知之法以守其盜賊之身乎?

 

그러므로 시험 삼아 말해보자면, 세속에서 이른바 앎이라고 하는 것이 큰 도둑을 도와주지 않음이 있는가? 이른바 성()이라 하는 것이 큰 도둑을 지켜주지 않음이 있는가? 무엇으로써 그러함을 알겠는가? 옛날에 제나라의 이웃 고을이 서로를 바라보며, 개와 닭의 울음소리를 서로 들었으며, 그물을 펼치는 곳과 쟁기와 괭이를 파는 곳이 사방 2천 리에 달했다. 사방 국경 안에서 종묘와 사직을 세우는 것과 읍(), (), (), (), ()과 거리 곳곳을 다스리는 것이 일찍이 성인을 본받지 않았는가! 그러나 전성자가 하루아침에 제나라 군주를 죽이고 그 나라를 훔쳤으니, 훔친 것이 어찌 오직 나라뿐이겠는가? 아울러 그 성인의 앎으로 세운 법도 훔쳤다. 그러므로 전성자는 도적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나 몸은 요순과 같은 편안함에 머물렀으니, 작은 나라는 감히 비난하지 못했으며, 큰 나라도 감히 심판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열 두세대 동안 제나라를 소유했으니 이것이 제나라와 아울러 성인의 앎으로 세운 법을 함께 훔침으로써 그 도적의 몸을 지킨 것이 아니겠는가?

 

상시론지(嘗試論之)가 반복해서 나오는데, 우쌤은 이 형식이 반복되는 걸로 보아 아마 후대에 끼어들거나 점차 살이 붙은 부분 같다고 하셨습니다.

지(知)와 성(聖)이 오히려 우리의 의도와 아예 정반대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嘗試論之, 世俗之所謂至知者, 有不爲大盜積者乎? 所謂至聖者, 有不爲大盜守者乎? 何以知其然邪? 昔者龍逢斬, 比干剖, 萇弘胣, 子胥靡, 故四子之賢而身不免乎戮. 故跖之徒問於跖曰: 盜亦有道乎?跖曰: 何適而无有道邪! 夫妄意室中之藏, 聖也., 入先, 勇也., 出後, 義也., 知可否, 知也., 分均, 仁也. 五者不備而能成大盜者, 天下未之有也.由是觀之, 善人不得聖人之道不立, 跖不得聖人之道不行., 天下之善人少而不善人多, 則聖人之利天下也少而害天下也多. 故曰, 脣竭則齒寒, 魯酒薄而邯鄲圍, 聖人生而大盜起. 掊擊聖人, 縱舍盜賊, 而天下始治矣. 夫川竭而谷虛, 丘夷而淵實. 聖人已死, 則大盜不起, 天下平而无故矣.

 

시험 삼아 말해본다면, 세속에서 이른바 지극한 앎이라고 하는 것이 큰 도둑을 도와주지 않음이 있던가? 이른바 지극한 성()이라고 하는 것이 큰 도둑을 지켜주지 않음이 있던가? 무엇으로 그러함을 알겠는가? 옛날에 용봉(龍逢)이 참살되고, 비간(比干)이 가슴이 갈라졌으며, 장홍(萇弘)이 찢겨졌으며, 자서(子胥)는 강에서 썩게 되었다. 이 네 사람은 현명하지만 몸은 형벌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도척의 무리에서 도척에게 물었다. “도둑질에도 또한 도()가 있습니까?” 도척이 말했다. “어디에 간들 도가 있지 않으리오! 무릇 방에 감추어진 것을 짐작하는 것은 성()이고,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맹함이고, 나중에 나오는 것은 의리이며, 가능과 불가능을 판단하는 것이 지()이며,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인()이다. 다섯 가지가 갖추지 않고 큰 도둑이 되었던 사람은 천하에 아직 있지 않다.” 이로써 그것을 보건대, 선인(善人)이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면 자립할 수 없듯, 도척도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면 도둑질할 수 없다. 천하에 선인은 적어도 선하지 않은 사람은 많으니, 성인이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은 적어도 천하를 해롭게 하는 것은 많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고, 노나라 술이 묽으면 한단이 포위되고, 성인이 나타나면 큰 도둑도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성인은 배척하고, 도둑들을 내버려두면 천하는 비로소 다스려질 것이다. 무릇 냇물이 마르면 골짜기가 비고, 언덕이 평평해지면 연못이 메워진다. 성인이 죽으면 큰 도둑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천하가 다스려져서 사건이 없게 될 것이다.

 

도척이 등장하는데, 이도 백락처럼 큰 도둑에게 붙는 별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