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6.27 주역과 글쓰기 후기

작성자
임영주
작성일
2021-07-02 14:23
조회
118
이번 주는 상괘가 진(震)괘인 괘들 중 마지막 순서로 소과(雷山小過 )괘와 예(雷地豫 )괘를 공부했습니다. 어느 괘이든 그것들이 보여주는 상황이나 변화의 국면에서 역이 일러주는 당부들은 흥미롭지 않은 것은 없는데요, 저는 특히 이번에 상괘가 운동성이 큰 진괘가 배치되었을 때의 괘들이 재미있었습니다.

진괘는 우레(雷)라는 자연현상을 뜻합니다. 이 천둥과 번개는 대기 중에 전기방전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으로 주로 비바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진(震)괘는 진동, 움직임, 즉 운동성이 강한 성향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 천둥과 번개는 주로 봄, 여름에 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이때가 대기가 불안정한 경우가 많기도 하기도 합니다만 동시에 이런 우레들로 인해서 봄, 여름에 자라나는 새싹이나 열매들이 외부의 강한 기운에 놀라 내부로 움츠리면서 더욱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강한 우레로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 살아남는 것들은 더욱 강하게 자라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상괘로 진괘가 올때는 대체로 강한 운동성, 진동하듯 두드리고 일깨우는 힘들과 관련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아래괘가 어떤 것과 조합되는가에 따라 또 조금씩 다른 이야기들을 펼쳐냅니다.

소과괘의 마땅함 혹은 떳떳함

소과(小過)괘는 한자의 뜻 그대로 보면 ‘작은 것이 과도하다’ 입니다. 그리고 괘상으로 보면 움직임이 강한 진괘가 상괘에 위치하고, 아래에는 산을 상징하는 간(艮)괘가 놓여 있습니다. 즉, 우레가 산 위에서 치는 형상인데, 평지가 아닌 산과 같은 높은 곳에서 치면 그것은 그 소리가 평상시보다 더욱 크고 과하게 들릴 것입니다. 괘사에서도 “작은 것의 과도함은 형통함이니(小過 亨, 利貞)”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뭔가 평소보다 과도하게 해야 올바르게 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작은 것이 과도한 것은 어떤 상황일까요?

정이천은 소과(小過)를 ‘작은 것이 상도(常道)를 넘어선 것이고, 또 사소한 일을 과도하게 행하는 것이고, 과도한 것이 적은 것이다.’라고 소과의 상황과 행동지침, 경계의 말을 함께 풀고 있습니다. 우선 ‘작은 것이 상도를 넘어’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음이 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소과 괘상이 중간의 구삼효, 구사효가 아래 위 네 음효들에 둘러싸인 형상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음효 즉, 작은 것들이 득세하는 세상으로 그래서 펼치고 나가는 기운을 가진 양효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꿍치고, 안으로 숨기고,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인 것이지요. 하지만 우주가 늘 운동하고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는 원리에서 보았을 때는 이런 상황이 상도(常道)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모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음의 기운이 득시글한 때에는 아무리 올바른 뜻을 가진 양효들도(구삼, 구사효) 자신의 뜻을 쉽게 세상으로 펼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워낙에 비정상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시대를 건너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이런 때에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소인배들의 기운장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괘의 중간에 강한 양효 둘이 딱 버티고 있기 때문에 득세하는 음의 기운에 그래도 중심을 잡고 자신의 옳음을 지키고 단도리할 힘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괘사에서는 이어서 “사소한 일은 할 수 있지만 큰 일은 할 수 없으니, 나는 새가 소리를 남기는데 위로 향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아래로 향하는 것을 마땅히 하면 크게 길하다(可小事, 不可大事, 飛鳥遺之音, 不宜上, 宜下, 大吉).”라고 합니다. 즉 비록 강건한 양의 기운을 가지고 있지만 음의 기운이 득세하는 때에는 자신의 강한 기운을 세상을 바꾸는데 쓰는 것은 마땅한 도리가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대신 자신의 일상들과 같은 사소하고 째째해보일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한 올바름(正)을 지키고 더욱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이때의 마땅함(宜)으로 삼고 이 국면을 겪어내라고 당부합니다.

즉, 양효라도 그것이 어떤 괘이며, 그 괘의 어디에 배치해 있고, 누구와 만나는가 등등의 조합들에 따라 다른 결의 양의 힘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생각해보니 범례에서 보았던 강명(剛明), 강양(剛暘), 강중(剛中), 강실(剛實), 강결(剛決), 강과(剛果), 강폭(剛暴), 강직(剛直), 강강(剛强).... 같은 다양한 양효들의 자질도 이런 성질이 원래 있는 것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64괘의 조합에 따라 다채롭게 드러나는 양의 자질에 대한 양상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는 워낙에 주역 독해 자체가 낯설기도 하고 모르는 것 투성이라 매주 만나는 괘들을 거칠게 이해하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은 내 식대로 오해하고 있는 괘들도 수두룩한데요, 소과괘도 그 중 하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과의 괘사에서 양의 힘을 어떻게 쓰는 것이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與時行)이고, 때에 따른 마땅함(時之宜)인지를 이렇게 세심하고 친절하게 일러주고 있었지만, 무신경한 저는 내가 알고 있는 고정된 양효의 이미지와 괘의 뜻을 가지고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괘들에 그 의미를 끼워 맞추려 하다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과괘의 효사들은 이렇게 음이 과하고 판을 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이런 것에 휩쓸리지 않는 떳떳함과 바름을 지키고 할 것인가에 대한 경계들이 변화의 국면마다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육이효처럼 과도하게 하되 자신의 본분에 넘어서지 않게 하라고 하고(過其祖, 遇其妣, 不及其君, 遇其臣, 无咎), 구삼효에서는 음이 과도할 때 이들을 과도하게 방지하지 않으면 따라와 자신을 해칠 수 있다(弗過防之, 從或戕之, 凶)고 경계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구사효에서는 과도하지 않아 적당하지만, 그대로 가면 위태롭고 반드시 경계하고 있되, 오래도록 올바름을 고집하지 말라고 합니다(无咎, 弗過遇之, 往厲必戒, 勿用永貞). 즉, 소과의 때에는 자신의 바름을 지키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하되, 그 바름을 다른 사람에게는 굳이 강요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봅니다. 이미 대세가 음의 기운이 판을 치고 원칙이 없는 세상에서 양강한 힘이 있어도 역부족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이천도 ‘소인을 방비하는 방도는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 주식이나 비트코인을 하는 것이 똑똑하고 현명한 행동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소과괘의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주변만 보아도 주식공부를 하고 있다거나, 주변의 권유로 얼떨결에 주식 몇 주를 사봤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인들은 저보고 지금이라도 대출 좀 내서 아파트 분양받아서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워낙에 이런 것이 당연시되는 것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가만히 있으면 나만 뒤처지는 것 같고, ‘남들 다 하는데 나라고 뭘.’ 이라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자신이 한만큼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투자(혹은 투기)를 통해 시세차익을 남기는 것이 그렇게 또 당당하고 멋진 일은 아닙니다. 댓가 없이 주어지는 그 이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무엇보다 주식만 봐도 매분매초 주식시세에 온통 신경이 가 있고, 오르고 내림에 따라 내 마음도 따라 동요되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상도가 되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세상을 탓하거나 휩쓸리지 말고 이럴 때 일수록 자신의 일상을 소박하게 지키는데 온 힘을 다하라고 합니다. 이런 때에 작은 것을 과도하게 바로잡는 것은 자잘한 것이 아니라 매우 큰 능동성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 기미를 읽는다는 것

상괘가 진괘인 마지막으로 ‘열광과 기쁨’의 뜻이 있는 예괘가 있습니다. 예괘는 위에 진(辰)괘가 있고 아래에 곤(坤)괘가 있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예괘는 양의 기운이 땅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웅크렸던 힘이 일시에 터져 나올 때의 운동성과 환호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정이천도 ‘예(豫)란 안정되고 조화를 이루어 열광하고 즐겁다는 뜻이다(安和悅樂)’라고 풀이합니다. 즉, 예의 때는 양강하고 역동성을 가진 힘이 터져나오고, 그 힘에 나머지 음효들이 기쁘게 호응하고 따르는 일이 술술 진행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괘사와 같이 “제후를 세워 군사를 동원(利建侯行師)”하여도 문제 없을 정도로 상하 모두 이치에 맞고 따르며 호응하는 조화롭고 즐거운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괘의 상황이 좋을 때일수록 변화의 국면들을 말해주는 효사들은 늘 조심과 경계의 말들로 가득합니다. 역(易)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만히 있는 경우는 없고 늘 상황은 변하고 흘러간다는 것이 변치 않는 진리이기 때문이죠. 역시나 예괘의 효사들에도 기쁘다고 기쁨에 안일하게 심취한 나머지 경거망동할 것을 조심하라는 말들로 가득합니다. 예(豫)의 한자의 뜻도 보면 ‘기쁨’도 있지만 동시에 ‘방비, 예비’도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기쁜 나머지 기쁨을 겉으로 드러내는 초육효의 태도를 흉하다고 말합니다(鳴豫, 凶). 혹은 자신의 자리에 맞게 처신하지 못하여 머뭇거리고 지체하는 육삼효에게는 후회만 남기는 행동이라고 말해줍니다(盱豫, 悔, 遲有悔). 특히나 기쁨의 때에 탐욕과 방자함에 빠져 스스로 돌이킬 줄 모르게 된 상육효에게는 얼른 마음을 고쳐먹을 것을 당부합니다(冥豫, 成有渝, 无咎). 모두 기쁨의 때에 드러나는 기쁨만을 전부라고 보는 태도를 지적합니다. 그러나 육이효는 기쁨의 때를 잘 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기쁨의 때에도 돌과 같은 절도와 단호함으로 기쁨에서 곧장 떠나오는 것이 바르고 길하다고 하지요(介于石, 不終日, 貞吉).

좋은 일이 있을수록 더욱 겸손하고 떠벌리지 말라고 하는 말은 평소에도 자주 듣는 소리이긴 합니다. 그런데 주역에서 보면 좀 좋다 싶은 괘가 나오면 어김없이 안 좋을 것이 옴을 대비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해가 중천에 떴다 싶으면 곧 해가 기울 것을 잊지말라던가 하는 식으로요. 그래서 그동안 고생했다가 이제 여유가 생겨서 즐거움을 좀 누리겠다는데 돌과 같은 절개로 곧장 이 즐거움에서 나와라고 하는 것은 그 경계함이나 대비함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이천은 기쁨의 때에 스스로 자신의 절도를 지키는 이런 육이효의 모습을 ‘기미(幾微)를 보고 떠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주역을 공부하면서 가장 모르겠는 것이 이 기미, 중(中), 때(時)라는 것인데요. 이런 말들 앞에서 막연해하기만 하고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채운샘께서는 기미를 읽는다는 것은 뭐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사에 드러나는 것에는 항시 드러나지 않는 이면이 함께 있음을 늘 염두해 두는 태도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일에서나 관계에서나 서로 잘 맞고 막힘없이 진행될 때 보면 어느샌가 마음이 풀려서 안일하게 대처하거나 관계에서 소홀함이 생기기 되어 결국에는 안 좋게 끝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일이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나쁜 일은 얼른 사라져야하고, 기쁘고 행복한 것만 계속 되길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혹은 기쁨이나 행복을 어디 있다가 그동안 힘들었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것들은 기쁨과 슬픔, 길함과 흉함이 그 자체로 서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만물을 생성하게 만드는 음양의 작동원리를 보면 이 대립되는 힘들이 계속 겨루면서 매번 힘의 균형을 절묘하게 잡아가면서 운동합니다. 즉, 음양이든 기쁨과 슬픔, 길흉이든 이들은 따로 떨어진 사태가 아니라 쌍쌍바처럼 늘 딱붙어서 매번 힘의 조화를 이루어 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기쁨으로 어떨 때는 슬픔으로 드러나긴 합니다만 이렇게 현실로 드러나게 해주는 힘의 원천은 이면에 잠겨있는 대립적인 힘들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쁘다고 촐싹대면서 좋아할 이유가 없고, 지금 슬프다고 세상을 잃은 것처럼 슬픔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또 흘러가는 국면 중의 일부일 뿐이니까요. 따라서 기미를 읽는다는 것은 드러나는 것들에는 이렇게 드러나게 하는 잠재된 힘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음을 늘 잊지않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에서 의식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태나 대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이들을 드러나게 하는 힘들의 관계성속에서 파악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리론과 도덕론

2교시에는 <역학원리강화> 수리론과 도덕론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작년에는 의리역이 뭔지 수리역이 뭔지 구분도 못한채로 무작정 닥치는 대로 공부했었는데요. 이번에 음양에 관한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태극, 음양오행, 사상팔괘 등등처럼 너무 당연해서 차마 질문하지 못했던 개념들을 대충이라도 정리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특히 역학원리강화는 역을 공부하는 학생이 도통한 노인과 문답식으로 쓰여져 있는데 역과 관련된 전반적인 개념들을 딱 제가 이해할만한 수준으로 알려주어서 유익하고 재미나게 읽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수리(數理)론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수라고 하면 수학이나 계산처럼 나와 동떨어져있거나 셈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사실은 수라는 것은 변화하는 세상의 원리를 수라는 상징으로 고도로 추상화한 것입니다. 수만으로 세상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세상을 보는 다양한 렌즈 중에 세상의 변화상을 수의 원리를 통해 세상의 변화상을 보는 관점입니다. 책에도 어떻게 수의 원리로 인간의 몸도 구성되어 있는지를 조금만 보여줬는데도 신기하긴 하더라요.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공부하면 복잡하고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수리의 세계는 우리가 흔히 수에 대해 생각하듯 수치적으로 환원하는 문제와는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채운샘은 상수역이든 의리역이든 이런 것들을 알 필요가 있는 이유가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이나 틀이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보고 인식하는 세계를 그 자체인 것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의 옳음을 보편적 옳음이라고 확신하고,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더욱 심해져서 나와 다른 것은 무시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들기 쉬운데요. 그렇지만 세계는 만물에게 혹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하나의 실체인 것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물들 각자가 가진 세상을 보는 나름의 렌즈를 통해서 보이는 수만개의 세상들이 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확고한 하나의 세상을 확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내가 보고 경험하는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나의 협소한 관점에서 본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임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 세계도 수백만개로 세상을 보는 렌즈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늘 염두하고 산다면 다른 것들을 통해 배우려는 겸손함과 유연함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도덕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저는 주역을 공부하기전까지 도덕이라고 하면 외부에서 주어지는 지켜야할 규범, 의무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사람이라거나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이 그다지 멋있어보이지 않았습니다. 왠지 도덕적이라면 주어진 것만을 잘 지키는 답답하고 꽉 막힌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동시에 그렇다고 어떤 원칙없이 막 사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도와 덕을 단순히 외부적에서 주어지고 그것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를 천지만물을 생하는 우주의 원리차원으로 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만물에는 이런 우주의 생성의 원리인 도(道)가 내재되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자신에게 내재한 우주의 원리를 어떻게 잘 발현시키면서 살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중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각 인간이 처한 지점마다 자신의 도덕을 발명하면서 살아라고 말하는 것이죠. 차라리 정해진 법을 지키고 살거나 안 지키면 벌 받는 것은 갑갑한 일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게는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도덕적일 수도 있는데 동양에서 말하는 식의 도덕적이 된다는 것은 늘 자신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골치가 아픈 것 같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왠지 더 멋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이야기가 많았지만 요기까지 정리할게요...이만총총)

이제 2주만 있으면 2학기도 끝이네요. 주역공부 너무 좋지만 방학도 너무 기다려집니다.

일요일에 만나요!
전체 1

  • 2021-07-03 18:38
    오오~ 주역이 읽히고 계신다는 게 팍팍 느껴지는 후기입니다! 양도 많고, 내용도 알차네요.
    양효가 각각의 괘(時)에서 독특하게 표현된다는 것 그리고 주역은 기본적으로 길과 흉이 쌍쌍바라는 것을 읽으셨군요. 깊이가 어마어마해지시겠는데요?
    저희가 주역을 읽는 이유는 공자처럼 때에 맞게 살아가고자 하기 때문인데, 영주쌤과 함께하니 확실히 개미걸음만큼이나마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캬~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