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2학기 3주차 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21-05-21 18:13
조회
84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흘러넘치는 푸르른 날에, 우리는 늘 그랬듯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공부를 이어나갑니다. 이번 학기 읽고 있는 마키아벨리는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그에 대한 선입관보다는, 전부터 스피노자를 통해 들어왔던 호감어린 관심으로 모두들 재미있게 읽고 있는 중입니다. 1세기 이상이라는 시간적 차이를 뛰어넘어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교차점들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스피노자가 마키아벨리를 직접 존경의 언사로 표현하기도 하듯이 두 사람이 마주치는 공통의 지반은 우리가 그들의 정치론 나아가 오늘날의 정치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인민, 스피노자의 대중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가 정치와 권력을 사유하는 공통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은 정치와 권력을 일방적인 지배와 억압의 형태가 아니라 군주와 인민, 통치자와 대중 사이의 역학적인 관계로 사유합니다. 군주론은 일반적으로 군주만을 위한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와 권력을 사유하는 데 있어서 인민에게 주목하고 군주와 인민과의 관계성을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인민을 위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인 군주, 귀족, 인민, 이 세 요소 사이의 힘 관계가 정치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을 15세기에 이미 포착한 마키아벨리의 시선은 그래서 참 선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는 스피노자처럼 마키아벨리도 인민을 그 자체 선이나 악이 아니라 역동적인 양가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 집합적 주체로 이해하면서 정치에서 중요하게 사유해야 되는 것은 조화와 균형이 아니라 적대와 갈등이라고 본 점입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원리로서 국가이성이 등장하는 17세기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국가의 어떤 바람직한 상태를 전제하고 그런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조화와 균형만을 중시하고 중점을 두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대중 개념을 연구했던 발리바르의 분석처럼 언제나 능동과 수동이라는 복잡한 상호적 힘들의 관계 속에서 특이한 방식으로 구성되거나 해체되는 대중의 양가성에 우리가 중점을 둔다면, 대립과 갈등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민, 대중은 능동과 수동을 오고가는 변이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 안전을 해치는 존재로 등장할 수도 있지만 사회 안정을 구축하는 능동적 존재도 될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인으로서의 현실적 감각과 역사로부터 얻은 인식을 바탕으로 군주의 시선뿐만 아니라 인민의 시선을 중시하면서 인민이 어떤 군주를 원하는지, 인민의 지지와 호의 없이는 어떠한 강력한 군주도 왜 취약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를 군주론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군주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국가는 유지될 수 없다는 지점은 맹자와도 연결이 됩니다. 흔히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를 연결시키지만 오히려 맹자와 더 가깝게 보인다는 샘 말씀처럼 왕도정치, 민심이 곧 천심, 백성들이 마음으로 복종하는 정치를 사유했던 맹자는 마키아벨리와 많은 접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개인의 역량을 집단의 역량과 일치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던 스피노자의 사유는 이렇게 마키아벨리나 맹자와도 연결이 됩니다.

비르투와 포르투나

스피노자의 정치론에서 핵심 개념인 역량이 마키아벨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정치란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것이기에 군주의 역량이 중요하지만 그 역량은 인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얻을 때, 인민의 역량과 군주의 역량을 일치시킬 때 성공적인 군주국이 성립된다고 마키아벨리는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통일된 민족국가를 이루기 위한 질료로서 군주, 귀족, 인민의 세력관계와 함께 때 즉 운을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무규정적 힘인 이 질료들을 어떻게 잘 이용할 것인가가 성공적인 군주정을 이루는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주의 역량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곧 군주의 권력은 아닙니다. 그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역량이 국가의 역량과 함께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량은 적절한 때, 운을 만나야 합니다. 운이나 팔자를 말하면 마치 비합리적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아무리 출중한 역량을 가지고 있더라도 모든 질료들이 하나로 합치되는 적당한 때를 만나지 못하다면 무용하게 되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동양에서는 이 때를 아는 것을 중시해왔습니다. 비르투는 기회(occasion)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포르투나와 비르투의 역학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운명이 우리의 모든 행위를 규정하는 결정론이 아니라 운명을 기회로 만드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통제 아래 놓여있습니다. 천지인 괘가 보여주듯 우리는 천지의 운동에서 벗어날 순 없지만 이미 천지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운동이 우리의 뜻에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에 따라 천지를 감응시키고 참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명 없이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도 없지만 그 천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닥치는 일들을 피할 수는 없지만 도래하는 일들에 대해 기미를 읽어낼 수는 있습니다. 그 기미를 읽어내는 자들이 성인일 것입니다. 자신에게 역량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오직 운명만이 작동하겠지만 역량이 갖추어져 있다면 운명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운명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감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무엇보다 역량으로서 자신의 행위양식을 갖추고 그 역량이 상황에 부합하는 때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합니다. 그 상황에 부합하는 비르투를 갖는 것,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일치는 그렇게 중요하게 사유됩니다. 스피노자 말처럼 자유와 역량은 제한적인 것이지 그 조건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역량도 그 역량이 발휘될 수 있는 상황, 운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상황 구속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역량 자체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현행적이라고 보는 점에서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환상으로부터의 도주선

얼마 전에 토론시간에 정치인의 도덕성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요.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정치인에게 어디까지 도덕성을 요구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기준이라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역량과 도덕성, 윤리의 문제가 분리된 것은 아닐 터인데 어떻게 함께 사유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샘도 도덕적 완결성이 유토피아적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스피노자가 평생에 걸쳐서 싸우고 있는 적이 신학적 환상이라고 하셨는데요. 깊은 공감이 됩니다. 작년에 스피노자의 정치론과 동양의 사유를 교차해서 읽어가면서 제 자신의 허구와 가상을 맞닥뜨릴 때마다 사실은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되기보다는 허구와 가상 없이 과연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아무리 허구이고 가상이고 관념에 불과한 것임을 인식한다고 할지라도 알면서도 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가 가상을 구축하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었는데요. 그만큼 모든 곳에서 허구, 신학적 환상과 싸우는 일은 끝나지 않을 지난한 투쟁의 과정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자신의 신학적 환상으로 삼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은 매순간 도처에서 작동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정치 상황을 너무 혼란스럽게만 바라보고 있었지 오히려 그 만큼 더 복잡하고 다양한 저항과 도주선을 발명할 기회로는 사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은 들뢰즈나 푸코가 말한 도처에 도주선이, 도처에 저항이 있다는 말이 지금처럼 실감되는 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정치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일지. 우리가 갖는 정치적 견해란 어떤 것이며, 대중의 역량을 어떻게 구성적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을지, 민주주의를 유토피아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체에서 부단히 제기되어야만 하는 실천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여전히 우리 앞에 많은 질문들이 놓여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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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22 14:27
    키야~ 역시 강의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된 후기네요. 거기에 마지막에 던지신 질문도 공감이 가네요. 신학적 환상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공부의 목표일 텐데, 그것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죠. 도덕성을 생각할 때조차 역량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 신학적 환상으로 접근하는 게 대다수인 것 같아요. 특히 말씀하신 대로, 정치와 관련해서는 도덕성을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도덕성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최소한'을 요구하는 이상 신학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역량'이 중요하겠다는 질문이 남네요. 도덕성조차 역량으로 이해해야 하니까요. 흠... 공부하면 할수록 쉽지 않습니다. ㅋㅋ;;