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소생 프로젝트 영화 후기2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08-28 16:57
조회
80
영화의 시작이 심상치 않다. 배우의 ‘자연스러운 연기’로 시작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극의 형식을 찢고 나와 자신이 ‘감독을 맡은 배우’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이어서 그는 촬영지에 있는 학교에서 즉석으로 캐스팅을 진행한다. 배우가 캐스팅을 진행하는 상황. 이것은 극의 일부일까, 실제 상황일까? 영화는 계속 이런식으로 진행된다. 감독의 배역을 맡은 이, 그리고 주민 ‘배우들’간의 대화를 통해 이것이 영화인지 실제 상황인지 헷갈리는 상황이 계속 연출된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영화로 대체 뭘 하려고 한 것일까?

 자신이 영화를 찍었던 지역의 지진 소식을 듣고 찾아갔지만, 키아로스타미는 그 처참한 현장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식으로 상황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허구’의 매체, 영화를 찍으러 현장에 들어간 것이다. 허구가 그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작품을 하나의 공고한 완성품으로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영화가 어떻게 ‘엎어질랑 말랑’한 경계를 오가는지 내내 보여준다. 말하자면 실패의 과정을 담아낸 영화라고 해야할까? 극 중에서는 호세인의 친척이 65명이 죽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사실 그 숫자는 25명이라고 말하며 왜 65명으로 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테헤라는 이름 뒤에 ‘씨’자를 붙이라는 감독의 주문에도 끝까지 그 한 마디를 덧붙이지 않은채 연기를 계속한다. 실패를 거듭하는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간과했던 영화의 특성들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극적 효과를 위해 사건을 과장(25명을 65명으로)하는 것이 영화인 걸까? 지역의 관습에 대해 무지한 ‘이방인’(감독)이 그 지역의 생활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어디까지를 허구로 각색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실패의 상황들’조차 사실은 영화에 보여지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점이다. 그 씬들 조차 연출의 일부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가 실제를 어디까지 반영할 수 있는가에 질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영화가 주민들과 자아내는 관계에 주목한다. 끝까지 ‘씨’자를 붙이지 않는 테헤라의 ‘고집’은 영화가 계속 테이크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65명을 계속 25명으로 고쳐부르는 호세인의 ‘정직함’도 마찬가지다. 물론 ‘씨’자를 붙이지 않는 관습, 사실은 25명이 죽었다는 언급 조차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 여부가 아니라, 영화라는 허구의 매체와 대결하며 구성되는 그들의 ‘캐릭터’가 아닐까? 그 역시 연출의 결과일지 모르지만 영화는 작품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 인물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줌으로써 캐릭터에 생생함을 부여한다. 나는 이것을 ‘영화적 진실’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한다. 영화 촬영이라는 상황을 무시하면서까지 관습을 지키려 하는 테헤라의 모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할머니가 엄격히 교육한 결과일까? 학교에서도 규칙을 잘 지키는 모범생일까? 등등. 관객은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그 인물의 성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인물에 대해 해석하게 된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순간이 있다. 촬영 테이크의 반복과 함께 끊임없이 테헤라에게 구애하는 호세인의 모습이다. 촬영되고 있는 영화의 스토리와 관계없이 호세인은 본인의 당면 과제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 촬영이 끝나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테헤라를 어떻게 해서든 붙잡고 싶은 것이다. 테이크의 반복과 함께 호세인의 구애는 점점 더 진지해지고, 그의 감정의 변화 또한 테이크의 수만큼이나 많이 변화한다. 영화는 테이크와 함께 그 스토리의 정교함을 배가하는 대신 등장인물의 감정선의 변화와 함께 그 역시 변이의 과정을 거치고, 나아가 그들의 상황을 위해 복무한다. 테이크의 반복은 호세인이 계속하여 테헤라에게 프로포즈할 수 있는 상황을 구성해 주는 것이다. 인물이 영화에 복무하는게 아니라 영화가 인물에 복무하는 전복이 일어난다.

 영화의 말미에는 영화의 촬영 세팅 조차 사라지고 호세인과 테헤라만 남고, 카메라는 올리브 나무 숲을 가로질러가는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 그리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영화는 호세인이 결국 테헤라의 승낙을 얻어냈다는 암시를 주며 끝난다. 물론 정말로 승낙을 얻어낸 것인지는 관객이 판단할 일이다. 아, 영화의 역할은 이런 것일까? 영화가 결국 허구라면, 삶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지진이라는 처참한 상황에서 ‘현실이 이렇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구성될 수 있는 현실을 상상하게 하는 것. 어떤 삶을 상상하는지는 관객 자신에게 달려있다. 영화는 다만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는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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