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차탁마NY 2학기 9주차 후기(2021.7.3)

작성자
윤수연
작성일
2021-07-06 02:00
조회
104
벌써 니체 세미나도 2학기의 끝을 달리고 있네요. 9주차에는 오전에 에세이 토론을 잠깐 하고, 오후 시간에는 채운 샘 강의와 길진숙 선생님의 도스토예프스키 특강이 있었습니다.

 

2교시: 니체 강의

 

니체의 철학은 전복이지 대안이 아니라는 말이 가장 와닿았던 강의였습니다. 니체는 ‘하나의 진리’, ‘영원한 진리’를 무너뜨리고 경험으로서의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는 하나의 관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삶에서 작동하는 것, 삶 속에서 구현된 깨달음이 매 순간의 진리가 됩니다. 그런 진리는 발견자 없이 존재할 수도, 발견자와 무관할 수도 없겠지요. 발견자에 의해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는 하나일 수도 영원함으로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결국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던 무언가를 허물고 새롭게 생겨납니다. 생성은 소멸을 내재한다는 것, 무가 되지 않고서는 잉태할 수 없다는 것, 모든 것이 썩는 겨울을 지나지 않고서는 봄을 맞을 수 없다는 것 모두 이러한 가치의 전도를 통한 가치 창조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생성-소멸은 고통스럽습니다. 오죽하면 사지가 찢어지는 것으로 표현되었을까요! 우리는 많은 것들을 믿고 싶어 하고 보존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타오르고 꺼지는 불처럼 역동합니다. 그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변하는 도덕과 가치를 만들어내고 세상을 거기에 끼워 맞추려고 합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 계속 고통을 겪을 수 있는 힘,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할 수 있는 힘에 대해 니체가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니체의 망치는 일회용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들고 다녀야 하는 건가 봅니다.

 

강의 도중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진리는 늘 가면으로 나타나며, 그 순간의 모습으로부터 동떨어진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가짜 내 모습과 가짜 세상 같은 것도 당연히 없겠지요. 모든 것이 내 진짜 모습입니다.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던 때가 있습니다. 나의 ‘성향’, ‘성격’이라는 말로 정체성을 설정하고 그에 맞지 않는 충동과 욕구가 일면 이상하게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만들어낸 정체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로워한 적도 있고요. 가만 보면 그 정체성이라는 것에 많이 갇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아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타인과 나를 구별 지으며 존재를 확인받기도 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런 사고방식이 익숙했던 것 같아요. 연결보다는 경쟁이 자연스러웠고, 타자는 뛰어넘어야 할 외부의 존재, 완벽한 비아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타자들이다’라는 말이 계속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요즘 영어 세미나에서 배우는 우분투 개념과도 관련이 있고요. 근대적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박힌 제게는 낯설면서도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머리로 아는 것 말고 신체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내향성 49% 외향성 51%’와 같은 타자 없는 객관적 수치로서의 정체성이 아닌, 매 순간 익명의 삶들이 부딪히며 타자와의 차이로 인해 생성하고 소멸하는 자아는 뭘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체성을 좀 떠나고 싶어요. 딱딱한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습니다ㅎㅎ

 

2교시: 도스토예프스키 강의

 

강의가 끝나고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도 선생님이 퇴고를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였어요. 항상 선수금을 땡겨받고 데드라인에 쫓기며 글을 썼기 때문에 퇴고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네요. 그래서 문장이 그렇게 생동감 넘치고, 마치 본인이 눈앞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글을 써낸 걸까 싶기도 합니다. 역시 사람은 데드라인이 있어야 뭐가 나와도 나오나 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소 해왔던 생각과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짧은 시간에도 둑이 터져 나오듯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겠지요. 죄와 벌도 그렇고 특히 악령을 보면 수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사상과 관념이 대부분 대화로 표현이 됩니다. 이를 두고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에는 ‘관념이 육화되어 있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갖 인물들의 성격과 의식이 한 사건, 한 시공간에 혼재하고 있습니다. 악령을 읽다 보면 다른 건 모르겠지만 당시 러시아의 혼란스러움은 아주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전달됩니다. 무신론 합리주의 낭만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등 모든 주의들이 뒤엉켜 사람들이 신들린 것처럼 ‘썰매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는’ 모습의 러시아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스따브로긴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스따브로긴은 ‘풍문’과도 같은 인물입니다. 길진숙 선생님의 이 표현이 너무 웃기고 와닿았어요. 스따브로긴의 말과 행동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보다 주변 인물이 떠드는 소문들, 스따브로긴에게 간절하게 하는 말들로 더 많은 것들이 표현되는 인물입니다. 스따브로긴은 치명적 매력이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어떤 신념에도 신들리지 않고, 어떤 인물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나지 않는 인간입니다. 모든 신념과 관념에 대한 불신, 도덕에 대한 반발, 최초로 회의한 인간인 그는 인간신, 이 소설에서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인물이 그를 향해 있습니다. 그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물이 향하는 그 인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인물의 결말은 자살입니다.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인물이지만 결국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 스따브로긴이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됩니다.

죄와 벌과 악령은 스스로 구원하는 여정이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관념에 들떠 라스콜리니코프와 뾰뜨르는 지상의 삶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구속합니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관념에 매달리는 동시에 그 어떤 관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스따브로긴을 향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모두가 향해 있는 그 인물,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으며 그 무엇도 간절히 원하지 않는 스따브로긴은 결국 권총 자살을 합니다.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스따브로긴의 지점을 건너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해체된 고통의 한가운데, 악의 한가운데를 마주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만들지 않는다면, 자신의 아름다움과 지상의 삶을 만들지 않으면 결론은 무, 파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내면의 정념과 충동들, 이념을 향한 열기와 홀림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런 홀림과 열기가 없다면 삶을 살아갈 이유도 없어집니다. 홀리기 때문에 우리는 지상의 삶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말, 건널 수밖에 없는 지점으로서의 악도 삶의 한 과정이라는 말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이면 2학기도 마무리되겠네요. 에세이를 써본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많은 분들 앞에서 제가 쓴 글을 읽는 것도 처음이라 모든 것들이 다 새롭고 무섭고 떨리고 무섭고 하네요ㅋㅋ 제 얘기만 가지고 열 페이지나 글을 쓰다니,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입니다. 에세이 다들 파이팅 하시고, 다음 시간에 뵈어요!
전체 1

  • 2021-07-06 11:41
    도스토예프스키가 퇴고 없이 글을 써냈다는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죠...
    또 19세기 러시아 소설이 일종의 사회학이자 예언서라는 말씀도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
    무언가에 홀려있다는 사실이 부정적으로만 생각되었는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떤 것에 홀려 있기 때문에 또 어딘가로도 다다를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 마음에 많이 남았습니다.
    이런 정신병 걸린 것 같은 인물들과 동선들이 리얼리즘적이라는 말도요. 그런 열기, 동의보감 용어로는 허화망동 없이는 어떤 것이 명징해지지 않는다는 것.
    "연옥을 건너지 않고는 신을 만날 수 없다"는 말도 왠지 기억에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