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9주차(7.3)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6-28 22:06
조회
92
 

여름과 함께 에세이 발표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어찌어찌 혹은 꾸역꾸역 소설의 페이지를 넘기고 공통과제와 에세이를 써내며 저희는 8주차까지 마쳤는데요. 이제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불퇴전! ‘난쟁이여, 너 아니면 나다!’라는 심정으로 훌훌 써버리는 방법밖에 없지요. 네, 저도 막막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심정으로 가보려구요.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는 것이 적극적인 것이라고 들뢰즈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어차피 할 수 없는 것을 할 순 없습니다. 주절주절 쓰고 코멘트 받고 또 주절주절 써보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교시부터 2교시까지 에세이 코멘트를 했습니다. 에세이 기간이면 매번 놀라게 되는데, 저도 그렇고 선생님들도 그렇고 누군가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도 이렇게 장기적이고 집단적인 형태로 고민해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제가 너무 무심한 걸지도?). 왜냐하면 본인도 잘 모르는 자신의 문제를 여러 명의 관점과 조언 속에서 거듭 고쳐 생각하는 일은 일상에선 잘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대단히 절실한 수준은 아니더라도요. 여하튼 10주 동안 가져오고 고치고 또 가져오는 과정은 뭔가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시너지라고 해야 할지 팀웍이라 해야 할지 애매한 화학작용을요. 저희조는 지난주부터 여덟 명 모두 코멘트를 하다 보니 길어지곤 했는데요. 코멘트를 시간을 지키는 것부터 진행이 덜 된 글에 중지를 모아 나름의 진단을 해주시는 것까지, 샘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결과는, 그리고 소화의 정도는 또 별개의 문제겠지만요.^^ (참고로 저는, 공부를 하면서도 왜 스스로를 못 믿는지, 고쳐야 한다는 식의 비판이나 자격지심 말고, 솔직하게 지금의 부침과 바라고 있는 것이 뭔지를 쓰라는 코멘트를 받았는데요. 한 발 빼고 자기를 지적만 하고 있으니 끊임없이 외부 잣대에 의존하게 된다는 말씀이 공감되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관련해서 이번 주 내내 고민하고 써보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악령>과 허무주의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의 제목이 영어로 ‘The Possessed’라는 말씀이 무척 인상에 남았습니다. 이것은 악령이라는 의미보다도 무언가에 사로잡히거나 들씌운 자들, 지배당한 자들, 신들린 자들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움직임들이 꿈틀거리던 시기, 도스토예프스키는 청년들이 무엇에 압도되어 있는가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이념이나 관념, 명분, 대의라고 여겨지고 많은 청년들이 거기에 경도되어 달려가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보기에 그 끝에는 파괴와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짧은 기간에 불과하지만 몇 가지 어이없는 죽음이 등장합니다. 레밧낀 남매를 난도질한 페찌까, 그 페찌까의 의문사, 리자를 팔매질한 군중, 샤또프를 죽인 5인조, 자살한 끼릴로프.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그냥’ 사람을 죽여도 될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걸까요? 남이든 자기 자신이든 밀고자든 비열한이든. ‘혁명’이라는 정의감만 있으면 그 많은 죽음이 정당화될 수 있나? 무엇이 그들에게 우리의 윤리와 도리마저도 전혀 없는 것처럼 굴게 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질문을 하게 합니다.

무언가에 들씌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 그렇지 않은 시대가 있긴 할까요? 라고 묻는 채운샘의 말씀을 듣고 저는 잠시 공상에 잠겼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떨까. 한 세기 전 혹은 후에 보면 지금 역시 병적일 정도로 기이한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룸 전세가 2억인데, 그 돈을 만들려면 한 달에 백만 원씩 모아도 20년 정도가 걸리는 시대. 십대부터 팔십대까지 1080 모두가 당연한 것처럼 돈놀이를 하는 시대. 만인의 꿈이 건물주인 시대. 신념이든 무기력이든 허무주의든 무언가에 들씌웠다는 것 말고 이런 열풍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 해보았습니다.

어떤 인터뷰에선가, 사람들에게 ‘투자를 해서 번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가장 많이 나온 것이 ‘다시 투자한다’였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채운샘은 우리 시대의 최후의 인간은 건물주 혹은 건물주를 꿈으로 삼는 우리가 아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더 열심히’라는 열정도 제 또래들에게는 이제 우습지도 않습니다. 이전에 가치 있다고 여겨온 것들인 진정한 사랑, 값진 노동, 사회의 개혁, 자수성가 등의 신화는 피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것에 힘을 쏟고 목숨을 바치는 건 옛날 라떼의 일이죠. 누가 쥐어 주는 돈, 가만히 있어도 밥과 옷과 꿀이 나오는 삶만을 바라는 우리는, 어쩌면 니체의 표현대로 저희는 ‘죽기에도 지쳐있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다소 암울한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키루스의 교육에 대한 말씀이 하나의 질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정복해온 것들, 벌어온 것들, 열과 성을 바쳐 이뤄온 무언가가 보람이 있기 위해서는, 창을 우리 자신에게 겨누고 우리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우리는 마치 우리가 겨우 다음의 투자를 위한 자본금을 마련하기 위해 달려온 것처럼 구는 걸까? 돈뿐만이 아니라 공부도 마찬가지고 건강관리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뭔가에 들씌운 것처럼,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묻고 닦는 일을 방치하고 다음, 다음, 다음 하며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자문하게 됩니다. 그 끝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지 않고서 말이죠.

쓸데 없는 감상을 적다보니 스따브로긴이나 <니체와 철학>의 허무주의 내용은 쏙 빼먹었네요. 나영샘조의 토론 내용과 함께, 주영샘의 후기에서 찾아보세요~!

[과제&공지]
  •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 초고를 써옵니다!

  • <악령>을 짧게 토론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 간식은 현주샘과 승연샘이 준비해주시기로 하셨고,

  • <안티크리스트> 강의가 있으니 책 챙겨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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