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10주차(7.10)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7-06 11:47
조회
94
 

 

벌써 2학기도 마지막 에세이 발표만을 남겨두고 있네요. 9주차였던 지난 시간에는 조별 코멘트, 채운샘의 짧은 코멘트와 강의, 길진숙 선생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채운샘은 에세이의 몇가지 팁을 다시 강조해주셨는데요. 제목이 중요하고 거기에 한 방이 있다는 것, 목차에서 전체 흐름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 그때 니체의 키워드가 표지판처럼 들어가 있으면 좋다는 것, 글의 리듬이 음악처럼 강조되다가 흐르다가 할 때 잘 읽힌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글은 다른 무엇보다도 소통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기본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결코 쉽게 짠 되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연습에 연습이 있을 뿐이란 생각도 들구요.

글쓰기와 관련해서 강의에서의 한 말씀이 떠오르네요.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지>라는 장에서 니체는 어이없지만 두고두고 곱씹어볼 말들을 많이 하는데요. 그 중 유명한 한 구절입니다.

“나는 파괴 시의 즐거움을 내 파괴력에 상당하는 정도만큼 알고 있다―이런 두 가지 면에서 나는 부정하는 행위를 긍정의 말에서 분리시킬 줄 모르는 내 디오니소스적 본성에 복종한다.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다.”(458쪽)

‘부정하는 행위’는 NO라고 말하며 하는 행동입니다. 의심하고 질문하고 따지고 전복하는 것인데, 니체는 그 일이 ‘긍정하는 말’ 즉 YES라고 말하며 그 어떤 불확실함과 우연과 이질성도 필연으로 이해하는 일과 하나라고 말합니다. 부수는 것과 만드는 것이 하나라는 것이죠. 그걸 서로 다른 둘로 볼 수 없는 것이 그의 본성이라고. 이것은 마치 겨울과도 같다고 채운샘은 비유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썩게 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잉태하게 하는 것이 겨울이죠. 여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만개해있지만 죽음과 썩음을 앞두고 있지요. 혹은 품고 있지요. 소멸은 생성을 내재하고 있고, 그 역도 성립합니다. 어떤 것도 썩지 않고는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새 힘이 솟는다” <우상의 황혼>의 서문에 나온 니체의 라틴어 격언도 정확히 같은 말인 듯합니다. 자연과 생명의 이치가 그렇다면, 우리의 글쓰기는 어떨까요? 채운샘께서는, 우리 문제를 바닥까지 들어가서 헤집지 않는 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출구도 생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한가, 하는 문제는 니체도 늘 말해왔던 것이죠. 그것은 자기가 아는 것을 남에게 밝히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몰랐던 것들을 자신에게서 찾아내는 일일 것입니다.

새 힘, 새 건강, 긍정의 말과 같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채 행해지는 파괴작업. 니체는 이것을 ‘내 안으로의 자기 극복’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과 그런 자신을 낳은 것들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도덕 및 도덕주의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도덕은 기존의 패턴 및 체제를 유지시키는 가치들이고 도덕주의는 거기에 순응하고 그런 가치를 재생산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극복하는 자, 주어진 가치가 아니라 변화하고 생겨나는 가치에 충실하고 민감한 자는 ‘비도덕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이때의 비도덕주의는 도덕을 부수고 악을 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아침놀>에서 니체는 말한 바 있습니다.

“내가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비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피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며, 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전자도 후자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근거들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아침놀, 112쪽)

비도덕주의자는 아나키스트가 아닙니다. 니체(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뾰뜨르 쓰쩨빠노비치와는 다르지요. 뾰뜨르는 그저 혼란만을 일으키길 원했습니다. 부수고, 죽이고, 태우고. 여기에는 회귀와 운동, 양면성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빛과 어둠이 그러하듯 선악의 가치 자체도 투쟁 속에서 끝없이 운동한다는 것을 최초로 보았던 자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상을 꿈꾸지도 무를 욕망하지도 않으면서 오르고 내리고 만나고 떠나며 여행하기를 계속한 것이 아닐까요.

‘진실성에서 나오는 도덕의 자기 극복’. 극복이라는 말을 거창하고 비장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채운샘은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걸로 되는 게 극복이 아닙니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기 이전에 이미 갇혀 있던 동일성과 정체성을 떠나는 것이 극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실성이 요구됩니다. 진실성 혹은 정직성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니체가 거듭거듭 강조한 것처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보이는 대로 보는 것, ‘끊임없는 전변’으로서 돌아오고 있는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세상은 원래 선하다고, 규칙적이라고, 매끈하다고 보고 싶어하며 그렇게 보려 합니다. 그래서 아프고 뒤섞여 있고 우연적인 것들, 고통스러운 것들은 예외나 가짜, 비상사태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엔 이것이 진실하지 않은 것이죠.

들뢰즈는 <플라톤주의를 뒤집다>라는 논문에서 니체를 포함한 자연주의 철학자들의 작업을 이렇게 말합니다. “유사한 것과 동일한 것에로의 모든 종속으로부터 차이를 해방시키는 일, 그리하여 이제는 반대로 유사한 것과 동일한 것을 차이 자체로부터 비롯된 이차적인 힘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변화와 운동과 싸움과 차이가 전부이고 일차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질서나 물체나 규정들은 이차적이고 임시적인 것이죠. 우선하는 것은 힘이고 환영이고 기운들입니다. 이런 이해에 단번에 가닿긴 어려울지라도, 계속 그 변화의 관점에서 나 자신과 나의 가치들, 그것을 고집하는 습관들을 묻고 물어가는 과정만이 극복이지 않을까 합니다.

초인은 자기 극복을 해가는 자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다른 존재나 다른 제도가 아니라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죠. 왜 라스꼴리니꼬프의 보나파르티즘이 무력했는지, 뾰뜨르의 파괴가 기쁘지 않았는지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의 극복은 자기 극복이 전제되지 않고는 허망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떠날 수 있을까요? 다행히도 그것은 간단한 팩트로부터 보장이 되어있습니다. 이미 우리 자신이 나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하나의 신체는 신체들의 통일체다.” 우리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다른 존재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나’라는 단독적 존재로 짜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환원되지 않고 드나드는 수많은 부분들로 이뤄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함께 살아간다’는 차원입니다. 이미 존재가 단독적이지 않고 복합적이라면 ‘자기만의 자기 극복’ 같은 것이 불가능합니다. 고로 라스꼴리니꼬프에서 한 발 나아가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는 어떻게 범법자(아나키스트)가 되지 않으면서 비도덕주의자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자가, 그 가치를 재생산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될 것인가? 니체의 삶, 이반 일리치의 삶, 그리고 몇몇 삶의 모습들이 떠오르네요. 죽을 위험의 통과의례를 거치고 돌아와서 돼지를 치고 아버지 노릇을 한다는 고대 부족들(?)에 대한 이야기도 떠오르고요. 비도덕주의의 길은 어쩌면 반도덕주의나 도덕주의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주절주절 쓰다 보니 길어졌네요. 길진숙 선생님의 재미난 특강 이야기는 수연샘의 후기에서 확인해주세요!

 

[공지]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 발표가 있습니다.

-금요일(7.9) 오후 10시까지 숙제방에 파일 업로드 해주세요!

-토요일(7.10) 오전 9시에 시작하므로 평소보다 더 일찍 오셔서 출력하고 정리해서 제시간에 딱 시작해보아요!

-간식은 모두 한 줌씩 준비해오기로 했습니다.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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