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소생 페르시아 후기

작성자
손지은
작성일
2018-09-01 10:19
조회
82
나로부터 출발하는 질문

왜 같은 책을 읽고도 어떤 사람(특히 채운샘)은 무수히 많은 질문을 생성해내는데, 어떤 사람에겐 두루뭉술한 질문만 떠오르는 걸까. 혹은 부분적인 것에 꽂혀 전체 맥락과 상관 없는 느낌적인 느낌만을 나누게 되는걸까. 채운샘은 이것을 ‘나로부터 문제를 출발시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가령 이슬람을 공부하면서 재차 나왔던 ‘정치적 영성’이 궁금해질 때, 저는 먼저 참고 자료를, 논문을, 인터넷 기사를 뒤지며 ‘정치적 영성’에 대한 답을 구하려 했습니다. 허나 아무리 많은 자료를 모으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해도 그런 식으로는 결코 ‘정치적 영성’이란 개념을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건 표층 차원에 나열된 정보의 수집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공부하면서 질문이 만들어지지 않아 막막하고 답답했던 것은 공부의 출발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개인적 특수성을 빼고’ 어떤 질문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한국에 살고 있고, 어떤 시대를 살아가며, 규문에서 공부하는 등등의 ‘특수한 위치에 있는 나의 조건’을 떠나서 사유를 시작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나 자신에게 영성이 무언지를 묻지 않고 다짜고짜 영성이 뭐냐고 묻는 것은 참으로 공허한 일이었습니다. 나에게 영성이란 무엇인지, 우리 시대에 영성이란 있는 것인지, 만일 영성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등등. 나로 부터 시작하면 이렇게 질문이 쏟아져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을.. 그동안 정말 뜬구름 잡는 질문을 만들어내려고 애썼구나 싶어 헛웃음이 납니다.

이슬람과 만나면서 그간 공허한 공수표를 던지는 질문과 생각 사이를 맴돌았습니다. 잔생각을 쳐내고 선명한 하나의 질문으로 돌입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이전에 먼저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됩니다. 또 사유한다는 것이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의 진행이 아니라는 것도요. 가령 내가 이슬람에 대해 사유한다면 그것은 이슬람 자체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입된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 내 안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어떤 편견,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굳어진 의식 체계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사유, 심층의식과의 접속

사유한다는 건 뭘까. 여지껏 도시히코 상이 그렇게 반복학습을 시켜줬음에도 저는 사유활동이 심층의식과 아주 강하게 접속된다는 점에 미쳐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의식의 저 밑바닥에서 흐르는 심층의식을 작동시키는 것임을!

저 심층의식, 즉 무의식은 하나의 자연입니다. 규정성 없이 그저 흐름으로만 존재하는 세계, 우리 의식의 근저에는 언제나 심층의식이 흐르고 있습니다. 신화가, 철학이, 종교와 예술이 탄생하는 것은 이 심층의식 차원과 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심층의식은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근대적 사고가 뼛속 깊이 스며있는 사람들은 철저히 의식적입니다. 즉 코드화된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데 익숙합니다. 사회적 코드의 차원에서 의미와 의미를 연결하기에 코드가 전복될 위험이 없습니다.

반면 사유한다는 것은 표층의식을 완전히 떠나 심층의식의 세계에서 전혀 다른 분활선을 긋고 의미를 길러내는 것입니다. 사유활동은 샤먼의 격정적인 몸짓 만큼이나 전혀 정적인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사유한다는 것은 모험을 감행하는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의식의 지평에 갇히지 않고 저차원까지 잠수하여 의식의 뿌리와 접속하는 것은 사회적 코드를 완전히 벗어나는 곳으로의 위험한 도약.사유가 종종 광기와 연결되는 것은 그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채운샘의 말처럼 심층의식을 건드리는 독서는 인간을 ‘미칠 지경’까지 몰아갑니다. 어떤 사람의 글을 정말 이해하는 차원까지 가려면 자신을 완전히 탈각시키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미칠 지경까지 가보라’. 채운샘은 바로 바로 이런 위험한 책읽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배워도 상식을, 표층의식 차원의 정보를 배불리는 것일뿐 일상은 여전히 결정된 가치들을 따르며 살아가게 됩니다.

 

혁명을 바라보는 가치의 전환

호메이니와 이란 혁명은 기존에 생각하던 혁명의 공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전세계가 자본주의와 근대화라는 하나의 기치를 향해 내달릴 때, 이란은 완전히 다른 가치를 지닌 혁명을 이루어냅니다. 이란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통치자를 원하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이슬람 통치를 원한다’ 이것이 푸코가 이란 혁명에서 들은 민중들의 목소리였습니다. 서구적 시각에서 볼때, 합리적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건너무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죠.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의식화되고 합리적 사고가 세계가 진보를 가져다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푸코는 이 서유럽 중심주의 속에서 그 가치의 가치를 되묻습니다. 푸코가 이란 혁명에서 발견한 것은 근대적 가치에 종속되지 않는 세계가 아직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푸코가 호메이니와 이란 혁명에 주목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던 가치를 되묻는 것, 나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던 것이 정말 혁명일까를 사유하는 것은 기존의 가치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혁명은 기존체제에 반기를 드는 것도, 합리와 이성으로 무장하는 것도 아닌 사유하는 삶이라는 것. 실로 이보다 더 저항적인 삶이 있을까요.

사유하는 자에게는 고유한 영성이 있다는 것, 이번 시간에 제 마음을 뒤흔드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종교든 철학이든 앎의 궁극에는 언제나 이성을 넘어가는 비약적 차원이 있습니다. 영적이라 느껴지는 종교인들, 철학자들, 과학자들은 막연한 신비체험을 통해 깨달음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을 최대한 동원하여 그 이성적인 것 마저 무화시키는 지평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붓다의 연기법, 니체의 개념과 문체, 스피노자의 수학적 논증, 과학자들이 밝혀내고 있는 유적 세계의 보고 등. 이것들은 분명히 언어를 통해 표현된 것이나 언어적 코드에 매이지 않는, 언어 사이를 활개치며 그 운동성을 포착해내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유는 완전히 다른 분절선으로 세계를 비춘다는 것도요.

 

정열적인 피의 영지

많은 종교의 출발점은 ‘고苦’에 대한 감각입니다. 고통스럽다고 생각될 때 인간은 그 고통을 어떻게든 설명해내고자 합니다. 그리스의 신화는 이렇게 해서 탄생합니다. 인간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고 즐거워하는 신이 있다는 상상을 통해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화만이 아니라 여타 종교에서도 고통을 이해하는 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이 느끼는 고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질문하고 고에 대한 진리를 찾음으로서 고를 해소하고자 했습니다. 한편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신해서 죽은 이후로 살아있는 동안 고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다는 대속 개념을 만듭니다. 이렇게 세계의 많은 종교들은 고에 대한 감각과 연결됩니다.

헌데 이슬람에는 딱히 고에 대한 감각이 딱히 없습니다. 물론 무함마드 이래로 부족 사이의 전쟁이나 외세 침략 등 고통스러운 상황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코란에는 ‘인생은 고통이다’는 식의 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다는 점에서 공유하는 것이 있지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매우 다른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고에 대한 감각이 그렇습니다. 기독교에 있는 ‘원죄’의 개념을 이슬람에서는 도통 찾아보기 힘듭니다. 더불어 이슬람에는 고해성사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내밀한 고해를 통해 죄를 사하는 의식을 치른다면, 이슬람의 기도는 전혀 내밀하지 않습니다. 매일 5번 기도문을 외우는 것은 전 무슬림에게 공통되며 기도 내용 또한 소리로 표현합니다.

아직 연결은 잘 되지 않습니다만, 고를 딱히 강조하지 않는 이슬람은 매년 이맘의 죽음을 기리는 아슈라 축제에서 격렬하게 울부짖으며 자신의 몸을 내리쳐 피를 내는 행위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기독교가 고해성사를 통해 원한을 가책으로 전환한다면, 이슬람은 원한을 밖으로 돌출시킵니다. 이슬람이 강대국과의 마찰에서도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런 정서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타 문화권에서 보면 비상식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원한을 안으로 돌리는가 밖으로 표출하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 잔혹성을 필요로합니다. 일상에서 피 볼 일이 없는 현대인들에게 피는 두려움, 공포와 연결될지 몰라도 아주 오랜 문화권들은 피가 지닌 양가적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원시부족들은 통과의례를 할 때 신체에 고통을 가해서 자신이 어느 부족의 소속인가를 각인시켰습니다. 이처럼 피는 죽음인 동시에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생과 죽음, 그 양가적 이미지를 극한 경험을 통해 하나로 체험할 때 인간의 앎은 의식의 지평을 넘어가기도 합니다. 도시히코는 이것을 두고 ‘정열적인 피의 영지’라고 표현한게 아닐까 합니다.

아직 공부한 내용들이 제 안에서 잘 엮이지는 않지만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 큰 공부라는 생각을 배웁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모든 책은 그 시대와 싸우는 하나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배운걸 하나의 렌즈로 만들어, 그를 통해 세상을 보고 질문하고 생각하다보면 어느순간 도약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렇게 내 안에서 문제가 만들어지고 세상이 기존의 코드와는 다른 분절선을 지닌 것으로 보일 때까지 대략 10년은 공부하라고 하니 조금 희망이 생깁니다^^;

다음 시간은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서 질문을 대방출하는 시간입니다. 읽은 책들을 각자 나름으로 다시 정리해보고 어떤 주제로 글을 쓰고 싶은지 문제의식을 들고오시면 됩니다. 다다음 시간은 무려 3시간짜리 발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음~ 좋네요. 가보죠 ㅎㅎ 그럼 담주에 만나요 ㅇ-ㅇ
전체 1

  • 2018-09-01 14:00
    캬~ 꼼꼼한 후기 고생하셨습니다. '정열적인 피의 영지'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고통에 대한 이슬람 특유의 사유가 드러나는 지점이었네요.
    고통을 가지고 이슬람을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 누군가 하시려나?
    각자 질문을 가지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질문을 좀 더 정교하게 만들어서 다음 시간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