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8주차 후기

작성자
박주영
작성일
2021-06-29 22:14
조회
83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벌써 8주차네요. 시간이 흐른 만큼 각자의 에세이도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쌤들의 고민과 니체와 만난 지점들이 진솔합니다. 쌤들의 글을 읽으면서 우린 비슷한 듯 하지만 참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어떻게 마무리를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각자 발 밑의 번뇌에 대해 고민하고 글을 쓰고 이를 나누는 시간이 참으로 충만하게 다가옵니다. 8주차에는 두 조 모두 에세이 코멘트에 집중했고, 도선생님 「악령」에 대한 토론은 에세이에 밀려 버렸네요. ㅋㅋ 흡입력 있게 쭉쭉 읽어나갔던 ‘죄와 벌’에 비해 다소 지루하고 내용이 잘 안 잡힌다는 평을 받는 「악령」. 오늘 채운샘의 강의를 듣고 나니, 스타브로긴 등 몇몇 인물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면서 다시 책을 펼쳐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1.「악령」

  「악령」의 영문제목은 「The Possessed」라고 합니다. 뭔가 사로잡혔다는 의미죠. 마귀 들리거나 신들렸다는 뜻도 되는 만큼, 어떤 것에 홀리고 강력하게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마가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들어오고, 그것은 우리를 강력하게 포섭하고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를 넘어갑니다. 「악령」의 인물들은 무엇에 사로잡힌 걸까요? 그들은 혁명가, 무정부주의자, 슬라브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의 다른 모습을 하고 나타나지만, 모두 관념에 사로잡혔다는 지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어찌보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러시아 혁명 직전 시대에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신념은 그들이 믿은 이성뿐만 아니라 강렬한 감정이 동반된 것입니다. 관념, 사람, 사물 등 무엇인가에 사로잡혔을 때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이해가 금방 갑니다. 논리와 합리성에 기반한 이론일지라도 이것이 내게 맹목적으로 작용한다면, 그 이론은 나를 강렬한 감정과 함께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런 무엇인가에 사로잡힘, 악령은 러시아 혁명 직전의 특수한 상황일까요? 니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無’라도 의지하려고 할만큼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상황을 못견디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를 살펴보면 ‘80년대 청년들은 대의명분에 압도되었고, 현재는 코인, 주식, 부동산 등에 사로잡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대상은 변화될 뿐 우린 계속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산건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듭니다.

  「악령」에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다양한 청년들이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스타브로긴입니다. 그는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구체적으로 등장하기보다는 뭔가 유령같은 비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완벽한 사람이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활력이 없고 구체적인 행위가 안 드러나는 인물이고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표뜨르, 끼릴로프, 샤토프, 5인조 등 청년들이 그를 구심점으로 움직입니다.

  그는 어떤 인물일까요? 그는 선한 사람일까요? 악인일까요? 그는 선악을 넘어간 자입니다. 선악의 구도로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적으로 얘기하면 그는 단멸론자입니다. 불교에서 비판하는 양극단으로는 ①상주론(常住論)과 ②단멸론(斷滅論)이 있는데, 상주론은 유(有)를 버리지 못한 거라면, 단멸론은 무(無), 공(空) 자체를 실체화한 것입니다. 단멸론이 더 위험한데,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 윤리의 부재라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것이 무가치하면 굳이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무릅쓰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윤리가 발생하는 지점이 타자와의 관계임을 감안할 때 극단적 허무주의자는 누군가와도 섞이지 않고 어떤 관념도 신념이나 윤리로 만들지 못합니다. 스타브로긴이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어떤 누구와도 섞이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면서 마음의 지옥(「죄와 벌」의 로지온과 대비)도 겪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삶과 자살 둘다 의미가 없는, 오직 부정만 의미가 있는 단멸론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극단적 허무주의자의 필연적인 귀결로서 자살을 하게 됩니다. 자살로써 신념을 보여준 끼릴로프와는 다른 지점입니다.

  부록에 나오는 ’찌혼의 암자에서‘ 부분은 스타브로긴이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줍니다. 찌혼신부는 스타브로긴의 윤리발생 가능성에 노력을 했지만, 스타브로긴은 마지막까지 허무주의자로 남습니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으면서 필연적 귀결로서 자살한 스타브로긴, 신이 되고 싶어한 끼릴로프와 모비딕을 잡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에이허브는 양 극단의 삶을 보여주는데, 윤리는 이 둘 사이에서 형성됩니다. 지상의 삶은 수 많은 타인과 함께 하기에 우리는 윤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니체가 도덕을 비판한 것을, ’도덕은 나쁘니 막 살자‘라고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이것은 스타브로긴과 같은 허무주의자의 입장이거든요. 니체는 새로운 윤리의 생성을 얘기한 것이지 도덕은 다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2. 니체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제5장 초인을 통해 허무주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초인이란 신과 같은 자, 끼릴로프처럼 신이 되고 싶은 자가 아닙니다. 초인은 건너가는 자, 자신의 우상을 허물어뜨리고 나를 극복하는 자,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자입니다. 허무주의에서 허무는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가치함을 의미한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즉 스타브로긴처럼 무(無)만 가치가 있고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은 것이 허무입니다. 삶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부정하고 비하하는 한에서 무가치해지는데, 비하는 항상 어떤 허구(우상)를 가정합니다. 우상에 의해 사람들은 삶을 비하하고, 그 우상을 삶보다 우월하게 여깁니다. 우월한 가치들이야 말로 삶을 부정하고 무화시키려는 의지와 관계가 있는데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우월하게 보고 있는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허무주의자라고 하면 굉장히 무력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데요. 목표를 위해 능동적으로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형 인간들은 허무주의자가 아닐까요? 열심히 살지만 항상 배고프고, 자본이든 명예든 목표를 삶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두기에 그들은 허무주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을 가장 우월한 가치로 두는 워커홀릭은 가장 적극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예속적인 자며, 허무주의자입니다. 반면 장자는 아무것도 안하는 능동성을 잘 보여줍니다. 힘을 추동하는 벡터가 무엇인지 잘 봐야 합니다.

  들뢰즈는 허무주의의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 번째로 앞에서 얘기한 무의 의지(원함을 없애기), 권력의지의 성질인 부정을 들고 있구요. 두 번째로는 반작용, 반응적인 힘을 말합니다. 즉 내가 능동적인 것을 발명할 수가 없고 무력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상호 연쇄적으로 작용합니다. 무의 의지와 반응적 힘들은 근본적으로 결탁하는데, 무의 의지는 반응적 힘들을 승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반응적인 자는 부정적 힘의지를 쓰죠. 즉 내가 무엇을 하기보다는 타인도 그것을 못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은 것들. 반응적 힘의 궁극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권력욕. 그 누구도 나를 배신하지 않도록 모든 힘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 그러므로 뭔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분노가 일어나거나 슬플 때, 나의 나약한 마음과 타자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무능력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니체는 신이 연민으로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연민은 허무주의의 실천이면서, 무에 대한 의지를 내세, 신, 참된 삶, 구원, 지복 등 적당한 말로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연민은 약하고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입니다. 신은 인간에게 연민을 베풀었으나 결국 인간은 모든 것을 살펴 본 자비로운 자, 즉 증인을 못 견딥니다. 인간은 양심의 가책도 느끼고 싶지 않은 거죠. 신의 연민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을 죽음으로 내몹니다. 대신 인간은 신의 자리에 자신을 놓는데요. 인간은 이제 자신에 만족하고 자기 자신의 가치(반응적 삶, 평균적인 가치)들을 전파시키고자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 등 종교가 위축되고 무신론이 팽배한 점을 살펴보면, 이 사회가 과학적, 합리적이라서 그렇기보다는 약간의 양심의 가책도 견딜 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드네요.

  신의 자리에 올라선 인간은 수동적 소멸을 꿈꾸고, 타인과 섞이지 않으며 홀로 반응적 삶을 사는 최후의 인간이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죽기에도 너무 지쳐 있다.”라는 말이 최후의 인간을 잘 표상하는데요. 거대한 무기력, 아무 의욕도 없이 그저 편안함, 안락함에만 있고 싶은 마음. 지금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고 회사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계발, 워커홀릭, 열정이 사회를 지배했다면, 지금은 “그렇게 해서 뭐해?”, “역시 건물주가 최고야”라는 담론이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20세기 이후는 반응적인 삶이 변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표, 평균적 가치 등 도달을 위해 힘을 쓰다가 이제는 현타와 같은 수동적 허무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중이죠. 두 모습 모두 자신의 반응적 형태로 환원된, 비하된 삶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지금, 더 많은 돈을, 더 많은 쾌락을 위해 에너지를 쏟지 말고, 키루스가 정복의 보람을 말한 것처럼 이 경제성장이 보람되기 위해 이제 내 삶,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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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30 10:10
    믿고 읽는 주영샘 후기! 강의내용이 알차게 촘촘히 정리되어 있네요!
    가장 강해 보이고 능동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종종 발견되는 허무주의. 우리 시대의 허무는 곳곳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그 귀결은 어떤 죽음에 닿아 있는지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